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 지혜 개념어 사전’ 출간 작업을 주도한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구성원들이 지난 8월24일 서울 영등포구의 연구소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홍승하 출판위원장, 이윤경 이사, 이승준 이사장, 조해민 서울환경연합 활동가. 그림 속 남성이 고 신승철 소장이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광고철학자가 있었다. “우리의 인격과 가치,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대안적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분리하지 않는 삶은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 자신이 철학자로 세상에 말 걸면서도 “철학자란 의미의 구조물을 복잡하게 쌓으면서 결국 자본주의 등가교환에 복무하는 작자들”이라며 “배교자”가 되기를 선언한 철학자, 다람쥐가 두고 간 한톨의 도토리로부터 움트는 떡갈나무 숲의 혁명을 믿은 혁명가, 40여권의 책을 써낸 성실한 연구자, 고 신승철(1971~2023). 널리 이름을 알리지 않았으나, 한번 알게 된 사람은 깊이 알게 되고야 마는 사람이 있었다.그는 2023년 7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에 두고 간 도토리 한톨이, 아름드리 떡갈나무 한그루가 되어 그늘을 드리웠다. 신승철이 이사장이자 소장을 맡았던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의 조합원들이 뜻을 모아 지난 7월 말 ‘생태적 지혜 개념어 사전’(알렙)을 출간한 것이다.사전은 기후위기 시대에 ‘공유지의 지혜’와 ‘연결망의 지혜’, ‘정동(감응)의 지혜’를 믿는 175명의 생태적지혜연구소 조합원이 세미나와 강좌, 대화를 통해 머리를 맞대어온 결과물이다. 연구자·활동가·예술가·종교인·시민 등 47명이 실제 집필에 참여했다. 통상의 공저들이 각 필자의 글을 모아 편집되는 것과 달리, 기획부터 최종 퇴고까지 온전히 집단지성의 협업으로 제작된 점이 눈길을 끈다. 서로 연결되어 숲을 이루는, 생태적 지혜가 고스란히 구현된 기획이라 할 수 있겠다.광고사전은 커먼즈(코먼스·공유지)나 탄소세, 탈성장처럼 다중위기 시대에 그럭저럭 들어봄 직한 표제어부터 ‘리좀’ 같은 현대 철학의 언어, ‘마주침’이나 ‘생태 슬픔’ 등의 수수께끼 표제어, ‘유한자의 무한 결속’이나 ‘국지적 절대성’처럼 초심자는 보자마자 나자빠질 추상어에 이르기까지 75개 열쇳말로 생태적 지혜를 풀어간다. ‘사전’이라고 이름 붙었지만 일반 독자에게 익숙한 구성은 아니다. “근대적 의미의 사전과 달리 말을 하면 할수록 새로운 의미가 늘어나고 의미가 풍성해지는, 탈근대적 의미의 사전”이라는 게 이승준 생태적지혜연구소 이사장의 설명이다.이것은 왜 사전이면서 사전이 아닌가. 지난 8월24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대방로(신길동)에 자리 잡은 생태적지혜연구소 사무실에서 이승준 이사장과 홍승하 출판위원장, 책의 책임편집을 맡은 조해민 서울환경연합 활동가, 고 신승철 소장의 부인이기도 한 이윤경 이사를 만나 이 새로운 사전에 대해 물었다.광고광고다중위기의 시대를 넘어설 ‘생태적 지혜’의 개념어들을 풀이한 사전이 출간됐다. 철학자 ‘신승철’로부터 출발해 170여명의 집단지성, 47명의 공동 집필로 작성한 새 시대의 열쇳말 목록이다. 이 독특한 사전의 기획과 집필 과정을 돌아봤다. 그래픽 김은정 기자 ejkim@hani.co.kr생태적지혜연구소는 2018년 여름 41도의 기록적인 폭염 이후 모인 문제의식으로 이듬해인 2019년 문을 열었다. 신승철을 비롯한 11명의 모임으로 시작된 연구소는 생태 철학을 넘어선 생태적 지혜를 표방한다. “철학과 아카데미의 지식이 추상적인 개념에 의미를 부과하고 그것의 닫힌 진릿값을 좋은 지식으로 이해하는 것과 달리 생태적 지혜의 삶-앎은 잠정적인 합의, 여러 개념의 횡단, 개방적이고 변형적인 의미망에 두루 걸치기를 지향한다”는 설명이다.그러나 들뢰즈·가타리를 중심으로 한 생태 철학의 개념들은 철학적 배경 없이 접근하기 쉽지 않거니와 신승철을 중심으로 한 연구소의 집단지성이 꾸려온 고유 개념까지 더해져, 언어는 생태적 지혜라는 대안적 사유에 다가서려는 초심자에게도 문턱이 될 법했다. “다른 곳에서는 유통되지 않지만 연구소에서만 이야기하는 개념이나 신승철 소장 자신이 제안한 개념들이 있었어요. 두루 사용하는 개념이라도 우리 안에서 새롭게 이해하려던 개념들도 있고요.” 이윤경 이사의 설명이다. 이를테면 ‘생태 슬픔’(Ecological Grief). 산불과 홍수, 가뭄 소식을 들을 때 몰려드는 슬픔과 불안, 복잡다단한 마음의 소용돌이. 새로운 말은 아니지만 연구소에서는 이 고통 속에서 희망을 찾는다. “온전한 생태계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확장된 정체성으로 나아가게 하는 잠재력”으로 보는 것이다.광고이런 까닭에 신승철 소장은 생전 이미 ‘개념어 사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가 여러 시급한 기획을 진행하느라 진전시키지 못했던 기획이 급물살을 탄 것은 2024년 6월29일, 신승철의 1주기 추모 축제 자리에서다. 출판사 알렙 쪽에서 ‘신승철 개념어 사전을 내보자’고 제안한 것이다. 연구소 식구들은 출판 구상은 환영하면서도 ‘신승철 개념어 사전’이라는 제목에는 입을 모아 반대했다. 고인이 먼저 강하게 반대했을 거란 취지였다. 신 소장은 열정적인 연구자였지만 사람들을 북돋아 함께 공부하며 글을 썼고, 연구소가 출범한 뒤에는 ‘연결자’와 ‘촉진자’를 자처하며 단독 저서 없이 모든 책을 공저로 출간했다고 한다.책머리에서 책임편집을 맡은 조해민 활동가는 “(신승철 선생님은 자신의 사유가) 수많은 세미나와 읽기 모임, 서로배움터 강좌, 행사 뒤풀이 그리고 일상에서 오간 대화에서 구성된 사이주체성의 산물이라고 여겼을 것”이며 “(결과물을) 공동체의 관계망과 사회적 공유재로서 표현하는 것이 그의 뜻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라고 적었다. 홍승하 출판위원장은 “우리는 신승철 평전을 쓴 게 아니라 그와 함께 사유했던 많은 철학자, 활동가, 예술가들의 생각을 모은 것”이라고 설명했다.지난 2024년 6월29일 고 신승철 소장 1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조합원들이 신 소장을 기리는 펼침막을 들고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제공그렇게 물꼬를 튼 ‘공동 집필’의 기획은 “오디세우스의 여정 같았다”고 조 활동가가 웃으며 말했다. 각자 맡은 표제어에 대해 3~4쪽 분량의 글을 보내는 데서 그치지 않았던 까닭이다. 75개의 표제어를 정하고 배치하는 과정부터 필자를 정하는 과정, 원고를 쓰고 퇴고하기까지 모든 과정이 그 자체로 가본 적 없는 바다를 여행하는 항해와 같았다. 애초 목표는 신 소장 2주기인 지난해에 맞춰 출간하는 것이었지만, 1년을 초과했다. 집단지성의 배는 각자가 거기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사유의 골짜기까지 샅샅이 훑어내고서야 목적지에 이르렀다.사전을 집필하는 방식은 그 자체로 ‘리좀의 사유’를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리좀’(뿌리줄기)은 ‘그리고……그리고……그리고’로 연결되는 수평적 연결 접속의 형상을 띤다.”(신승철·이승준) 리좀은 “끊임없이 연결과 변화를 만들어내는 관계망”이고, 리좀의 사유는 그런 관계 속에서 생산된다. 조합원들이 손을 들어 각자가 쓰고 싶은 원고를 맡았고, 클라우드에 올라온 문서를 보며 서로가 쓴 글을 자유롭게 첨삭했다. 이 이사장처럼 수십년 철학을 공부한 연구자들도 있지만, 비전문가들도 ‘사전’이라는 양식에 맞춤한 글을 써야 하기에 각자 맡은 분야에 대해 깊이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광고집단 집필은 애초에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게다가 책 속 표현대로 사전은 “지식을 보편화해 사회에 두루 통하는 지배적 규범으로 자리 잡게 하는 아카데미적 작업의 일환”이지만 이 책은 처음부터 “모든 개념은 흐름과 과정의 세계 안에서 ‘이것일 수도 저것일 수도 있다’라는 경계 횡단적 논리로 이해할 수 있다”고 정의한다. 아무리 ‘흐름과 과정의 세계’를 담아낸다고 해도,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책인 만큼 개념어마다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사전적 정의’와 영문 표기를 짧게 붙이자는 게 출판사의 요청이었는데, 저자들 사이에선 이에 대해서도 “아우성”이 나왔다. 연구소가 사유해온 방식에서 비켜난 방식이기 때문이다.사전이면서 사전 아닌, “탈근대적 의미의 사전”. 이 도저한 아이러니를 넘어 책이라는 단일한 결과물을 내놓는 기획이라니, “피·땀·눈물의 결정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저자분들 중에서는 ‘막상 쓰려고 보니 내가 이걸 너무 몰라서 창피하고, 다른 분들과 같이 써도 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나중에 원고를 서로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다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부쩍 변화하고, 새로운 사유를 형성하는 효과가 있었어요. 알고 쓰는 게 아니라, 쓰다 보니까 더 알게 된 말들도 있습니다. 누구의 글도 독자적 결과물이 아니었고요. 제 글에도 다른 선생님들의 글이 한스푼씩 들어가 있습니다.” 이 이사장은 이렇게 전했다. “자기만의 맥락에서 재해석한 생태적 지혜”를 뼈대 삼아, 서로의 글이 서로에게 녹아들며 되레 명확한 해답이 아닌 유동하는 의미망을 담은 사전이 탄생한 것이다.생태적 지혜 개념어 사전 l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기획, 신승철·이승준·이윤경·조해민·홍승하 외 42명 지음, 알렙(2026)그렇게 세상에 뿌리(뿌리줄기)를 내린 ‘생태적 지혜’는 집필진이 기대한 대로 “오늘날의 위기를 정면으로 들여다보고, 기후위기와 체제 붕괴를 극복할 대안적 사유들을 묶어 낸 소중한 사유의 지도”가 될 것 같다. 책은 이 시대를 위기로 인식하는 독자 누구에게나 쉽게 읽힌다. 75편의 글은 난해한 개념어 하나하나를 삶에 밀착한 언어로 풀어내고 있거니와, 각각의 완결성을 갖고 있다. 마치 한편 한편이 모두 제각각의 ‘생태적 지혜 실천 선언문’처럼 읽힌다.그럼에도 글들은 위계 없이 이어져 있다. ‘도시 농업’을 열쇳말로 쓴 글에서는 ‘커먼즈 텃밭’이 어떻게 “인간과 인간, 인간과 비인간을 연결”하며 “새로운 공생의 주체인 생태 시민을 만들어내는 생태적 전환의 공간”으로 자리 잡는지 이야기하고, ‘적정 기술’을 주제로 한 글에서는 적정 기술이 그리는 사회가 “소유의 충분함에 대한 공통 기준”을 만들어내고 “적은 것으로도 더 자율적으로 살 방법을 합의”한다고 설명한다. “‘천 개의 고원’(들뢰즈·가타리 공저)을 읽을 때 각 장이 다 연결돼 있어 아무 데서나, 어디서든 읽기를 시작해도 된다고 하지요. 이 책도 하나의 개념 속에 다른 것들을 엄청나게 많이 품고 있습니다.”(이윤경 이사)신승철 소장이 세상을 떠난 뒤 연구소에 합류해 책을 만드는 일까지 맡게 된 조 활동가는 이렇게 설명했다. “저를 비롯한 청년들의 기본적인 정서는 무기력이에요. 뭔가를 바꿀 생각도 할 수 없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도 그럴 조건도 안 되지요. 저는 이 책의 개념들이 그 어찌할 수 없는 협착에 약간의 돌파구가 되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주체가 돼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무한히 다양한 가능성을 갖고 있고 ‘마주침’을 통해 기존에 없던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하는 책이니까요. 내 삶에서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작은 변화의 씨앗을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명의 철학자가 그늘을 드리우고 떠난 자리에서 다시, 도토리 한톨이 떡갈나무의 혁명을 일궈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생태적 지혜 개념어 사전 집필진(가나다순) 강영란 고은경 공규동 권범철 권수형 김미정 김신윤주 김영준 김용휘 김은희 김준영 김진덕 김진희 김차랑 김현우 김희룡 남미자 박숙현 박종무 성미선 송기훈 신동석 신세리 신승철 심기용 오민우 우석영 유정길 이나경 이나미 이무열 이승준 이영두 이윤경 이태영 임영주 임지연 장윤석 장종민 전병욱 조해민 주현 천근성 최소연 한영섭 한인정 홍승하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