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구글 선호 매체 등록클립아트코리아광고김혁우 | 을지대 장례산업전공 겸임교수 죽음은 생물학적 사건이지만,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은 철저히 사회적이다. 인류학자들이 오래 관찰해 왔듯, 어떤 사회도 시신을 그저 폐기하지 않았다. 가장 척박한 환경의 공동체조차 죽은 자를 어떻게 보낼지를 두고 정교한 절차를 발전시켰다. 그 절차의 핵심에는 언제나 ‘함께 모이는 일’이 있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이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 그것이 장례라는 제도의 본질이다.최근 한국 사회에서 빠르게 확산하는 무빈소 장례는 이 본질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던진다. 빈소를 차리지 않고, 조문을 받지 않으며, 화장장으로 직행하는 이른바 ‘직장’(直葬)의 형태다. 통계는 이 흐름이 일시적 현상이 아님을 보여준다. 나는 이 변화를 단순히 ‘전통의 쇠퇴’라는 익숙한 틀로 읽는 데 반대한다. 문제는 훨씬 구조적이다.광고장례사회학의 고전적 통찰부터 짚어보자. 죽음의 의례는 두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한다. 하나는 떠난 자를 산 자들의 세계에서 ‘분리’해 다른 질서로 옮기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남은 자들을 다시 ‘통합’해 일상으로 돌려보내는 일이다. 전자가 고인을 위한 것이라면, 후자는 철저히 산 자를 위한 것이다. 빈소란 바로 이 두 작업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무대다. 조문객이 절을 하고, 유족이 그 절을 받고, 서로 안부를 묻고 음식을 나누는 그 번거로운 과정 전체가 사실은 ‘사회를 다시 봉합하는 노동’이었다.무빈소는 이 노동을 생략한다. 그리고 생략의 명분은 언제나 합리성이다. 번거롭지 않게, 폐 끼치지 않게, 비용을 들이지 않게. 이 언어는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린다. 바로 그 점이 위험하다. 사회학이 거듭 경계해 온 것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제도가 ‘원래 그런 것’ 혹은 ‘합리적 선택’의 외피를 쓰고 자연스러워지는 순간이다. 의례의 해체가 진보나 효율로 번역될 때, 우리는 무엇이 사라지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그것을 잃는다.광고광고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합리화’는 누구의 합리성인가. 장례가 간소해질수록 이득을 보는 쪽은 분명히 존재한다. 의례가 짧아지면 절차를 운영하는 비용이 줄고, 회전은 빨라진다. 죽음을 다루는 일이 하나의 산업이 된 사회에서, ‘간소함’은 종종 공급자의 언어로 출발해 소비자의 신념으로 정착한다.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지만, 선택지의 구성 자체가 누군가에 의해 설계되었을 가능성을 의심해야 한다. 죽음의 상품화가 도달하는 마지막 단계는, 역설적이게도 의례 자체를 소비자에게서 거두어가는 것이다.더 깊은 문제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에 있다. 우리 사회는 압축적 근대화를 겪으며 전통적 공동체를 빠르게 해체했지만,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유대의 양식은 충분히 마련하지 못했다. 그 공백 속에서 관혼상제는 흔치 않게 살아남은 ‘관계의 인프라’였다. 평소 만나지 못하던 사람들이 장례식장에서 다시 이어지고, 소원했던 관계가 부의 봉투 하나로 회복되곤 했다. 이 인프라가 무너진다는 것은 단지 의례 하나가 사라지는 일이 아니다. 한국인이 서로와 연결되어 있던 마지막 격자 하나가 풀리는 일이다.광고물론 무빈소를 택하는 개개인을 탓할 일은 아니다. 1인 가구의 증가, 가족 관계의 단절, 경제적 부담 앞에서 그것은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불가피함을 만들어낸 구조다. 우리는 왜 죽음을 함께 치를 수 없는 사회가 되었는가. 누가 그 ‘함께’를 비용으로 환산하도록 가르쳤는가.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사회적 결속이 약화할 때 공동체가 무규범 상태, 즉 아노미에 빠진다고 보았다. 그가 자살이라는 가장 개인적으로 보이는 죽음에서 사회의 병리를 읽어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죽음을 어떻게 다루는가는 그 사회가 삶을 어떻게 대하는가의 거울이다. 함께 애도할 줄 모르는 사회는 결국 함께 살아갈 줄도 모르게 된다.장례의 형식은 시대와 함께 변할 수 있고, 또 변해야 한다. 호화로운 허례를 옹호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변화의 방향이 ‘더 적은 관계’를 향할 때, 우리는 그것이 정말 우리의 선택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우리를 대신해 내린 결정인지 멈춰 서서 따져 물어야 한다.빈소를 차린다는 것은 죽은 자에게 바치는 격식이기 이전에, 산 자들이 서로에게 내미는 손이다. 그 손을 거두는 사회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지, 우리는 아직 충분히 묻지 않았다.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