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구글 선호 매체 등록천현우의 요즘 조선소 _14일러스트레이션 김재영 광고여름 조선소 분위기를 세 글자로 줄이면 ‘총력전’이다. 안 그래도 힘든 일인데 더운 날씨가 현장을 극한의 노동환경으로 만든다. 특히 햇볕이 그대로 내리쬐는 갑판 위에선 수시로 쌍시옷 글자 욕이 날아다닌다. ‘힘들어 죽겠다’는 뜻이다. 몸이 한계까지 내몰리는 상황에 오면 체면이고 배려가 이성의 영역임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그리고 무더위와 고된 노동은 비바람이나 태풍처럼 이성을 연착시킨다. 바닷바람이 무색하게 기온이 32도까지 올라간 지난해 7월 중순. 내 몸과 마음 상태가 최악이었던 날이다. 전날 열대야에 에어컨이 고장 나서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출근해서는 원청은 2주일 휴가인데 하청은 1주일만 간다는 소식, 상여금도 몇배나 더 많이 받는단 소식을 들었다. 무엇보다 오전에 현장 말로 ‘김’이라 이르는, 햇볕 가림용 차양 막을 설치하느라 분주하게 돌아다닌 터였다.광고 그 와중에 작은 소란이 터졌다. 발단은 같은 반 형님의 그라인더 작업 지시였다. 갈아야 할 부분이 6m 높이의 블록 천장부였기에 ‘고소차’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상황. 그리고 고소차를 타려면 조작·안전 교육을 받아야 했다. 아직 자격이 없으므로 안 타겠다고 거절했다. 괜찮다, 안 된다. 실랑이를 벌이다가, 형님이 크게 혼잣말로 욕을 하더니 자신이 차에 올랐다. 언성이 높아졌다가 사과를 생략하고 상황 인지와 역할 분담만 남는, 흔한 노가다 판의 실랑이 종료 상황. 분명 수십번을 보고 겪은 익숙한 경우였다. 언제나 그랬듯 숨 한번 크게 들이쉬고 할 일 하러 가면 될 일이었건만. 그만 하이바(안전모)를 땅에 집어 던졌다. 입에서 괴성이 튀어나왔다. 두통에 이마를 짚은 순간 그제야 이성이 도착했다. 퍼뜩 하이바를 수습한 뒤 사과했더니 형님은 “괜찮다. 여름 조선소는 다 그렇다” 하고 무덤덤하게 작업에 복귀했다. 단지 몸만 힘들고 위험한 게 아니라 모두가 한껏 예민해진 현장. 다들 휴가만 생각하며 꾸역꾸역 버티고 있었다. 물론 회사 쪽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정확히는 모르는 척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노동자들이 가만 안 있었기 때문이다. 현장 노동자들은 대체로 자기 권리 찾기에 꽤 둔감해서 굉장히 힘든 상황이 와서야 비로소 자기주장을 하곤 한다. 여름은 ‘그 굉장히 힘든 상황’에 속한다. 듣자 하니 원래 여름에도 똑같이 노동자를 부려 먹었지만, 노동조합이 이른바 ‘팔뚝질’을 하고 물량팀도 더럽다고 용접기 집어 던지고 집에 가버렸다나.광고광고 그래서 하나씩 바꿔 나간 결과, 조선소의 하절기는 나머지 삼절기와 몇가지 차이점이 생겼다. 우선 점심시간이 늘어난다. 현장 기온이 28도 이상이면 30분, 31.5도 이상이면 1시간을 더 쉰다. 이 때문에 몇몇 사람은 조선소에 익숙해지면 오히려 여름을 반기게 된다고도 하더라. 점심밥도 달라진다. 대기업 화이트칼라 식당처럼 호화 식단이 나오거나 하진 않지만 분명한 변화가 있다. 원래 하나만 집을 수 있는 돈가스가 무제한 배식으로 바뀌고, 밥 먹고 나오는 통로에 500㎖ 얼음 생수가 놓였다. 무엇보다 일주일에 한번 여름 특제 메뉴들이 나온다. 특히 급식소의 콩국수가 정말 맛있었다. 음식점에서 파는 것처럼 꾸덕하지 않고 물기가 꽤 있었는데 맛의 깊이감이 딱 적당했다. 소금을 쳐서 김장김치와 먹어도 맛있었고, 설탕 한 스푼 넣은 국물을 들이켜면 베지밀비 맛이 났다. 수십년 급식을 만들며 쌓아온 세월의 완성본 같았다. 현장 곳곳에는 조각 얼음이 가득 담긴 제빙기가 가동되고 노동조합원들 또한 수시로 현장에 나타나 화채며 아이스크림을 나눠주었다. 쉬엄쉬엄하라는 덕담도 잊지 않았다. 이런 환경이 만들어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투쟁과 양보, 타협이 있었을까. 지난해 휴가 직전 주의 월요일이었던 7월28일. 전주 금요일에 처음으로 나간 신문 칼럼이 반 전체에 퍼져 있었다. 내가 글 쓰는 사람임을 몰랐던 형님들이 너스레를 떨었다. “천 작가, 이 바닥 굴러가는 꼬라지 좀 잘 써봐라.” 고마웠던 동시에 걱정이 앞섰다. 최대한 톤 조절이야 하겠지만 거짓말을 쓸 순 없었다. 불편한 이야기가 올라갔을 때 회사에서 가만히 있을까. 내가 그 압박을 견딜 수 있을까.광고 불안함으로 시작한 월요일을 지나 마침내 8월2일 토요일 여름휴가 첫날.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정형외과였다. 조선소에 온 뒤 그럭저럭 괜찮았던 팔꿈치 염증이 재발했다. 특히 용접기 전선과 에어 호스를 당기고 감을 때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이미 팔꿈치에 치료비만 천만원을 써본 나는 초음파 사진을 본 순간 낙담의 한숨을 흘렸다. 오른쪽 팔꿈치 근육에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염증이 꽤 커진 상태. 팔꿈치 근육은 잘 낫지 않고 심심하면 재발하는 고얀 녀석이었다. 팔꿈치에 충격파 치료기를 갖다 대니 혼절할 정도로 아팠다. 너무 아파서 포기하고 주사 치료로 바꿨다. 의사 선생님은 주사를 놓으며 무슨 일 하느냐 물었다. 조선소 탑재 일 한다고 대답했더니 “백날 주사 꽂고 물리치료 해봐야 소용없고, 쉬어야 낫는데 탑재하는 사람더러 할 소린가 싶고”라며, 20년 일한 탑재 노동자들이 산재 신청하면 몸이 성한 곳이 없어서 무조건 받아들여진다는 말도 덧붙였다. 내가 존경하는 교수님에게 들었던 말과 일치했다. 아무래도 이 일은 오래 못 하겠구나. 무덤덤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병원에서 나와 한달에 한번 굴러가면 호상인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휴가 떡값 30만원. 얼마 안 되는 이 금액을 지역에서 다 써보자. 거제 한 바퀴를 다 돌아보기로 했다. 혹시나 이 지역에 정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은 금방 사그라졌다. 거제도는 내 상상보다 훨씬 넓었지만 마음 가는 장소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아름다운 해변을 지나는 동안에도 아무 감흥이 없었다. 가는 곳마다 대체로 고즈넉한 풍경이 펼쳐졌다. 잠깐 걷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노트북 켜고 원고 작업을 하다가, 막히면 바로 접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길 반복하는 동안 깨달았다. 지금 나는 아프고 외로운 상태라는 것. 여행은 즐겁지 않았고 이틀 만에 만사 귀찮아져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밀린 청소와 빨래를 하는 동안 집밥이 그리워졌다. 새벽 일찍 일어나 옥포동에서 고향 마산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천현우 | 창원시에서 여러 회사 전전하며 10년간 제조업 노동자로 일했다. 서울 성수동 미디어플랫폼 얼룩소(alookso) 등에서 2년 반 일하다 다시 경남으로 돌아왔다. 최근까지 거제 조선소에서 일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청년정책조정위원회 민간위원을 했다. 산문집 ‘쇳밥일지’를 썼다.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