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일 진실화해위 홍보전문위원이 21일 오후 한겨레와 인터뷰를 마친 뒤 진실화해위가 입주한 서울 중구 남산스퀘어빌딩 뒤편 골목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고경태 기자 광고‘안녕’은 환영과 작별의 인사다. 지난 2월26일 출범한 3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또는 진화위)가 7월3일 첫 전원위원회를 연데 이어 21일엔 조사개시 기자회견을 했다. 미뤄져 온 조사3국 조사관 채용도 마무리 단계다. ‘안녕 진화위’는 지난해 11월 문을 닫은 2기를 돌아보고 3기를 바라보며 과거사 규명에 참여한 이들의 의지와 기대를 담아내는 부정기 연재물이다. 굿바이 진화위! 헬로 진화위!! 충격과 혼란, 그리고 완수해야 할 사명. 인터뷰 시작과 함께 기수별 진실화해위에 관해 한마디씩 표현해달라고 하자 돌아온 열쇳말이다. 그에게 1기 진실화해위는 ‘크나큰 충격’이었고, 2기는 ‘충격과 혼란’이었다고 했다. 이어 3기는 ‘완수해야 할 사명’이라고 했다. 1기와 2기를 모두 겪고 이제 3기를 막 시작한 최고참 직원이기에 자연스레 가장 먼저 던진 질문과 답이었다. 박영일(61) 진실화해위 대외협력담당관실 산하 언론홍보팀 전문위원(5급)을 ‘안녕 진화위’의 마지막 인터뷰이로 만났다. 1기에서 홍보팀장으로 4년10개월(2006.3~2010.12), 2기에서 홍보전문위원으로 3년8개월(2022.4~2025.11) 일했던 그는 27일 서울 중구 퇴계로 진실화해위로 처음 출근하며 3기에서 새 출발을 했다. 전문임기제공무원 채용시험에 합격해 2기 때와 동일한 직급과 직책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전문임기제공무원은 법정 정년과 관계없이 채용하는 일종의 특수분야 계약직이다. 그만큼 1·2기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은 셈이다. 광고 1·2기에서 그의 주업무는 보도자료 배포와 언론 대응이었다. 출입기자들의 접촉 창구였다. 2기 진실화해위가 특정 위원장 재임 기간 ‘정체성 변질’ 논란을 겪으며 자주 언론 비판의 표적이 된 가운데, 기자들과 홍보팀의 관계가 원활했던 데에는 그의 공이 컸다는 평가가 있다. 어떤 문의를 하든 늘 사려 깊고 솔직한 태도로 사안을 정확하고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는 게 2기 진실화해위를 담당한 다수 기자의 설명이다. 한 기자는 “진화위 보도자료에 담긴 과거 사건의 맥락을 이해 못 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박 위원님께 연락하면 거의 해결됐다”고 말했다. 충남 금산 출신인 그는 삶의 다양한 경로를 거쳤다.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3학년 때인 1986년 10월 ‘건국대 시위’(건대 사건)에 참여했다가 감옥을 다녀왔다. 당시 보도사진에서 그는 얼굴을 가린 채 본관 옥상 맨 앞에 서 있다. 이는 연고도 없는 부산에서 뼈를 묻을 각오로 노동운동에 투신하는 계기가 된다. 8년 만에 돌아와 대학 졸업을 한 뒤에는 7년간 기자생활을 포함해 여러 일을 했다. 말이 기자지 월급을 떼이거나 제때 받지 못해 ‘반백수’였다고 한다. 마지막에 근무한 ‘데일리 서프라이즈’에서 국회를 출입하며 ‘과거사정리 특별법’(진실화해위 기본법)이 제정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진실화해위와 인연을 맺었다. 1기 근무 종료와 2기 입사 사이 10년 동안(2011~2021년)엔 대통령 소속 자치분권위원회(전 지방행정체제개편추진위 및 지방자치발전위)에서 소통협력팀장으로 일했다.광고광고 그 역시 건대 사건으로 형을 살았기에 국가폭력의 구조와 피해자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지난해 5월엔 ‘1986년 10·28 건국대 시위 관련 불법구금 인권침해 사건’ 진실규명 대상자 중 한 명으로 피해를 인정받았다. 이후 법원에 재심을 청구해 최초로 재심 개시 결정도 받았다. 그는 진실규명 신청을 준비하는 이들을 향해 “감옥에서 오래 살지 않고 단 3~4일이라도 공권력에 의해 불법 구금을 당했다면 진화위에 신청하라. 가벼운 불법행위도 용인될 수 없다는 경각심을 국가가 갖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터뷰를 처음 제안한 것은 2기 진실화해위가 문을 닫은 직후인 지난해 12월이었다. “홍보 담당은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한다”,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만 홍보팀이 등장해야 한다”며 한사코 거절하던 그는 3기 출근일이 정해진 뒤 거듭 요청하자 못 이기는 척 마지못해 응했다. 그가 언급한 ‘충격과 혼란’은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3기에서는 어떤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고 보는 걸까. 더불어 그의 인생 이야기도 물어볼 게 많았다. 3기 진실화해위 조사개시 기자회견이 열린 21일 오후 진실화해위 뒷골목에 있는 카페에서 박 위원과 마주 앉았다.광고박영일 진실화해위 홍보전문위원이 21일 오후 한겨레와 인터뷰를 마친 뒤 진실화해위가 입주한 서울 중구 남산스퀘어빌딩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고경태 기자 ― 1기와 2기를 충격과 혼란이라는 열쇳말로 정리하셨는데요. “1기 진화위(2005~2010년)는 정말 크나큰 충격이었죠. 한국전쟁 발발 직전 탄생한 국민보도연맹이 뭔지 자세히 모르고 있었어요. 무엇보다 그렇게 많이 희생돼신 줄 몰랐죠. 1기에서 진행한 한국전쟁기 유해발굴 현장을 다니면서도 충격이었어요. 대전 골령골, 공주 상왕동, 산청 외공리, 경산 코발트광산 등등. 특히 코발트광산은 규모가 너무 압도적이었어요. 현장 설명회 때 기자들 데리고 들어갔는데, 머리뼈 하나가 눈을 바닥에 댄 채 뒤집어있더라고요. 너무 안타까워 손으로 집어 반듯하게 세워놓은 기억이 나요. 여성분이었는지 머리뼈 크기가 작았어요. 그때의 그 감촉을 잊을 수 없어요. 2기 진화위(2020~2025년)는 충격에 더해 혼란이었어요. 1기에 한국전쟁기 집단희생이 부각됐다면, 2기에서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권침해 회복의 인식을 넓혔다고 봅니다. 형제복지원, 선감학원, 서산개척단, 영화숙·재생원, 덕성원, 서울시립아동보호소, 그리고 해외입양에 대해 진실규명을 했죠. 예전에는 해외입양이 다 좋은 건 줄 알았는데 그 이면을 보고 큰 충격을 받게 된 거죠. 한편으로는 한국전쟁기 희생자 유족이나 피해자가 위원장에게 항의하고 농성하고 경찰에 연행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많이 발생했어요. 위원회의 과도한 당파성도 2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나 싶어요. 홍보는 기관 입장을 잘 전달해야 하는 역할인데, 개인적으로 곤혹스러울 때가 적지 않았습니다.” ― 3기 진화위는 ‘완수해야 할 사명’이라고 하셨는데요.광고 “3기 진화위에서는 유족이나 피해자분들께 ‘정말 잘했다’, ‘수고했다’는 한마디를 듣는 게 목표라면 목표입니다. 3기는 온전한 과거사정리를 위한 마지막 기회잖아요. 앞으로 어떤 성과를 낼지 모르겠지만, 마무리 잘 하면 세계사적으로 과거사 정리에 대한 새로운 모델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3기에 지원할 때 나이 때문에 부담이 있었지만, 미흡하나마 마지막 기여를 하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기회를 얻게 되어 고맙고 책임감과 사명감을 느낍니다. 3기는 합의 정신을 잘 살려 국가폭력 희생자들의 억울함을 제대로 풀어주는 기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기가 끝나더라도 진실규명 받은 피해자들이 별도로 법원에 가서 손해배상을 안 해도 배·보상을 받을 수 있는 배·보상법이 제정되고, 과거사 관련 연구·교육 활동과 추모사업을 이어나갈 수 있는 과거사 재단도 꼭 생겼으면 합니다. 이런 것까지 3기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에게 3기는 ‘완수해야 할 사명’입니다.”2023년 12월6일 진실화해위 출범 3주년 기념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김광동 위원장 뒤로 박영일 전문위원의 모습이 잡혔다. 김정효 선임기자 hyopd@hani.co.kr ― 맨 처음 1기 진실화해위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기자 생활 중 2년을 인터넷 정치 전문 매체인 ‘데일리 서프라이즈’에서 국회 출입을 하면서 보냈어요. 그러다가 과거사정리법 제정 과정을 취재하면서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동시에 전세 살던 빌라가 경매에 넘어가는 일이 벌어졌어요. 1997년 서울의 한 지역신문에서 처음 기자 생활을 시작했는데, 아이엠에프(IMF) 사태가 터지면서 월급을 못 받고 그만둔 뒤 보험영업을 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거든요. 다단계회사에 잘못 들어가 급여도 못 받으면서 오히려 회사경영에 보태라고 카드를 긁었다가 큰 빚까지 졌고요. 그래서 와이프가 당시 검사이던 오빠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는데 장인어른 중풍에 집안이 힘들어지면서 검사직을 그만두게 됩니다. 2006년 당시 검사가 아버지 간병하러 사표를 낸다는 게 언론에도 보도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데일리 서프라이즈’에서 급여가 밀리기 시작했고 더 이상 처가에 신세를 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진화위에 응시하게 된 거죠.” ― 쭉 홍보팀에서 일하셨는데요. 진실화해위 홍보의 특수성이 뭘까요? “과거사 정리라고 하면 사람들은 선입관을 갖는 거 같아요. 과거가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피해자는 아직도 존재하고 있고, 많이 알려야 하는데 사람들이 잘 몰라요. 지금은 ‘진실화해위원회’라고 하면 알아듣는 편이지만, 1기에서는 꽃집이라고 착각들을 하곤 했어요. 진실화해위를 ‘진실화훼위’로 알아들은 거죠.(웃음) 그래서 다시 ‘과거사정리위원회’라고 설명을 해야 했어요. 2기에서는 그런 부분은 좀 개선됐는데, 여전히 어려운 점이 있어요. 좀 더 알려야 하는데 사건마다 장황하기도 하고, 워낙 사건이 쏟아지다 보니 쉽지 않아요. 피해자의 절절한 사연들이 좀 더 매체를 통해 보도돼야 그분들 명예도 회복되고 굴레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텐데, 보도자료도 너무 약식으로 나갈 때가 많아 아쉬움이 있습니다.” ― 젊은 기자들도 많이 만날 텐데요. “진실화해위 출입하는 대부분의 기자는 대학 졸업한 지 얼마 안 됐죠. 민주화운동 세대와 차이가 크잖아요. 보도자료의 맥락을 이해하기 어려울 경우도 있을 거예요. 처음 발령돼서 오는 기자들은 진실규명과 불능의 개념도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기 어려워해요. 처음부터 차분히 알려드리는 수밖에 없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보도하려 하고, 특정 사안에 대해서는 시리즈로 기획보도까지 해주는 기자들이 있어 고맙습니다. 사실 진화위 기사는 사건별로 세세히 살펴보면 쓸 게 많고, 관계된 인물들 인터뷰할 거리도 풍성합니다. 깊이 있게 다루면 기자들 실력 쌓는 데도 도움이 될 겁니다. 피해자들에게 큰 관심을 갖고 기사를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1986년 10월 건국대에서 열린 애학투련 결성식에 참여했다가 학교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갇힌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본관 옥상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종이로 붙인 구호의 ’탄’자 위에 박영일 전문위원의 모습이 보인다. 10·28건대항쟁계승사업회 제공 1986년 10월 건국대에서 열린 애학투련 결성식에 참여했다가 학교를 빠져나가지 못한 채 본관 옥상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박영일 전문위원의 모습. 10·28건대항쟁계승사업회 제공 ― 1986년 건대 사건 피해자로서 진실화해위 진실규명도 받았어요. “대학 때 ‘민속문화연구회’라는 탈춤반에서 활동하며 학생운동을 시작했어요. 1986년 10월28일엔 건국대에서 연합시위(애학투련 결성식)를 한대서 그 시위에 참여한다는 생각만 갖고 간 거였죠. 그런데 뜻하지 않게 강요된 장기 농성을 하게 됐어요. 전두환이 학생운동을 도려내려고 작정을 한 거잖아요. 저희가 함정에 빠졌죠. 저는 본관에서 농성했는데 추위와 배고픔 때문에 많이들 고생했어요. 다들 밤샐 생각은 꿈에도 못하고 얇은 옷을 입고 왔는데 가을 서리가 내려 엄청 추웠어요. 먹을 것도 없어 쫄쫄 굶었고요. 7명이 나눠 먹으라며 초코파이 하나가 내려온 게 기억나요. 도저히 손이 안 가 못 먹겠다고 했어요. 현수막을 찢어 얼굴을 가렸는데, 그게 신문에 사진으로 나왔어요. 3학년이라 정문 전조(진입 막는 선봉대) 책임자를 맡았는데, 사진에는 주동자처럼 나와 당황했죠. 진압 당일날 백골단이 옥상에서 연행해가며 긴 막대기로 어깨와 등을 많이 때렸고, 발길질했어요. 밑에서는 물대포 쏘고, 헬기에서 최루액을 뿌렸어요. 옥상 중간에서는 공포에 질린 여학생 수십명이 앞사람 등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고 있었습니다.”박영일 진실화해위 홍보전문위원이 21일 오후 한겨레와 인터뷰를 마친 뒤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 뒤편 골목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고경태 기자 진실화해위는 지난해 5월 ‘1986년 10・28 건국대 시위 관련 불법구금 인권침해 사건’ 진실규명(대상자 396명)을 통해 당시 대통령 전두환과 안기부장 장세동의 개입(사법처리방침 지시와 사형선고 고려)에 대해 처음으로 밝혀내고 “1525명의 대학생이 영장 없이 연행돼 불법구금 상태에서 수사받는 등(1285명 구속) 적법절차를 위배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하지만 가혹행위 등 다른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시간상의 제약 등으로 밝혀내지 못해 제3기 진실화해위로 넘어온 상태다. 이 사건으로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복역기간은 7개월)을 선고받았던 박 위원은 진실화해위 진실규명 뒤 법원에 재심을 청구해 올해 3월 재심 개시 결정을 받았다. 서울고법 제2-3형사부(재판장 김영현)는 “피고인(원고)은 불법체포·불법감금 상태에서 수사를 받았고 그 과정에서 구타·고문 등 폭행·가혹행위가 이뤄졌다고 봄이 상당하다”며 “형사소송법 제435조 1항에 의해 재심을 개시한다”고 했다. 이에 서울고검은 재심 개시 판결 3일 뒤 재판부에 의견서를 내 “형사소송법 등 관련 법령에 따라 적절히 판단함이 상당하다”고 짧게 밝혔다. 적극적으로 유죄 주장을 하지 않은 채 재판부가 알아서 하라는 거였다. 박영일 위원은 재심 청구 때 재판부에 낸 진술서에서 당시 경찰서 유치장과 구치소에서 당한 가혹행위에 대해 상세히 적었다. 그는 “(끝내 자신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자) 수사관은 조사 기간 내내 잠 안 재우기를 통해 새벽에 부르기를 반복했고 머리를 때리며 사실대로 말할 것을 강요했다”고 했다. 또한 서대문구치소에서는 “저녁 식사 후 윗몸일으키기를 한다는 이유로 대강당에서 수갑이 채워지고 무릎이 꿇린 상태에서 교도관 여러 명에게 발로 차이고 허벅지를 밟히는 구타를 당했고, 이어 1주일간 독방으로 끌려가 한겨울에 이불도 주지 않는 형벌을 받았다”고 했다.1986년 10월 건국대에서 열린 애학투련 결성식에 참여했다가 학교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갇힌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본관 옥상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박영일 전문위원. 10·28건대항쟁계승사업회 제공 ― 재심 신청은 어떻게 하시게 된 건가요? “지난해 2기 진화위 활동 종료 앞두고 우연히 어느 변호사분과 술자리를 갖다가 이야기가 나왔는데, 바로 재심신청을 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신속하게 재심 개시 결정이 나올 줄은 몰랐어요. 현재 심리 진행을 기다리고 있는데 사법부가 무죄 선고로 정의로운 판결을 해주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 이 사건으로 인생이 많이 바뀌었겠네요. “건대 사건으로 구속돼 7개월 정도 형을 살다가 집행유예를 받고 나왔어요. 그리고 노동 현장에 들어가 뼈를 묻고 살겠다고 결심했어요. 변혁운동의 주체인 노동자와 함께 살겠다는 각오였지요. 선배와 친구들이 많이 내려간 부산으로 갔지요. 1988년 4월에 선박 부품 만드는 OO공업주식회사에 들어가 밀링, 드릴, 선반 등 여러 일을 배웠어요. 첫 월급을 16만원으로 기억해요. 대학생 신분을 숨기고 위장 취업한 건데, 그렇게 여러 공장을 다녔어요. 노조를 만들었다가 일주일 만에 해산당하기도 했고요. 나중에는 부산 신평장림공단 ‘노동자의 집’이라는 노동단체에서 상근 활동가로 일했어요. 그곳에서 등산반·풍물반·독서사랑반 등 활동을 했죠. 일종의 의식화 활동인 셈인데,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 민주노조 진영의 힘이 세지고 노동단체협의회 등을 통해 노동단체를 지원하게 되니까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었어요. 지쳐가기도 했고요. 그때 신문 배달도 했는데 동아대에 신문 넣으러 갔다가 학생들이 강의받는 걸 보면서 ‘아, 나도 복학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1995년에 올라왔습니다. 부산까지 따라내려 왔던 여자 후배는 지금의 와이프가 됐고요.”박영일 전문위원이 부산 신평장림공단 노동자의 집에서 상근활동가로 일하던 1991년 한 모임에서 발언하는 모습. 본인 제공 ― 처음에는 뼈를 묻을 각오로 부산에 갔을 텐데요. “네. 그래서 서울 와서 사람들을 못 보겠더라고요. 건대 시위에 함께 참여했던 친구 집에 가서 ‘복학해야겠다’고 했더니 선뜻 ‘그래’ 하면서 동의를 해줘서 고마웠어요. 복학 절차를 밟는데 후배들 얼굴을 못 보겠더라고요. 신념을 못 지킨 미안함 같은 게 있었죠. 3학년으로 복학하기 위한 절차를 밟기 위해 학적과에 갔는데 ‘제적’이라는 글자가 연필로 쓰여 있어서 놀랐어요. 화이트로 지우는 것도 아니고 지우개로 쓱싹 지우더라고요. 문민정부 들어선 뒤 애초 제적자들에게 복학의 길을 열어놓았던 것 같아요.”박영일 전문위원(가운데)이 부산 신평장림공단 노동자의 집에서 상근활동가로 일하던 1990년 11월, 부산 금정산 정상에서 열린 부산지역 노동자대회에 참석해 노래에 맞춰 율동을 하는 모습. 본인 제공 ―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 “송상교 진실화해위원장님이 강조하는 온전한 과거사 정리를 위해 모두 힘을 모아야 합니다. 국가폭력 피해, 특히 실형을 받으신 분은 꼭 신청해서 진실규명을 통해 무죄판결을 남겨야 역사 기록이 제대로 됩니다. 짧은 기간 갇혔던 분들도 부담 없이 진실규명 신청하시기를 당부드리고 싶어요. 그것도 따져보면 불법연행과 불법구금인 경우가 많거든요. 영장 없이 48시간 갇혀 있었으면 불법구금입니다. ‘3~4일 산 거 별거 아닌데 굳이 30, 40년 지나 왜 꼭 이런 걸 해야 하나’라고 여기실 필요 없습니다. 진화위에 신청해서 명예회복 하시길 권해드립니다. 2기 진화위에서 구류 3일도 불법구금으로 진실규명(2024년 6월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진실규명 결정)한 적 있습니다. 가벼운 불법행위도 용인될 수 없다는 경각심을 국가가 갖게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피해자들의 숙원인 배·보상특별법 제정과 재단 설립을 꼭 이루어내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말씀을 한 번 더 드립니다.” <끝>
‘건대 사건’ 피해자인 3기 최고참에게 마지막 사명이란? [안녕 진화위㉞]
‘안녕’은 환영과 작별의 인사다. 지난 2월26일 출범한 3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또는 진화위)가 7월3일 첫 전원위원회를 연데 이어 21일엔 조사개시 기자회견을 했다. 미뤄져 온 조사3국 조사관 채용도 마무리 단계다. ‘안녕 진화위’는 지난해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