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구글 선호 매체 등록천현우의 요즘 조선소 _15일러스트레이션 김재영광고‘뭐 하노’, 마산 집에서 잠깐 낮잠 든 사이 도착한 문자였다. 김형, 10년 전 마산 용접 자격증 학원에서 만난 한살 위 형님이었다. ‘어디 놀러 안 가고 집에 있습니다’, 답장을 보낸 다음 발을 씻었다. 알코올 솜으로 소독한 다음 발가락 사이사이 연고 바른 면봉을 쑤셔 넣었다. 조선소의 여름은 그나마 겨울처럼 손이 부르트고 갈라지진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운이 좋아 현장직 10년 넘도록 무좀을 겪어본 적 없던 용접공의 안일함이었다. 안전화의 온기를 받아 퍼진 곰팡이균은 무자비했다. 일 마치고 나면 마땅히 시간이 안 나고, 토요일엔 늦잠 자느라 병원을 못 가는 사이, 오른쪽 엄지발톱은 물기를 쫙 빨아먹혀 구운 누룽지 꼴이 됐다. 왼발은 더 심각해 발바닥 껍질이 다 벗겨지고 구석구석 수포까지 났다. 가렵고 따가워 죽을 맛이었다. 피부과에선 독한 약을 처방하며 술에 혀끝도 대지 말라고 했다. 발에 약칠 다 하고 돌아오니 답신이 와 있었다. ‘날 더운데 백숙이나 묵자’, 난감했다. 김형은 같이 놀기 재밌는 사람이 아니었다. 말이 유창하지도, 리액션이 재밌지도 않았다. 취미도 달라서 대화를 이어나가기도 어려웠다. 잠깐 고민 끝에 승낙하고 장소를 정했다. 보고 싶었다기보단 남는 시간에 동네 형한테 인사하러 가는 쪽에 가까웠다. 그렇게 예의상 잡은 만남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위로를 받을 줄 몰랐다.우리는 마산에서 가장 유명한 삼계탕집에서 만났다. 막상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탕이 나오기도 전에 깍두기를 안주 삼아 소주잔을 채웠다. 피부과 의사 양반의 신신당부는 화이트 한잔과 함께 쑥 내려가버렸다. 백숙이 우리 상에 놓였을 땐 이미 소주 한병이 거의 다 비었다. 오래 알고 지냈지만 교류가 별로 없던 사이가 으레 그렇듯 과거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김형은 용접보단 공부를 더 잘했다. 우리 기수에서 유일하게 4년제 국립대를 졸업한 ‘똑띠’였다. 공대 졸업생도 혀를 차기로 악명 높은 재료공학 과목을 뚫고 용접 기사 자격증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정작 본인은 실기 한번 치더니 자기랑 안 맞다며 용접에서 손을 뗐다. 얼마 후 전기 기사 자격증을 따더니 방산 회사의 전장 제품 생산직으로 들어갔다.광고불콰해진 김형은 근황을 풀어놓았다. 10년 동안 묵묵히 일하니 과장이 됐다. 단순 조립부터 시작해 어느새 컴퓨터 앞에서 도면을 만지고 현장 관리까지 하고 있다. 얼마 전 아파트 대출을 다 갚았으며 오래 만난 사람도 있고 곧 청혼할 예정이다. 듣는 동안 한 회사에서 묵묵히 일한 끈기와 근성에 혀를 내두르다가도 내심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나는 2년 정도 일하다 관두고 또 딴 회사 다니길 반복했다. 그 결과 오랫동안 제대로 된 경력도 기술도 없이 겉돌았다. 지방 사는 1990년생 남성은 김형처럼 경력, 직업, 주거가 안정되어 있는 사람이어야 기를 펼 수가 있었다. 물론 비슷한 출발점에서 시작한 친구들 모두가 김형 같은 결과를 내진 못했다. 아직도 자동차나 유흥에 월급을 쏟아붓는 친구도 있었고, 주식이며 가상화폐부터 아예 도박까지 손댔다 망한 친구도 있었다. 와중에 절반쯤은 꾸역꾸역 자리를 잡았다. 대기업 정규직은 못 갔어도 그럭저럭 안정적인 중견기업으로 이직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기술을 갈고닦아 자기 자신의 가치를 높여놓았다. 이도 저도 아니면 하루 열네시간 악착같이 일해서 돈을 모으기도 했다. 개중에 나만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광고광고내 효용은 뭘까. 현장에선 여전히 막내고 미숙. 그나마 있는 재주라곤 글쓰기인데 그마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내 고향과 일자리를 사람 못 살 곳처럼 묘사하진 않았나. 내가 힘들기 때문에 그냥 다 같이 어렵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김형이 글은 잘 보고 있다며 요즘 어찌 사냐고 물었을 때, 술발을 빌려 ‘급발진’했다.“잘 못 사는 거 같습니다. 저 혼자 괜히 유난 떨고 돌아다니는 거 같아요. 괜히 지방 내려와서 회사들만 들쑤시고. 그런다고 뭐 바뀌는 건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돈이라도 잘 벌길 하나. 그냥 회사나 열심히 다닐걸.”광고그리 생각하지 마라, 나무라듯 손사래 친 김형은 5년 전 내 소개로 기자와 인터뷰를 한 이야기를 했다. 들어보니 내가 갓 언론사에 칼럼을 쓰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노동 취재를 하는 기자분이었으며, 지방 노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너무 반가워서 일하면서 겪었던 불합리함을 미주알고주알 다 늘어놓았다. 통화가 끝날 무렵 기자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비슷한 처지의 현장직 노동자를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지방 사는 비슷한 연령대의 비슷한 직군을 가진 청년’을 취재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내 딴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김형의 연락처를 주었다. 현장 이야기를 대신 써준다고 하니 이보다 감사한 일이 어디 있을까.내 의도와 달리 김형은 인터뷰가 꽤 버거웠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기자라는 직업이 낯설다. 더군다나 대다수 현장직 노동자가 남 알아듣기 좋게 말하는 기술이 없다. 행여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이 안 됐을까, 괜히 기사로 나갔을 때 회사에 불이익받는 건 아닐까, 영 뒷맛이 찝찝했다면서 술 한잔을 건넸다. “이 판떼기 야그는 니가 써야지. 안 글나.” 그 한마디가 큰 위로가 됐다.문득 서울에서 지방으로 도로 내려가며 했던 다짐이 떠올랐다. 딱히 거창한 포부도 아니었다. 공장 동기들이 여덟시간 일하면 월 200만원쯤 받는데, 이 돈은 너무 짜니까 250만원 정도는 받아가게 하고 싶었다. 나는 한국의 하청 현장직 노동자가 더 나은 삶을 살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는 대부분 사람도 이에 동의한다. 하지만 바뀌질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일할 때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던 사람들보다 머릿수도 적고 말도 매끈하게 잘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 사정을 대신 떠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김형과 헤어지고 버스 안에서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남들하고 비교하면서 살지 말자고. 다음날 거제로 돌아와 엉망인 원룸을 깨끗이 청소했다. 작업복을 개키고 코인 빨래방에서 이불 건조를 했다. 유달리 아프고 우울했던 여름휴가가 끝났다. 현장으로 복귀할 시간이었다.천현우 | 창원시에서 여러 회사 전전하며 10년간 제조업 노동자로 일했다. 서울 성수동 미디어플랫폼 얼룩소(alookso) 등에서 2년 반 일하다 다시 경남으로 돌아왔다. 최근까지 거제 조선소에서 일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청년정책조정위원회 민간위원을 했다. 산문집 ‘쇳밥일지’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