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귀옥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이 3일 오후 서울 중구 퇴계로 남산스퀘어빌딩에 있는 진실화해위 6층 상임위원실에서 한겨레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광고‘안녕’은 환영과 작별의 인사다. 3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또는 진화위)가 7월3일 13인의 전 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첫 전원위원회를 열었다. 2월26일 출범한 지 넉 달 만이다. 2기 활동 종료 뒤로는 7개월여 만이다. 조사관 채용도 마무리 단계다. ‘안녕 진화위’는 2기를 돌아보고 3기를 바라보며 과거사 규명에 참여한 이들의 의지와 기대를 담아내는 부정기 연재물이다. 굿바이 진화위! 헬로 진화위!! “Justice delayed is justice denied.” 한국에서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는 말로 잘 알려진 라틴어 법 격언의 영어 문장이 상임위원실 그의 책상 옆에 3가지 활자체로 붙어있었다. 과거사 조사기구의 존재 목적을 환기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왜 3장이나 붙였을까. “이번 진화위가 3기 아니냐”는 농담 섞인 답이 돌아왔다. “아침마다 3번씩 각오를 다지는 거냐”고 다시 물으니 말없이 웃기만 했다. 김귀옥(64)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차관급)을 3일 오후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 6층 상임위원실에서 만났다. 4월16일 이재명 대통령 지명을 받아 임명된 지 78일 만이었다. 임명 직후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그는 다른 상임위원들과 소위원회 배정 합의가 끝난 뒤로 일정을 미뤘다. 4월23일 국회 선출안이 통과된 여야 추천 2명의 상임위원 임명이 늦어지며 인터뷰도 계속 지연됐다.광고 마침내 6월24일 상임위원 2명과 비상임위원 8명(국회의장 및 비교섭단체 추천 포함)에 대한 대통령 임명이 완료됐다. 인터뷰가 진행된 날 오전엔 위원 13명 전원이 참석한 3기 첫 전원위원회가 열려 소위 배정을 매듭지었다. 김 상임위원은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 사건과 항일독립운동을 담당하는 제1소위원장을 맡게 됐다. 1소위에는 박구병(대통령 지명)·이현주(더불어민주당 추천)·이동욱(국민의힘 추천) 위원이 함께한다. 3일 오후 한겨레와 인터뷰가 끝난 뒤 상임위원실 자신의 자리에 앉은 김귀옥 진실화해위 상임위원 오른쪽 벽면에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고 영어로 출력해 붙인 종이가 보인다. 과거사 조사기구의 존재 목적을 환기하는 문장이다. 고경태 기자 이날 오전 전원위에 이어 오후에는 소위원회 예비모임까지 열렸다. 종일 회의에 집중한 뒤 바로 인터뷰에 나선 김 상임위원 얼굴에는 피로감보다는 대장정을 나서기 직전의 설렘과 생기가 엿보였다. 현재 3기에 접수된 진실규명 신청 건수(6월24일 기준)는 5360건으로, 이중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사건은 1200여건이다. 3기에서 조사가 개시되면 2기에서 조사 중지된 2111건(한국전쟁기 사건 1365건)부터 처리해야 하고, 새로 신청이 들어온 사건과 더불어 직권조사(당사자나 유족의 신청이 없어도 사건 중대성을 인정해 벌이는 조사)를 결정할 사건까지 더해진다. 반면 국별 조사관 수는 2기의 60명에 견줘 3기에서는 45명으로 줄어들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그런데도 그는 “직권조사할 게 많다”며 진실규명 과제에 대한 의욕을 내비쳤다.광고광고 한국전쟁기를 오래 연구한 역사사회학자로 이름을 알려온 김 상임위원은 관련된 여러 질문에 막힘 없이 답했다. 특히 전쟁을 이념의 렌즈로 보지 말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던 민간인의 입장에서 시시비비를 가릴 것을 강조했다. 가해 주체가 대한민국 군경이든 적대세력(인민군 또는 좌익)이든 그 궁극적 책임은 끝내 전쟁을 막지 못한 국가에 있다고도 했다. 2기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건으로 ‘암살대원’이라는 경찰 기록에 근거해 미성년 피해자들을 진실규명에서 배제한 진도 사건, 역시 경찰 기록을 앞세워 선택적으로 진실규명한 영천 사건을 꼽았다. 한성대 상상력교양대학 핵심소양교양학부 교수로 20년 넘게 일하며 2022년부터 2년간 한국구술사학회장을 지내기도 한 김 상임위원은 구술사학계에서 독보적인 연구자다. 1996년 6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6개월간 월남민들의 공동체인 속초 청호동 아바이마을에 체류하며 조사활동을 벌인 일은 과거사 연구의 새로운 이정표가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7년 7월에도 전북 김제 용지면의 월남민 공동체에 1개월간 거주하며 조사를 이어갔고, 이는 1999년 '월남민의 생활경험과 정체성'이라는 박사 논문과 단행본으로 세상에 나왔다. 2006~2008년에는 1기 진화위 용역과 개인 연구 차원의 조사를 이어가며 강화군에서 3년간 민간인 피해자 구술 작업도 했다. 광고 지속적인 구술 조사 경험 덕에 피해자와 조사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처지라고 한다. 그는 “3기에서는 조사과정에서 신청인-조사관 양쪽이 얻을 수 있는 트라우마 치유를 위해 심리 상담사를 모실 계획”이라고 밝히며 자신이 과거 피해자 구술작업을 하며 마주했던 악몽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구술자의 아픈 기억이 전이되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그 어려움이 글로 다 쓰이지 않아서 결국 여러 편의 시를 토해냈단다. 시는 맨 뒤에 소개한다. 다음은 일문일답.김귀옥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이 3일 오후 서울 중구 퇴계로 남산스퀘어빌딩에 있는 진실화해위 6층 상임위원실에서 한겨레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 4월16일 임명돼 두 달 넘게 진실화해위에 출근하셨어요. 주로 무슨 일을 하셨나요?. “2기 때 조사 중지된 1365건에 이르는 한국전쟁기 사건 조사보고서를 읽는 데 주력했어요. 거의 매일 위원장과 함께 진실규명 신청인들을 면담하기도 했고요. 또한 멀리서만 봐왔던 공무원들과 종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됐어요. ‘공무원들은 관료적일 것’이라고만 여겼는데, 꼭 그렇지는 않더라고요. 멀리서 보면 단순하고 호오와 시비가 분명하지만, 사람들 속에서 보면 소소한 일상과 함께 경계가 불분명하거나 시비가 불확실해질 수도 있음을 느꼈습니다.” ― 2기 때 조사한 한국전쟁 사건 보고서를 읽으셨다고 했는데, 주목할 만한 사건은 무엇이었나요. 광고 “2기 사건보고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미성년자를 비롯한 일부 희생자를 암살대원 등 부역자로 기록한 경찰 기록에 근거해 진실규명에서 배제한) 진도 사건(진도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과 영천 사건(영천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사건)입니다. 사건 자체보다는 소위나 전원회(전체위) 결과에서 내려진 결정이 대단히 회의감을 품게 했습니다. 진화위 설립의 이유가 무엇인가요? 국제 규약이나 다른 나라의 과거사 활동에서 ‘민간인 추정 원칙’을 확인하잖아요. 제네바협약 1977년 추가의정서 50조1항에 따르면 ‘의심이 있으면 민간인으로 간주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2기 위원회는 희생자나 유족에게 민간인 입증 책임을 전가했어요. 이는 기억과 기록의 기본 관계에 대한 인식 부족이 2기 위원회에서 작동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2기 신청자 중에 기억과 기록의 불일치 때문에 진실규명이 결정되지 않은 사례가 적지 않았어요. 물론 2기 진화위가 문을 닫게 되는 상황에 몰려 시간이 부족했던 측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치 전범 재판에서도 언명되었듯이 과거사 문제가 발생한 책임은 전적으로 국가에 있고 기록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책임 역시 국가가 져야 합니다. 3기 위원회가 반드시 교훈으로 삼아야 할 점입니다.”3일 오전 3기 진실화해위 첫 전원위가 시작되기 전 송상교 위원장으로부터 대통령 임명장을 받은 위원들이 다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이동욱·박구병·최창호·장영수·정원옥·이호중 위원과 송상교 위원장 건너 김영주·김귀옥·김웅기·이현주·김정하·박래군 위원. 진실화해위 제공 ― 어떤 마음으로 상임위원에 지원하셨을까요? “4월17일 처음 출근하던 날 김하종 경주유족회장님 등 한국전쟁기 유족회 대표 15분과 면담이 잡혀 있더군요. 그분들을 만나는데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2000년대 초반 저도 과거사 조사를 위한 독립기구 출범을 위해 뜻을 모아 활동했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의 멤버였거든요. 당시 이이화·김동춘(성공회대)·홍순권(동아대) 선생님 등이 이 운동을 주도하셨죠. 그렇게 해서 탄생한 1기 진화위(2005~2010)가 절반의 성공으로 마무리되고, 2기 진화위(2020~2025)는 ‘혼돈의 극점’을 보여주면서 유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어요. 그래서 늘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3기가 마지막 위원회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제가 뒷짐만 지고 있어선 안 된다고 판단하고 직접 뛰어들기로 했어요.” ― 2기 진화위와 관련해 방금 ‘혼돈의 극점’이라고 언급하셨는데요. “마스크맨 때문이죠(웃음). 조사2국장이 국회 행안위에 나와 마스크를 끝까지 안 벗었잖아요. 정말 놀랐어요. 진화위는 가장 존경받아야 할 국가기관 중 하나인데, 코미디가 돼버렸으니까요. 너무너무 가슴 아팠고 분노했어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분위기를 만든 구조가 있는 거죠. 그리고 12·3 비상계엄 이후 큰 혼돈이 있었고요.” ― 위원님은 역사사회학자십니다. 역사사회학은 ‘사회의 변화를 시간(역사)과의 관계를 통해 들여다보는 학문’이라고들 하는데, 주요 연구과제가 한국전쟁이었어요. “제가 대학에서 공부하던 1980년대 초·중반만 해도 현대사 연구가 일제 강점기에 멈춰져 있었어요. 해방전후사 연구가 학위논문 밖에서 시작된 새로운 흐름이었지요. 대표적 연구가 ‘해방전후사의 인식’(한길사, 1979~1989년 총 6권 출간)이라는 책으로 묶였고요. 이 책은 해방 시기와 1950년대 연구의 금기를 깬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저 역시 그 연구에 깊은 영향을 받은 ‘해전사 세대’라고 할 수 있어요. 해방 당시의 기록이나 증언에 흥분해 밤잠도 설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대학원에서는 그런 주제를 금기시하거나 회피했어요. 그래도 대학(서울대 사회학과) 은사셨던 한완상·김진균·권태환 선생님으로부터 격려를 받았습니다. 사실을 맹신하기보다는 의문을 품는 자세를 견지하라고 하셨어요.”1996년 12월 속초 청호동 조사에서 월남민 할머니와 구술작업을 벌인 뒤. 작업을 위해 흑백·컬러필름이 각각 든 카메라 2대를 준비해 갔다고 한다. 김귀옥 제공 1996년 12월 속초 청호동 조사에서 월남민 할머니와 구술작업을 벌인 뒤. 김귀옥 제공 ― 속초에서 6개월간 체류하며 북한에서 내려온 월남민을 조사하셨어요. “박사학위 논문 준비를 위해 한국전쟁과 분단 문제를 들여다보며 우리 사회에서 가장 지배적이었던 반공 이데올로기가 실제 사람들 속에서 만들어지고 소통되는 과정을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시만 해도 그것을 잘 구현할 만한 이들이 월남민이었어요. 1996년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월남민들이 거주하는 속초 청호동 아바이마을에서 6개월간 체류하며 조사했어요. 한국전쟁 직후 전국적으로 월남민 공동체가 수천개 있었는데, 1990년대 중반에는 40여 군데 남아있었죠. 그중 속초가 가장 컸습니다. 저녁에는 공부방에서 야간 교사로 일하며 신뢰를 쌓았어요. 수상하다고 신고도 당했지만요. 1997년 7월 한 달간은 전북 김제 용지면의 월남민 공동체에 머물렀고요. 이렇게 조사하는 과정에서 월남민들이 살아온 생애담 속에 깃든 수많은 국가폭력과 성폭력, 재산 수탈 등의 사실을 확인했어요. 또한 한국전쟁기에 여성들이 ‘위안부’로 동원됐던 일과 그 지역 인근에 본거지를 둔 에이치아이디(HID, 북파공작부대)가 이북 민간인을 납치해온다는 사실도 알게 됐어요.” ― 해방전후사를 진화위 조사대상의 시간적 범위로 볼 때 비어있는 틈이 있을까요. 가령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라거나. “반민특위도 있고, 그와 연결되는 국회 프락치 사건도 있겠죠. 둘 다 3기에 신청이 됐어요. 10월항쟁처럼 이미 일부 조사했으나 충분히 조사 못 한 부분도 있죠. 또 일제 강점기 때에 항일운동가로 이름을 날리고 해방 이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돼 대전 골령골에서 학살당한 이관술 선생(1902~1950) 사건도 있어요. 법원 재심에서는 이미 무죄가 났지만, 2기 진화위는 사건 신청을 받고도 진실규명을 못 했어요. 역시 항일운동가였으나 이승만 정권 때 간첩 누명을 쓰고 사형집행을 당한 진보당 당수 조봉암(1898~1950) 사건도 진화위에서 조사하지 못했어요.”1950년 7월 대전 산내면 골령골에서 헌병들이 대전형무소 재소자들과 보도연맹원을 학살하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2기 진실화해위에서 군법회의 사형판결문이 뒤늦게 발견됐다는 이유로 진실규명이 취소되고 신청 자체가 각하돼 논란이 됐던 고 백락정의 조카 백남식(맨 왼쪽씨와 전미경 대전 산내사건 피학살자유족회장(가운데 뒷모습)이 지난 5월12일 오후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 위원장실에서 송상교 위원장(맨 오른쪽), 김귀옥 상임위원(오른쪽서 두 번째)과 면담하고 있다. 김정효 선임기자 hyopd@hani.co.kr ― 한국전쟁은 한국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가 좀 더 부각돼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전쟁을 이념적으로만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전쟁이 터졌을 때 민간인들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생존’이었어요. 어떻게 살아남느냐였죠. 예전에 구술조사를 하다 보면, 태평양전쟁이나 한국전쟁을 헷갈리시는 분도 계세요. 그분들한테는 둘 다 어떻게든 피해야 하는 전쟁이었어요. 남자들의 경우 끌려가지 않기 위해 나이를 속입니다. 전쟁 주체가 좋다 나쁘다를 떠나 그게 생존의 본능입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이념이 어떻다거나 적이 누구였냐고 말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어요. 여기에 덧붙여 배·보상 이야기를 하면, 군경에 의한 희생이건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이건 차별을 해서는 안 됩니다. 큰 틀에서는 국가가 책임지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문제잖아요. 당시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더 노력했어야죠. 분단이 확정되기 직전까지 김구 선생이 민족 지도자로서 왜 북에 갔을까요? 분단되면 전쟁이 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막으려고 했던 거거든요. 그래서 이념적으로만 접근하면 1950년대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는 겁니다.” ― 젠더 문제에 관심이 많으신 거로 아는데요. 한국전쟁기 여성에 대한 국가폭력 조사가 별도로 이뤄진 적은 없습니다. “1기 진화위가 출범하기 전인 2002년부터 지면이나 학술토론회에서 위안부 문제와 전시 젠더 폭력 문제를 제기해왔습니다. 제가 장기간 지역에서 구술조사를 할 때 숱하게 들었던 말이거든요. 다만 사회적 반향이 적었다고 해야 할까요? 김상숙 박사(성공회대 연구교수)도 젠더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고, 김태우 교수(외대)도 ‘냉전의 마녀들’이라는 책을 통해 이 문제를 밝혀냈습니다. 흔히들 4·3사건에서 젠더 폭력이 많이 발생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같은 시기 육지에서도 같은 일이 횡행했어요. 늦었지만, 3기 진화위가 제 역할을 해야 할 차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전쟁기 젠더 폭력의 당사자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3자 증언만이 존재합니다. 직권조사가 필요합니다.”국정원이 지난 6월 진실화해위에 넘겨준 6.25 처형자 명단. 총 분량이 2055쪽에 이르고, 처형자 2만6330명과 그 연고자 3만8135명의 명단이 담겨있다. ‘중앙정보부’는 국정원의 옛 이름이다. 진실화해위 제공 ― 3기 진화위가 국정원으로부터 ‘6.25 처형자 명단’을 처음으로 받았는데요. 이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한다고 보시는지. “6월16일 국정원으로부터 ‘6.25 처형자 명단’을 받았습니다. 총 분량 2055쪽에 이르고, 처형자 2만6330명과 그 연고자 3만8135명의 명단이 담겨있습니다. 명단에서 온갖 사연들이 들려오는 듯해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선 3기 진실 규명 활동에 이 명단을 소중하게 활용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아직 최종결정이 된 건 아니지만, 처형자 명단에 담긴 희생자들에 대한 직권조사 방안을 마련해보려고 합니다. 또 국정원에서 더 받을 자료가 없는지 확인해야 하고요.” ― 전시 젠더 폭력과 6·25 처형자 명단 건과 관련해 말씀하셨는데, 국방경비법에 따른 군법회의 사건도 있지 않나요? “미군정기 군인을 처벌하기 위해 만든 국방경비법으로 한국전쟁기에 수많은 민간인을 군법회의에서 사형시켰어요. 이것 역시 직권조사를 하는 방향으로 가려고 합니다. 특히 1·2기를 거치며 사건별로는 규명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판결을 진행했는지는 밝혀내지 못했어요. (2기에서 군법회의 판결문이 발견됐다는 이유로 진실규명이 취소된) 백락정(백낙정, 1919년생)의 기록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형 판결문만 있을 뿐 어떤 재판 절차를 거쳤는지는 모르잖아요. 이게 기록인가요? 유족들도 자신의 부모가 왜 죽었는지를 알아야 애도를 해도 제대로 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아직도 수만건 된다는 군법회의 판결의 전체상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모릅니다. 현재까지 드러난 게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건 분명합니다.”김귀옥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이 3일 오후 서울 중구 퇴계로 남산스퀘어빌딩에 있는 진실화해위 6층 상임위원실에서 한겨레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 그 밖의 직권조사 이슈가 또 있을까요. “한국전쟁기 부역 혐의 희생자에 대한 조사겠지요. 1950년 9·28 서울 수복 뒤 ‘특조령’(비상사태하범죄처벌에관한특별조치령)에 의해 1000명 넘는 사람들이 단독판사, 단심제로 단시간 내 사형집행됐어요. 그런데 이듬해 2월 이에 대한 법적 완화 및 감형조치가 시행됐어요. 몇 개월만 버텼으면 사형되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슬로 사라진 겁니다. 1기와 2기에서 조사가 진행됐지만, 아직 실체가 덜 드러났어요. 아무튼 신청주의에 매몰되지 않되 2기 조사 중지 사건과 3기 신청사건에 우선 집중하면서 직권조사를 제대로 시행해 개별화된 사건들의 구조적이고, 전체적인 성격을 제대로 드러내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유족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을지요. “우선 2기의 진실규명 절차 중단에 대해서는 아무리 사과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봅니다. 결국 국가가 제2, 제3의 가해를 한 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리며, 3기가 최선을 다해 역사적 책임을 다하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우선 고령의 유족분들에게 ‘건강 관리를 잘하시라’고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둘째, 2기 진화위의 부진으로 유족분들의 마음이 급하시겠지만, 진화위 조사관들을 격려하고 배려해달라고 부탁드립니다. 조사관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시며 지지해주시면, 조사하는 과정에서 더 큰 힘과 지혜가 생깁니다. 셋째, 유족회와 유족들 간 차이를 줄이고 상호이해와 배려의 폭을 넓혀주십사 부탁드립니다.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받지 못하는 유족의 아픔에 최대한 공감해주시고, 서로 차별하고 배격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 3기 위원회가 마지막 위원회가 될 수 있다고들 이야기합니다. “3기가 마지막이 된다면 수많은 기록과 자료를 대중, 연구자, 후대에 넘겨줘야 합니다. 1983년 케이비에스(KBS)의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잖아요. 그게 세계기록유산이 될지 누가 알았겠어요. 진화위가 남기는 자료들은 부끄러운 역사의 증거이기도 하자만, 민주화운동의 분투를 드러내는 위대한 족적입니다. 개정된 과거사정리법(진실화해위 기본법) 55조에서 얘기하듯 과거사연구재단(가칭) 설립이 3기 진화위 후반에는 논의되어야 합니다.”2007년 1월 한 달간 구술조사를 벌인 강화도 교동에서 주민들과 함께. 교동은 3년간 방학 때마다 조사했다고 한다. 김귀옥 제공 ― 한국전쟁 관련 구술 작업을 하셨으니, 그 누구보다 조사관의 고충과 마음을 아실 텐데요. “아무리 힘들더라도 조사관이 자신의 개인적 감정이나 생각을 두려움과 고난 중에 있는 유족이나 신청자들에게 직·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조사관도 인간이다 보니 신청서를 본 뒤 유족 앞에서 무심코 ‘신청해봤자 안 될 텐데’ 따위의 말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거든요. 그런 가치평가는 절대 하면 안 됩니다. 신청자나 유족은 예민합니다. 그들을 절망과 분노에 빠지게 합니다. 그래서 조사관 교육도 철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조사관들이 조사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돕기 위해 3기에서는 상담 전문가를 모시고자 합니다. 두 가지 차원에서 상담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봐요. 첫째는 사건 신청자들이 조사받는 과정에서 사건을 떠올리면서 트라우마를 겪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에 대한 상담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로는 조사관에 대한 상담입니다. 신청인의 진술이나 증언을 청취하고 난 뒤 일상생활이 어렵다고 할 정도로 반응하는 조사관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위한 상담 프로그램을 준비해 다음 조사를 힘있게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겁니다. 저도 구술 작업을 하고 나면 오랫동안 구술자들의 아픔이 전이돼 잠을 좀 못 자는 경우가 많았어요. 2007년 강화도에서 구술조사를 한 뒤에는 그 마음을 시로 표현해야만 할 정도였어요.” (김 상임위원에게 당시 썼던 시를 여러 편 받아 그중 한 편을 싣는다) 한 목사의 고해성사 삼 일째 새벽 예배에 나오지 않는 안골 할머니 사계절 하루도 빠짐없이 지팡이에 의지하여 교회에 부지런히 나오던 할머니 캔 음료를 사들고 썩어가는 초가집 어둔 방문을 열다 “o 권사님” 할머니는 ‘으응’하며 간신히 일어나 숨을 고루다 “내가 무덤 속으로 가져 갈려고 했는데 마음이 무너져...” “o 권사님, 뭐가 그리 답답하세요?” 옆집 치안대 O이에게 끌려 나가던 영감 모습이 50년 그날처럼 떠올라 요 며칠 잠을 잘 수가 없어 옆집 O이를 보면 미움이 치솟아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내고도 삭혀지지 않는 노여움 수치심 온몸에 식칼 자국이 난 영감이 한겨울 눈밭을 뒹굴고 있지만 찾지 못했던 두려움에 대한 후회 절대로 용서 못 한다 죽어서도 용서 못 한다 치안대가 나인지, 내가 치안대인지 목사는 십자가의 권능도 예수의 자비도 구할 수 없어 십자가의 이름으로 거짓을, 살해를 정의라 말하였고 고통과 억압의 기억을 태초의 침묵으로 십자가 아래 가두었으니 시골 교회 목사는 정의라는 상자 속 피비린내음을 맡고야 말다 (2007년, 김귀옥 시)
“군법회의 사형, 젠더 폭력…직권조사할 게 너무 많다” [안녕 진화위㉙]
‘안녕’은 환영과 작별의 인사다. 3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또는 진화위)가 7월3일 13인의 전 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첫 전원위원회를 열었다. 2월26일 출범한 지 넉 달 만이다. 2기 활동 종료 뒤로는 7개월여 만이다. 조사관 채용도 마무리 단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