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일본 규슈 야쓰시로시에서 전날 구마모토 지방을 강타한 규모 7.1 강진에 무너진 일본 제지 공장 굴뚝 잔해가 보이고 있다. 야쓰시로/로이터 연합뉴스 광고 일본 규슈 지방의 구마모토현에서 규모 7.1의 지진이 일어난 것은 지난달 28일 오후 4시27분의 일이다. 2016년 구마모토 지진 단층대에서 깨지지 않고 남아 있던 구간이 10년 만에 움직였다. 사흘간 여진이 200차례 이어졌고 1만명이 피난소에서 폭염을 견디고 있다. 지진 발생 당시 부산 등 한국의 동남권에서도 흔들림 신고가 300건 가까이 접수될 만큼 진동이 전해졌고, 국내 지상파 저녁 뉴스들은 일본 반도체 산업의 핵심 지역으로 꼽히는 이른바 ‘실리콘 아일랜드’의 안부를 주요 소식으로 다뤘다. 현지는 35도를 넘는 폭염 속에 정전과 단수가 겹쳤고, 최대 14만 가구가 물 없이 여름밤을 견뎌야 했다. 지난 2일 기준 구마모토 지진의 사망자는 38명으로 집계됐다. 기업 현장에서 인명사고가 컸다. 닛폰제지 야쓰시로 공장의 굴뚝과 대형 쇼핑몰 ‘이온몰’ 붕괴로 이들 두 곳에서만 1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구마모토의 신생 첨단 산업으로 대표되는 티에스엠시(TSMC) 반도체 팹(생산라인)에서는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 티에스엠시는 대만의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기업이다. 앞서 2021년 일본 정부는 대규모 보조금을 지원해 이 기업 공장을 구마모토현에 유치한 바 있다. 지진 발생 20시간 뒤 티에스엠시는 직원 피해가 없고, 건물 구조에도 이상이 없다는 짤막한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시장에는 구마모토 공장이 티에스엠시 전체 생산능력의 3% 미만이라는 분석이 돌았고, 주가 낙폭은 제한됐다. 쌀 소주로 유명한 구마모토를 ‘산업의 쌀’ 반도체로 인도한 이 기업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향후 10년간 11조2천억 엔의 경제효과로 추산되는 구마모토의 미래 그 자체다.광고 반도체 공장 설비는 지켰지만, 문제는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공급망에 병목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반도체용 고압가스와 화학물질을 취급할 수 있는 미나미규슈(규슈 남부) 유일의 항만인 야쓰시로항은 지반 액상화와 침하로 마비됐다. 규슈 신칸센은 200곳 넘게 손상돼 전 구간이 기약 없이 멈춰 섰다. 자동차부품사 아이신 규슈의 설비가 어긋나자 도요타의 후쿠오카 3개 공장이 가동을 중단했고, 부품 공급이 끊긴 아이치현 다하라 공장까지 가동 중단이 이어졌다. 지진에 따른 규슈발 교란이 혼슈의 심장부로 역류한 것이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일본 반도체 기업인 르네사스 공장의 가동 중단이 전 세계 완성차 감산으로 이어졌던 것과 같은 공급망 위험이다. 규슈는 두 번에 걸친 산업적 도약을 경험했다. 중화학공업의 기수였던 철강도시 기타큐슈가 1963년 규슈 최초의 정령지정도시(한국의 광역시처럼 특별한 지위를 가진 도시)로 출범해 1979년 인구 107만명을 찍은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전통 중화학공업의 약화로 장기간 서서히 줄어들던 인구는, 최근 일본제철 야하타 제철소의 전기로 전환 등 핵심 철강 생산 인프라 축소가 겹치면서 감소세에 속도가 붙었다. 약 1150명이 일자리를 잃거나 옮겨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지난 4월 기준 인구는 89만8668명으로 정령지정도시 출범 이후 처음으로 90만선이 무너졌다. 연구개발이나 엔지니어링 등 제조업의 상류 기능은 한국처럼 도쿄 등 대도시권으로 이동했다. 시내에 대학이 10곳이나 있지만, 정작 졸업생들이 구할 수 있는 일자리가 부족해 젊은 층이 도시를 떠나고 있다. 이런 틈새를 딛고 두 번째로 산업적 도약을 끌어낸 곳이 이 규슈 남부의 구마모토다. 일본 정부가 보조금 1조2천억엔 지원을 약속해 티에스엠시를 유치하면서 첨단산업으로 미래를 만들어가던 중이었다. 세계적 반도체 기업이 진출하면서 대규모 공장 건설과 관련 협력사, 인력이 몰려들자 지역 경제는 즉각 요동쳤다. 이 지역에 인접한 오즈마치와 기쿠요마치의 지가 상승률은 일본 전국 1, 2위(33.1%, 30.8%)를 기록했다. 티에스엠시와 일본 소니 등이 참여한 합작법인 제이에이에스엠(JASM)은 올해 1분기(1~3월)에 양산 개시 1년여 만의 첫 분기 흑자를 냈고, 2월에는 제2공장의 3나노 공정 도입이 발표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구마모토는 7월28일 지진으로 시험대에 올랐다.광고광고 2016년 대지진 때 세계 이미지센서 점유율의 40% 이상을 차지하던 소니의 구마모토 공장은 완전 정상화까지 석 달 넘게 걸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발생 일주일 만인 4일 재가동에 들어가 8월 중순 지진 전 수준을 회복할 전망이다. 르네사스는 2016년 35일 걸렸던 복구를 이번에는 3주 안에 마칠 계획이고, 도포·현상 장비의 세계 점유율 90%를 사실상 이곳 한 곳에서 감당하는 도쿄일렉트론 규슈는 열흘 걸리던 재가동을 엿새로 줄였다. 소니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조기 복구 이유로 10년에 걸친 내진 보강, 그리고 협력사들과 함께해온 재해 대응 훈련을 들었다. 르네사스의 2016년 35일 복구도 협력사 90곳과 도요타·덴소의 지원 체계가 만든 기록이었다. 이 관계망은 50년 넘는 협력이 누적된 결과다. 2022년 티에스엠시 착공 이후 4년 만에 생긴 변화가 아니다. 규슈에는 1970년대부터 쌓인 산업 생태계 집적의 역사가 있고, 지금도 관련 사업장 700여 곳이 협업 속에서 돌아간다. 여기에 2016년의 재난 경험이 겹쳤다. 지진이 거버넌스를 훈련시켰고, ‘창조적 부흥’을 내건 거버넌스가 티에스엠시 유치의 기반이 됐다. 티에스엠시 애리조나 공장은 2020년 5월 발표 이후 노조 갈등과 인력 확보 문제로 가동 일정이 늦어졌고, 계획 발표 4년 반 만인 2024년 말에야 양산에 들어갔다.광고 반면 구마모토 공장은 2021년 11월 공장 건설 발표에서 2024년 12월 양산까지 걸린 시간은 3년이었다. 같은 기업, 같은 기술, 비슷한 공장 착공 발표 시기 등을 고려하면, 두 지역의 차이는 지역 생태계와 민관의 조정 역량으로 압축된다. 구마모토 역시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제이에이에스엠의 대졸 초임 29만엔은 지역 기업 평균보다 40% 높아, 임금 인상을 따라가지 못한 100인 미만 중소기업에서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티에스엠시 회장은 이 지역 교통 혼잡을 이유로 2공장 착공 연기를 공개 거론했고, 구마모토현 지사는 반박했다. 구마모토는 늘어난 이동 수요에 공항 액세스 철도와 반액 버스 패스 도입으로 대응했다. 지하수 오염 우려가 제기되자, 사용한 물의 3배를 지하수로 다시 채우는(함양) 방안을 마련했다. 갈등이 없었던 게 아니라, 갈등을 처리하는 프로세스를 잘 구축해 나간 것이다. 구마모토를 보면서 호남의 반도체 클러스터를 고민하게 된다. 호남이 봉착할 스트레스는 지진이 아닐 것이다. 지역이 마주하는 위험은 저마다 다른 얼굴로 찾아온다. 구마모토의 취약점이 단층에 있다면, 호남이 넘어야 할 벽은 가뭄과 전력 계통 문제다. 정부가 6월30일 내놓은 반도체 산단 용수 공급 방안은 동복댐 30만톤, 주암댐 5만톤, 장흥·보성강·나주댐 각 10만톤으로 하루 총 65만톤 규모다. 그런데 이 수치는 2022~2023년 광주·전남 가뭄 때 세웠던 비상대책과 겹친다. 당시 동복댐 저수율은 19.1%로 14년 만의 최저, 주암댐은 20.3%로 역대 최저치를 찍었고 광주는 제한급수 직전까지 갔다. 평시의 팹 용수와 가뭄의 비상용수가 같은 물이다. 가뭄이라는 재난 앞에 산업용수와 생활용수를 둘러싼 갈등이 빚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는 셈이다. 전기는 반대다. 호남은 재생에너지가 남아돌지만, 이를 활용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전력망이 포화되면서 2023년 9월부터 신규 전력 연결이 사실상 막혔고, 지난해 7월에야 2.3기가와트 규모의 접속이 조건부로 허용됐다. 지역에서 생산한 전기를 지역 산업이 바로 활용할 수 있는 연결망이 없다 보니, 한쪽에서는 전기가 남고 다른 한쪽에서는 팹 가동에 필요한 전력이 부족한 모순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관건은 전력량이 아니라, 필요한 곳에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기반이다. 반도체 미세 공정은 순간적인 전력 변화에도 민감하다. 2018년 평택에서는 30분간 정전으로 낸드 웨이퍼 5만~6만장이 손상됐다. 재생에너지의 불안정성을 보완하고 안정적인 전력 공급 체계를 마련하는 방안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한전, 산업계가 함께 풀어야 하는 이유다. 호남에 반도체 공장이 유치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호남은 중화학공업화와 경부축 개발에서 비켜나 있어 영남과 달리 지역산업정책의 ‘축적의 시간’이 짧다. 계획대로 메모리 팹 4기가 완공된다면, 협력사들은 원청과 함께 내려올 것이다. 그런데 원청을 따라온 협력사가 기존 기흥·평택이나 이천·청주의 방식 그대로 광주에 뿌리내릴 수 없다. 인프라와 지역 내 산업 집적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광주는 지역에서 효과적으로 운용되는 반도체 생태계 협치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구마모토의 사례도 지역 기업만으로 반도체 생태계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반도체 사업 진출을 발표한 84개 기업 가운데 절반 이상이 간토·주부 등 다른 지역이나 해외 기업이었고, 팹이 들어선 오즈마치와 기쿠요마치 역시 역외 기업 사업소 비중이 20~25%에 이른다. 반도체 산업이 모인 지역일수록 외부 기업의 유입이 활발했다는 의미다.광고 지역 협력사 육성보다 어려운 것이 거버넌스 구축이다. 광주는 광주형 일자리 모델로 설립된 광주글로벌모터스(GGM)의 협약이 흔들리는 과정을 이미 겪었다. 반도체 공장 유치 이후 쏟아질 용수 협상, 전력망 재편, 주민 수용성의 마찰을 특별법과 패스트 트랙으로 건너뛰고 싶은 유혹이 클 것이다. 반도체특별법 통과 때 빠졌던 주 52시간 예외를 ‘메가특구법’으로 되살리려는 시도가 규제 완화의 이름으로 이미 진행되고 있다. 삼성전자 노동조합은 이에 반기를 들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마찰을 패스트 트랙으로 건너뛰는 게 아니다. 갈등을 조정하고 풀어내는 경험이 쌓일 때, 지역은 앞으로 닥칠 불확실성에도 흔들리지 않는 힘을 갖게 된다. 5극3특(5개 초광역권, 3개 특별자치도)과 서남권(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등 3대 메가 프로젝트가 어려운 이유는 이미 알려진 물-전기-인재-부지의 조달이란 변수 때문이 아니다. 지역마다 형태가 다른 스트레스에 대한 대비, 그리고 안팎으로 신뢰받는 거버넌스를 구성해 가는 과정이 지난하다는 말이다. 일본은 2016년에서 2026년까지 10년을 들여 그 과정을 훈련하며 대응 체계를 다듬어왔다. 그 경험은 지진이라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복구 시간을 석 달에서 3주로 줄이는 힘이 됐다. 다만 일본의 협력적 거버넌스는 재난이 강제한 것이었다. 호남은 재난 없이, 첫 팹이 조성되기에 앞서, 스스로 그 훈련을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10년보다 짧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