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구글 선호 매체 등록삼청교육대전국피해자연합회가 20일 오전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앞에서 연 ‘5사단 삼청교육대 일제사격 살상사건 증언 기자회견’에서 당시 삼청교육대 제3중대장이었던 한동철 예비역 중위(오른쪽)가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왼쪽은 기자회견을 주최한 삼청교육대전국피해자연합회 이만적(이적) 이사장.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광고문 : 1981년 6월20일 감호생 6명을 구타한 경위를 진술하시오.답 : 본인은 구타한 사실이 생각이 안 납니다. 근데 모르죠. 당시에 제가 성격이 급했으니까요.문 : 과거 수사기록에는 ‘고OO 소령이 감호생 6명을 옷을 벗겨서 엎드려뻗쳐를 시켜놓고 곡괭이 자루로 때렸고, 감호생 중에 한명이 항의를 하자 진술인이 달려가서 오른손으로 뺨을 때리고 다시 왼손으로 뺨을 때린 후 넘어지자 군홧발로 짓밟았다’고 되어있고, 당시 감호생들도 진술을 하고 있는데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인가요.답 : 예, 기억이 안 납니다. 그리고 옷을 벗겨서 때린 적은 없습니다.문 : 과거 수사기관에서 진술이 모두 거짓이었나요.답 : 과거 수사기록은 다 맞습니다. 단지 지금 기억이 안 날 뿐입니다.문 : 과거 수사기록에는 자세한 경위가 기록돼 있는데 지금 진술인이 당시 상황이 기억이 안 나는 거로 볼 때 당시 없는 사실을 진술인이 한 것으로 허위조작하고 당시 사건의 책임을 진술인이 뒤집어쓰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요.답 : 그런 일은 없습니다. 강제적으로 쓰라고 하거나 진술을 강요한 것은 없습니다.문 : 그럼 감호생을 때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답 : 제가 때렸다면 감호생이 규칙을 어겼거나 상관에게 대들었기 때문에 성질이 급했던 본인이 때렸을 것입니다.1981년 삼청교육 보호감호생들을 향한 발포에 참여했다며 최근 양심선언 기자회견을 하고 본인이 입은 피해를 호소해 관심을 모았던 전직 장교가 군 헌병대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 조사에서 사건 당시 감호생에게 폭력을 가한 사실을 인정한 것으로 확인됐다. 기자회견에서 폭행은 물론 의문사위에서도 조사받은 바 없다고 했던 이 전직 장교는 한겨레가 재차 사실확인을 요청하자 ‘문서 조작 가능성’을 제기했다.한겨레가 30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실을 통해 국가기록원에서 확보한 대통령 소속 의문사위의 진정인 및 참고인 10명의 진술조서를 보면, 5사단 36연대 전투지원중대 감호3중대장(중위)이었던 한동철(72)씨는 2002년 8월20일 의문사위 조사에서 “당시 사건의 충격으로 기억이 지워졌다”면서도 본인이 폭행을 인정한 5사단 헌병대 수사기록에 관해서는 ”다 맞다”고 말했다. 이어 조사관이 “5사단 수사기록에 자세한 (본인의 폭행 가해) 경위가 기록돼 있는데 사실이냐”는 취지로 질문하자, “제가 때렸다면 감호생이 규칙을 어겼거나 상관에게 대들었기 때문에 성질이 급했던 본인이 때렸을 것”이라고 답했다.한동철씨의 의문사위 조서 일부 내용. 자신이 감호생을 떄린 것에 대해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폭행 사실이 담긴 과거 헌병대 수사기록에 대해서는 “다 맞습니다”라고 인정했다. 조서에는 진술인의 간인이 찍혀있다. 국가기록원의문사위 조사에 응한 감호생 출신 복수의 참고인들도 “3중대장이었던 중위 1명이 연병장 상황실 앞에서 수련생(감호생) 1명을 군화발로 공차듯이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는 것을 보았다”는 등 한동철씨의 폭행 상황을 구체적으로 증언했다.광고한씨는 지난 20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앞에서 삼청교육대전국피해자연합회 주최로 열린 ‘1981년 5사단 삼청교육대 일제사격 살상사건에 대한 현장지휘관 공개증언 기자회견’에 참석해 언론의 큰 관심을 모았다. 삼청교육대 사건에 관한 군 지휘관의 첫 증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연대장과 대대장으로 이어지는 사격개시명령에 따라 본인도 발포명령을 내렸고, 사건 뒤 환영에 시달리고 좌천을 거듭하다 강제 전역당했다”며 진실화해위 19층 민원실에 진실규명 신청서를 제출했다. 진실규명의 범위에는 5사단 발포사건 전면 재조사와 함께 강제예편 등 본인 피해와 관련한 사항이 포함됐다.이날 기자회견에서 한동철씨를 대리해서 발언한 피해자연합회 윤태일 자문위원은 “의문사위 조사에 문제가 많다. 부대대장이었던 고아무개 소령의 진술에만 의존했고 한동철씨는 조사도 하지 않았다. 사망자가 1명이라고 하는데 신뢰할 수 없다. 재조사를 해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밝혀야 한다”고 했으나, 이는 실제 의문사위 조사결과와 상반되는 것으로 드러났다.광고광고의문사위 보고서에는 “2001~2002년 3중대장이었던 한동철씨와 대대장 윤아무개씨 등 5사단 관계자 25명을 비롯해 감호생·경찰·유족 등 75명을 조사했다”고 나온다. 감호생을 대동하고 경기 연천의 5사단 현장조사도 했다. 한동철씨는 이 조사보고서에서 폭행 사건으로 감호생들의 분노를 폭발시켜 집단항의와 발포의 직접 원인을 제공한 핵심 당사자로 등장한다.진술조서를 보면, 한동철씨는 2002년 8월20일 오후 2시부터 6시50분까지 4시간50분 동안 서울 종로구 수송동 이마빌딩에 있는 의문사위 조사실에서 5사단 사건과 관련한 조사를 받았다. 작성된 진술조서는 총 18쪽이며, 맨 끝에는 "조서를 진술자에게 열람하게 하였다”는 문구와 함께 진술자의 지장이 찍혀있다. 하지만 한씨는 의문사위 조사와 관련한 한겨레의 거듭된 질문에 “기억에 없다. 조사를 받지 않았다”고 했고, 본인 인적사항 등이 담긴 진술조서 일부를 확인한 뒤에도 “인적사항은 맞지만, 조서가 조작된 것 같다”고 말했다.광고육군 5사단 사건이란 1981년 6월20일 보호감호생 300여명이 담배와 술 반입 등으로 인해 장교들에게 폭행당하자 이에 집단항의하다가 저녁 9시께 경계소대 병력의 엠(M)16 소총 및 엠(M)60 기관단총 공격을 받은 일이다. 이로 인해 대열 앞에 있던 감호생 전정배(당시 29살)씨가 허벅지에 총을 맞아 후송 중 사망하고 송아무개씨 등 5명이 다리 관통상 등의 중상을 입었다. 의문사위 조사는 전정배씨 사망 진상조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1981년 5사단 36연대 삼청교육대 제3중대장이었던 한동철 예비역 중위(오른쪽)와 이만적(이적) 삼청교육대전국피해자연합회장이 20일 오전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5사단 삼청교육대 일제사격 살상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신청을 하러 이동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당시 5사단 내 감호생들은 1980년 8월부터 ‘불량배 소탕’을 명분으로 군부대에 설치된 삼청교육대에 끌려와 순화교육을 받고 근로봉사(강제노역)에 이어 사회보호법에 따른 별도 보호감호 처분으로 계속 군부대에 수용돼 있었다. 당시 민간인 3만9742명이 적법한 절차 없이 군부대에서 삼청교육 훈련으로 고통을 당했는데, 이중 5사단 피해자들처럼 사회보호법에 따라 감호처분까지 받은 사람은 7578명에 이르렀다.한씨는 20일 기자회견에서 당시 사건에 대해 “우발적 사고가 아니다. 전두환 신군부가 헌정 질서를 무너뜨리고 집권한 뒤 영장도 없이 수만 명을 체포하여 군대에 가두고 사람들을 짐승처럼 다루며 폭력을 행사한 삼청교육대 제도의 필연적 귀결이었다”고 했으나, 본인이 의문사위 조사에서 밝힌 폭행 사실과 이에 따른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한씨는 의문사위 조사에서 오히려 삼청교육대에 끌려온 이들에 대한 편견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한씨는 “본래 그들(감호생)은 깡패였다. 거의 다 깡패였고 몸에 문신에 칼자국이 험하게 새겨져 있었다”고 했다. 이에 조사관이 “감호생들이 전부 깡패였다는 것은 진술인이 확인한 사실이냐”고 묻자 “아니다. 그들의 눈빛이나 언행을 보고 알았다"고 했다. 대신 체포·구속영장도 없이 민간인을 삼청교육대에 보낸 행위에 대해선 문제를 지적하지 않았다.광고이밖에 한씨가 증언한 사건 경위나 본인 피해도 의문사 조사결과와는 거리가 있다. 그는 연대장-대대장-중대장 등으로 사격개시 명령을 받았다고 했으나, 경계소대장이었던 고아무개 중위는 “감호생들이 철조망을 넘어와 대치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본인이 사격명령을 내렸다”고 말했다. 당시 의문사위는 보고서에서 “감호생들의 행위가 폭동이나 난동이라고 보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야간이었다는 점, 많은 숫자의 감호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밀고 나와 집단탈주의 우려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설득이나 병력 증강에 의한 시위 억제 등의 노력 없이, 게다가 지회계통 역시 일개 소대장의 명령으로 바로 발포를 하였다는 것은 발포가 곧 인명 살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군의 과잉대응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발표했다.한씨가 진실화해위에 피해 규명을 주장하는 강제예편 역시 의문사위 조사 내용으로 비춰봤을 때 사실 여부가 불투명하다. 추가 사망자 발생 가능성에 대한 주장도 현재로써는 개연성이 부족하다. 한씨의 공개증언 기자회견을 주최했던 삼청교육대전국피해자연합회 이만적(이적) 이사장은 “내부 논의를 해서 한씨에 대한 입장을 정리할 예정”이라고만 했다.고경태 기자 k21@hani.co.kr
[단독] ‘삼청교육대 발포’ 양심선언 전직 장교…의문사위 조서에선 ‘감호생 폭행 인정’
문 : 1981년 6월20일 감호생 6명을 구타한 경위를 진술하시오. 답 : 본인은 구타한 사실이 생각이 안 납니다. 근데 모르죠. 당시에 제가 성격이 급했으니까요. 문 : 과거 수사기록에는 ‘고OO 소령이 감호생 6명을 옷을 벗겨서 엎드려뻗쳐를 시켜놓고 곡괭이 자루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