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인천공항운영서비스 환경미화원들이 지난해 3월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에서 외부 유리 벽 물청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광고‘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말은 사라진 지 오래다. 똑같은 일을 해도 ‘계약직’은 더 적은 임금을 받는 등 각종 차별이 비일비재하다. 노동의 존엄성과 노동자 존중은 찾아보기 힘들다. 더더욱 ‘평등’이라는 말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에나 어울리는 말처럼 느껴지는 요즘이다.이런 상황 인식 속에서 보면 경희대 교육대학원 성열관 교수의 ‘피, 땀, 뇌, 운’은 시사점이 적잖은 책이다. 노동자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 사라진 현실에서 ‘공정’ 담론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혈연을 의미하는 ‘피’, 노력이라는 뜻을 담은 ‘땀’, 능력을 상징하는 ‘뇌’, 그리고 우연적 요소인 ‘운’이라는 네가지 열쇳말을 통해 지은이는 우리 시대가 지향해야 할 평등의 자리를 되짚는다.보통 ‘능력주의’로 번역되는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라는 용어를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은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다. 그는 1958년 발표한 ‘메리토크라시의 발흥’(The Rise of Meritocracy, 국내에는 2020년 ‘능력주의’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에서 지능과 노력이 능력(merit)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다.광고7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땀(노력)과 뇌(지능)의 의미도 진화 혹은 변질되었다. 누군가의 노력은 해도 해도 결실을 이룰 수 없는 ‘노오력’으로 치부된다. 수저계급론, 헬조선 같은 말들은 ‘노력’의 의미가 사회적으로 퇴화했음을 보여주는 증표다. 지은이는 땀의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메리토크라시의 응분과 승복의 윤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기준은 “능력이나 업적이 아니라, 모든 땀의 가치를 인정하는 공동체 윤리”의 기반 위에 세워져야 한다.피, 땀, 뇌, 운 l 성열관 지음, 한울, 2만8800원지능, 즉 뇌는 오랫동안 메리토크라시의 주요 원천 중 하나였지만, 사실 ‘피’의 영향을 적잖이 받아왔다. 메리토크라시는 봉건사회를 극복하는 중요한 기제였지만, 혈연주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신분이 과거 혈연주의의 핵심이었다면, 경제력이 접목되면서 “뇌와 피가 공존하는 사회”가 되었다. 상속으로 대표되는 ‘피’는 오늘날 자녀의 “출발선을 결정하는” 지대한 역할을 한다. 지은이는 “뇌 또는 피 중 하나가 나머지 하나를 전적으로 지배하는 사회는 인류 역사상 한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고 명토 박는다.광고광고‘피’와 더불어 능력주의를 지탱하는 요소로 지은이가 새롭게 추가한 것은 ‘운’이다. 운은 작게 보면 “개인의 성공과 실패에 미친 우연한 사건”이지만, 크게 보면 “부모, 국적, 지능, 성별, 외모, 목소리, 운동신경 등 인간이 선택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존 롤스 등 많은 정치철학자들이 “더 안전하고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일” 중 하나로 운의 요소를 국가적으로 다룬 이유가 이 때문이다.존 롤스는 단순한 분배정의가 아니라 ‘사회의 기본 구조’를 중시하는 ‘재산소유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어떤 시민이든 “어느 정도 충분한 재산을 갖고 출발해야 자존감을 지니고 자율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고, 그래야만 “모든 시민이 존중받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이 생긴다는 게 재산소유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이러한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국민의 운을 교정”할 수 있어야 한다. 시장의 효율성은 인정하면서도 “출발선을 어떻게 조정할지, 게임의 규칙이 공정한지, 사회적 약자가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정치 또는 헌법”이다. 오늘날의 헌법이 “피의 영향력”, 즉 공적 지위를 세습하지 못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점을 지은이는 강조한다.광고1부에서 피, 땀, 뇌, 운의 현대적 의미를 다룬 지은이는, 2부에서 다섯가지 질문을 통해 불평등의 실체와 현실에 조금 더 깊게 다가선다. 질문들은 다분히 직설적이다.첫번째 질문 ‘개천 용은 도움이 되는가, 방해가 되는가?’에서 지은이는 ‘유리 천장과 유리 바닥’을 언급한다. 유리 천장은 특히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막는 “가부장주의와 같은 문화적 측면”을 이르는 정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반면 유리 바닥은 “중산층 부모들이 자녀가 계층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는” 역동적 성격을 띤다. 중산층이 자녀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공들여 구축하는” 장치인 셈이다.202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9월 모의평가가 치러진 2일, 서울 양천구 종로학원 본원에서 재수생들이 OMR카드를 작성하고 있다. 연합뉴스이처럼 ‘피’를 강조하는 세계에서 개천의 용은 탄생하기 어렵다. 위에 있으면 아래로 내려가기 싫은 법. 사회이동성이 높은 사회는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많이 내려올수록 좋은 것”이지만, 이는 “급진적으로 사회구조를 변혁”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개천 용의 가능성을 역설하는, 역시나 기득권에 속한 사람들은 “급진적 변혁이 낳을 수 있는 갈등과 균열을 회피하고, 긴장을 봉합하기 위해” 하향 이동이라는 말을 절대 사용하지 않고 줄곧 상향 이동만을 강조한다.‘노동자를 존중하면 더 평등하게 분배할까?’라는 질문은 이 책의 핵심 주제와 잇닿아 있다. 지은이에 따르면, 분배는 “인정에 의해 판단할 수 있는 문제”이고, 현재의 재분배 상태는 “동료 시민에 대한 인정 방식”에 영향을 준다. “더러운 노동이나 힘든 노동”은 곧잘 “불명예스러운 일이라는 사회적 인식”을 깔고 있다.광고중요한 사실은 이런 노동을 하는 사람들로 인해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일에 열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남들이 꺼리는 일을 맡는 사람들을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 그것에 합당한 재분배는 언제나 중요하다. 지은이는 “타인의 처지에 대한 이해, 분배 결과에 미치는 여러가지 원인에 대한 고려, 이와 관련된 사회적 책임, 공동체 속에서의 협력”이 무엇보다 시급함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역설한다.두 질문 외에도 ‘평등이 왜 더 효율적일까?’, ‘가난은 누구의 책임인가?’, ‘평등은 왜 인정에서 시작되는가?’라는 질문을 앞세워 지은이는 노동이 존중받는, 결과적으로 평등한 세상이 가져야 할 미래상을 제시한다. 그 미래상은 ‘다음 세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책의 마지막 문단 중 한 대목에서 지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불안, 위험, 불확실성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할 아이들이 ‘누구나 존엄하고 품위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기 위해서는 데모크라시를 그 윤리적 방향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다.”장동석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