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철학의 한 세기 l 소은 박홍규의 생명철학 플라톤과 베르그송을 가로지르며 ‘생명’을 탐구 ‘자기운동자’ ‘자기차생자’ 개념으로 풀어내 환경·시간과 맞서며 자신을 지키려는 존재 ‘생명의 심장부엔 시간이 깃들어 있다’고 강조광고광고광고소은 박홍규는 서구 존재론사를 서구 자체 내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의 깊이와 독창성을 갖추고서 해명했다. 도서출판 길 제공 광고지난 한 세기에 걸쳐 한국에서는 어떤 철학적 사상들이 펼쳐졌을까. 현대 한국 철학의 100년을 찬찬히 음미해보고자 한다. 이런 음미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철학적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남겨진 철학적 자산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한국 철학은 서구 철학의 거대한 흐름에 마주쳐 그것과 대결하면서 자신의 형태를 만들어 왔다. 서구 철학의 척추를 이루는 것은 바로 형이상학의 역사이며, 다시 그 고갱이를 이루는 것은 존재론의 역사이다. 결국 서구 철학사를 이해하려는 노력의 핵심에는 ‘서구 존재론사’와의 지적 대결이 가로놓여 있다. 멀리로는 자연철학자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가까이로는 하이데거, 들뢰즈, 가능세계론 등에 이르기까지 서구 존재론사의 굵직한 흐름을 소화해 내는 것은 인류 지성사의 중핵을 파악하려는 것이니만큼 참으로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런 과정 없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대 한국 철학을 전개하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20세기의 선철들은 이런 험난하고 외로운 길을 걸어간 인물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서구 존재론사를 서구 자체 내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의 깊이와 독창성을 갖추고서 해명해 나간 대표적인 인물이 곧 소은 박홍규(1919~1994)이다. 소은은 서구 존재론사의 특정 대목을 떼어내어 연구한 다른 학자들과는 달리 ‘서구 존재론사’라는 거대한 흐름 전체를 고유의 시선과 언어로 요리할 수 있었던 철학자이다. 소은의 서구 존재론사는 플라톤에서 베르그송으로 가로지르는 선상에서 전개되며, 그 과정에서 특히 생명 개념을 새롭게 해명한 점이 두드러진다. 소은 사유의 이런 성격과 의의를 잘 드러내 주는 글로, ‘전집’ 2권에 수록되어 있는 ‘자기운동’을 들 수 있다. 이 글은 소은 사유에 입문하기에 최적의 글로서, 그의 생명철학과 직결되는 논의를 담고 있다. 광고박홍규의 서구 존재론사에서 출발점이 된 플라톤. 위키미디어 코먼스 잘 알려져 있듯이, 플라톤의 철학은 끝없이 생성을, 차이생성(differentiation)을 겪는 이 세계를 넘어서는 차원, 동일성(identity)을 유지하는 이데아들의 차원을 역설하는 사유이다. 수학은 이런 그의 사유를 지지해 주는 핵심적인 과학이며, 그가 밝혀내고자 한 차원은 바로 수학에 의해, 더 나아가 이데아들의 세계에 의해 드러나는 차원이었다. 이런 그의 사유에서 민감한 문제로서 떠오른 것은 생명―그리스 사유에서 생명은 영혼과 거의 같은 개념이다―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였다. 생명은 양면성을 띤다. 한편으로 생명의 차원은 이데아의 차원과 달리 생로병사를 겪는, 차이생성을 겪는 차원이다. 따라서 이데아의 차원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생명(영혼)은 신(神), 우주와 더불어 가장 “탁월한” 세 존재를 형성한다. 신과 우주가 영원한, 이데아적인 존재임을 역설하는 것은 비교적 용이했다. 하지만 생명은 탁월한 존재임에도 또한 차이생성을 겪는 존재라는 점에서 만만찮은 존재론적 문제로서 다가왔을 것이다. 플라톤은 이 생명이라는 존재를 해명하기 위해 ‘자기운동자’(self-mover)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생명이란 운동자이지만 ‘자기’운동자이고,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존재이지만 자기‘운동자’이다. 플라톤은 생명의 이런 성격을 “자신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로 표현한다. 플라톤이 ‘파이드로스’에서 전개한 이 생명존재론을 소은은 치밀하게 분석한다. 핵심은 한 존재자의 동일성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충족이유율(그것을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그것으로 만들어 주는 이유, 근거)을 운동하는 존재자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플라톤은 항상적으로 운동하는 존재는 불멸이지만 타자를 운동케 하거나 타자에 의해 운동하게 되는 존재는 불멸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자기운동’하는 존재만이 불멸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런 존재가 바로 생명이며, 생명은 외부에서 힘을 받아 운동하는 존재가 아니라 (현대적인 용어로) ‘자발성’(spontanéité)을 핵으로 하는 존재임을 역설한다. 소은은 이런 플라톤의 논의를 고유의 존재론적 용어들을 통해 해명하고, 그 끝에서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바로 ‘자기운동자’란 모순을 포함하는 개념이라는 점이다. 이는 곧 생명이란 그 안에서 모순을 소화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 생명이란 모순율을 넘어서는 존재라는 것을 뜻한다. 소은은 플라톤에서 시작한 서구 존재론사를 베르그송으로 잇는다. 이 사이에는 진화론이라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다. 생명의 진화 과정 전체에 대한 성찰을 토대로 한 베르그송의 존재론에서 생명은 자기운동자에서 자기차생자(self-differentiator)로 바뀐다. 자기운동자가 운동하면서도 자기를 잃지 않는 존재라면, 자기차생자는 자기를 잃지 않으면서도 계속 차이생성을 겪는 존재이다. 거꾸로 말해서, 계속 차이생성을 겪으면서도 그 생성들을 소화해 내면서 자기를 잃지 않는 존재이다. 이 때문에 여기에서 ‘자기’의 의미는 바뀐다. 플라톤에게서 자기란 항구적인 동일성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에게서의 자기란 계속 바뀌면서도 온전히 타자화하지 않는 역동적인 동일성이다. 베르그송의 자기는 변하지 않는 동일성이 아니라 변해 가면서도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앞에서 생명이란 모순을 소화하고 있는 존재라 했거니와, 이 개념에 보다 부합하는 것은 자기운동자 개념보다는 자기차생자 개념이다. 후자는 계속 달라지면서도 또한 같음을 유지하는 것, 스스로 타자화됨으로써 오히려 스스로를 새로운 형태로 계속 재탄생시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생명이란 모순율을 넘어서는 존재라는 점은 자기차생자 개념의 성립을 통해 뚜렷하게 확립된다. 자기운동자는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이다. 자기운동자는 운동하는 존재이므로 강한 의미에서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 즉 ‘영원한’ 존재는 아니지만, 운동하면서도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 즉 ‘항구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생명에게 이런 항구성은 보장되어 있지 않다고 본다. 생명이란 선험적으로 항구성을 보장받은 존재가 아니라 환경과 끊임없이 투쟁하면서 항구성을 가지려 애쓰는 존재이다. 생명은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가 아니라 시간과 투쟁하는 존재이다. 이 점에서 생명의 시간은 물질의 시간과 상반된다. 물질의 시간은 동일성이 유지되는, 긴 시간대로 본다면 동일성이 와해되는 시간이다. 이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시간, 동질성으로 나아가는 시간이다. 반대로 생명의 시간은 동일성이 계속 자기차이화하는, 나아가 아예 새로운 동일성들이 탄생하는 시간이다. 이는 “엔트로피의 사면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노력”의 시간이며, 이질성으로 나아가는 시간이다. 이렇게 생명이 주어진 동일성에 머물지 않고서 ‘차이’를 자기화하는, 그래서 자신의 동일성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가는 운동을 베르그송은 ‘생명의 약동’이라고 부른다. 자기차생자는 생명이기에 자기이며 차생자(差生者)이기에 약동을 머금는다. 달리 말해, 약동 즉 차이생성을 소화해 내면서 자기의 동일성을 바꾸어 나가는 존재가 생명인 것이다. 생명 진화 과정에 대한 성찰을 토대로 한 베르그송의 생명 개념을 박홍규는 기억 개념에 연관시킨다. 사진은 베르그송. 위키미디어 코먼스 소은은 베르그송의 이런 생명 개념을 기억 개념에 연관시킨다. 생명의 약동―소은의 번역으로는 ‘비약’―은 존재론적으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무를 극복하고 나온 것은 무로 가야 하는 것을 무로 가지 않게 하려는 능력이 있다. 그것이 기억 능력이라는 거야. (…) (플라톤에서는) 영혼(생명)은 영원해서 불사적이고 죽는 법이 없어. 베르그송 이론은 안 그래. 생명체는 한순간에도 죽을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영원히 살려고 한다. (…) 그 두 개의 모순, 딜레마가 있어. (…) 그러니까 플라톤과 베르그송은 ‘떠나지 않는다’의 의미가 달라. 기억까지는 같아. 그러나 ‘떠나지 않는’ 원인은 달라. 베르그송에게서는 그것이 허무에서 허무를 극복하고 나왔기 때문에 허무로 가려는 것을 붙잡고 허무로 안 가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그의 기억이야.”(‘전집 Ⅱ’, 125~126) 생명의 또 다른 이름은 기억이다. 기억은 시간이 도래시키는 차이생성을 끝없이 겪으면서도 그 차이생성을 소화해 내면서 연속성을 유지한다. 현재는 미래의 가능성을 특정한 현실성으로 만들어 내거니와, 그 현실성은 과거로 흘러가면서도 사라지지 않고 과거에 축적된다. 그리고 ‘미래→현재’로의 생성은 언제나 이전의 기억 전체를 터로 해서 이루어진다. ‘시간의 종합’을 통해 계속 풍부해지는 기억은 바로 자기차생자 그것에 다름 아니다. 서구 존재론사에 대한 소은 박홍규의 해명에 따라, 우리는 이데아, 신 등을 비롯한 ‘자기동일자’로부터 ‘자기운동자’로서의 생명 개념으로 그리고 다시 ‘자기차생자’로서의 생명과 기억으로 이행한 이런 흐름을 세밀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우리는 ‘생명의 심장부에는 시간이 깃들어 있다’는 명제로써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맥락에서 본다면, 생명이란 자기차생자라는 결론을 유지하면서도 논의의 흐름을 자기동일자→자기운동자→자기차생자의 구도가 아니라 오히려 아페이론→자기형성자(self-molder)→자기차생자의 구도로 가져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이는 이데아들보다는 오히려 아페이론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어 논한 소은의 작업을 이어서 생명 개념을 파악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전자현미경의 발명 이래 현대 생물학은 (바이러스의 발견을 비롯해) 미시 세계를 상당히 높은 해상도로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거시 세계에서의 추적 관찰 기법―특정한 개체에 표시를 해서 그 행동을 추적해 관찰하는 기법―을 미시 세계에 적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미시 차원에서의 실험을 행하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런 탐구의 결과 나타난 생명의 세계는 얼핏 생각되는 것보다 더 생성론적인 세계이다. 생명체의 모든 부분이 끝없이 생성하면서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데아들이라는 선험적 가설을 걷어내고 본다면, 오히려 생명의 일차적 모습은 아페이론에 가깝다. 하지만 생명의 보다 핵심적인 본질은 흐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에 휩쓸려 ‘엔트로피의 사면’으로 굴러떨어지지 않도록(아페이론 상태로 해체되지 않도록) 스스로의 ‘형태’를 갖추는 것, 차이생성의 바다에 녹아들지 않도록 자신의 동일성을 갖추는 데에 있다. 형태를, 동일성을 갖춘다는 것은 곧 각 생명체가 각각의 존재 이유를, 다시 말해 그 생명체가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것으로서 존재할 수(exist) 있도록 해주는 충족이유율을 갖춘다는 것을 뜻한다. 생명체는 갖가지 방식으로, 예컨대 디엔에이(DNA)라는 물질 구조를 통한 자신의 안정적인 정보(염기서열 등)의 확보, 유지, 전달 같은 방식들로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엔트로피의 사면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노력”이라는 베르그송의 언급을 이런 맥락에서 다시 한번 새겨볼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의 궁극적인 본질은 단지 자신의 형태, 동일성을 확보, 유지, 전달하는 데에 있지 않다. 동일성의 유지에 만족하는 생명체들은 결국 차이생성의 와류에 휩쓸릴 수밖에 없고, 자신의 동일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생명체는 끊임없이 차이생성을 흡수하면서 자신의 동일성을 변형해 갈 때에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차생자’ 개념의 궁극적인 의미이다.철학자 이정우 l 서울대학교에서 미셸 푸코로 학위를 받았다. 대안공간 철학아카데미에서 시민 강좌를 열었고, 지금은 소운서원에서 후학 양성과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세계철학사’ 4부작(2011~2024)을 펴냈고, 현재는 ‘소운 철학 대계’를 집필하고 있다.
변하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생명’ [.txt]
한국 철학의 한 세기 l 소은 박홍규의 생명철학 플라톤과 베르그송을 가로지르며 ‘생명’을 탐구 ‘자기운동자’ ‘자기차생자’ 개념으로 풀어내 환경·시간과 맞서며 자신을 지키려는 존재 ‘생명의 심장부엔 시간이 깃들어 있다’고 강조 지난 한 세기에 걸쳐 한국에서는 어떤 철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