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구글 선호 매체 등록1960년대 중후반 이후 박래현의 작품에서는 서구 페미니즘 미술 1세대의 작품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여성의 전유물이던 태피스트리 작업을 하거나 작품 소재로서 여성성이 주요하게 다뤄졌다. 박래현의 ‘작품’, 1966~1967년, 종이에 채색, 169×135㎝, 뮤지엄산 소장광고우리 미술에서 ‘페미니즘’ 하면 쉬이 나혜석, 민중미술의 김인순, 윤석남 등이나 그 이후의 이불 등을 떠올린다. 하지만 박래현을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다. 박래현의 누락은 ‘페미니즘 운동’과 ‘페미니즘 미술’의 차이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됐다. 이는 우리 미술에서 페미니즘 미술 1세대의 존재를 생략하고, 박래현의 후기 작품이 가지는 1960~1970년대 서구 미술과의 동시성이라는 미술사적 의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게 했다.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여성의 참정권(투표권), 교육권, 재산권 등 남성과의 정치적·법적 평등을 주장한 여성 운동가들을 페미니즘 1세대라고 부른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한 나혜석은 이 페미니즘 1세대에 속한다. 하지만 나혜석은 자신의 주장을 글로는 발표했으나 화가로서 작품으로는 표현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활동을 페미니즘 미술 또는 그 선례로 읽을 수는 없다.페미니즘 ‘운동’과 ‘미술’의 차이일반 페미니즘 운동과 달리 페미니즘 미술은 남성중심적 미술사 체계를 폭로하면서 남성과 차별화되는 여성만의 원초적 경험(출산·자궁·월경 등)과 신체 이미지를 작품에 담고, 여성이 담당했던 태피스트리나 퀼트 등을 적극적으로 예술 영역으로 가져오며 1960~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당시에 루이즈 부르주아는 여성 신체와 경험을 가시화했고, 주디 시카고는 여성의 성기 모양을 형상화해 남성 위주 역사에서 소외됐던 위대한 여성들을 재조명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여성의 성기를 시각화한 조지아 오키프를 본인이 부인함에도 페미니즘 미술의 아이콘으로 대접했다.광고이들 1세대 작가는 경제적 여유를 기반으로 대학 교육을 받고 전업 작가나 교수로 활동할 수 있던 미국·유럽의 백인 중산층 여성이 중심이었다. 이들의 본질주의는 오히려 여성을 다시 규정된 틀에 가둘 수 있다는 점에서 다음 세대로부터 비판받았다. 이후 페미니즘 미술은 여성성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백인 중산층 여성의 한계를 지적하고 인종과 계급 등 여성도 개인마다 처한 조건이 다르다는 상호교차성을 강조했다.한국에서는 페미니즘 미술의 다음 세대가 등장한 이후 본격적으로 페미니즘 미술이 소개됐다. 이에 백인 부르주아 여성들이 여성성만을 강조한 페미니즘 1세대에 해당하는 작가나 작업을 발굴해 페미니즘 미술로 분류할 여지는 없었다. 따라서 박래현의 후기 작업이 1960~1970년대 미국 페미니즘 1세대가 보인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됐다.광고광고박래현은 부유한 대지주 가문 출신이자 경성여자사범학교,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지식인이었다. 또한 당대 최고의 화가인 김기창의 아내이면서 자신도 1956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와 대한미술협회전에서 연이어 대통령상을 받으며 화가로서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성공한 화가로서 그는 한국YWCA 활동을 통해 당대 한국 사회를 움직이던 김활란과 박에스더 등의 지식인들과 관계를 맺었다. 종종 글을 기고하는 작가로서 모윤숙 시인 등 여성 문인들과도 교류했다. 게다가 1964년 미국 국무부 초청 순회전시를 계기로 한국에 상주하던 미국 외교관 부인들이나 미 문화원 소속의 엘리트 여성들과도 교류했다.한마디로 박래현은 그 시절 남성과 동등한 지적·사회적 주체로 활동하던 한국 최고위 엘리트 여성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었고, 당대 여성지에 기고한 글에서 ‘가부장적 종속성에 대한 자각’과 ‘여성 주체성 확립을 향한 분투’를 주장했다. 그뿐 아니라 1960년대 중후반 이후 그의 작품에서는 페미니즘 미술 1세대의 작품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여성의 전유물이던 태피스트리 작업을 하거나 작품 소재로서 여성성이 주요하게 다뤄졌다.광고그의 1960년대 후반 추상화는 기하학적이지도 표현적이지도 않아 서구에서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것이다. 전통 한국화를 전공한 작가가 안료의 번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색을 오버랩시키는 추상은 오히려 유기적인 조직이나 생성을 연상시킨다. 박래현은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1967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여한 후 중남미와 미국을 여행하면서 서구 미술의 흐름을 목격했고, 1969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바로 태피스트리와 판화 작업으로 이행했다.그가 미국에 가기 직전인 1966년 미국의 저명한 미술비평가 루시 리파드가 기획한 ‘기이한 추상’ 전시는 당시 주류 남성 작가들의 차갑고 기하학적인 미니멀리즘에 반발해 유기적이고 생물학적이며 어딘가 불편하고 기이한 추상 작업을 선보였다. 에바 헤세는 실·로프·라텍스·천을 벽에 매달거나 바닥으로 축 늘어뜨렸고, 루이즈 부르주아는 남성과 여성의 성기, 자궁, 유방 등을 연상시키는 고무·라텍스를 조각해 사실상 이 전시가 페미니즘 1세대 미술의 전조 내지 시작임을 알렸다.박래현은 페미니즘 미술 1세대와 마찬가지로 대학 교육을 받은 부유한 지식인이었고, 당시 자기 영역에서 성공한 여성 엘리트들과 교류하며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전문인으로서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그는 여성의 전통적 영역인 태피스트리를 순수미술 영역에 가져오고, 그의 추상 작업에서 드러나는 유기적 이미지와 판화에서 시도한 여성의 성기와 자궁을 연상시키는 이미지, 그가 자주 사용한 ‘태고’ ‘근원’ ‘잉태’ ‘생’ ‘생명’ ‘창조’ 등의 제목에서 페미니즘 1세대 작가들의 본질주의적인 여성성을 작품으로 구사했다.박래현 후기 작업 재평가해야광고박래현이 미국 체류 시절 미국의 페미니즘 미술 1세대 작가들과 교류하거나 직접 그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해도 그의 사회적 지위나 작업 내용은 분명히 그 시절에 막 태동하던 페미니즘 미술 1세대와 일치하는 바가 있다. 따라서 박래현의 이 시기 작업을 페미니즘 미술 1세대 작업으로 분류할 때, 한국미술사에 페미니즘 1세대의 자리가 비로소 채워지고 박래현의 후기 작업이 당시 미국의 페미니즘 미술과 보이는 동일성 내지 유사성, 나아가 동시성을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근대작가 중에서 박래현은 아직 평가가 제대로 되지 않은 한국미술사의 한 구멍이라 할 수 있다.이승현 미술사학자 shl219@hanmail.net이승현은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증권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7년을 다니다 작은 금융자문회사를 차렸다. ‘선진’ 금융을 보급한다고 했으나 그 환상이 깨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 혼자 영국 런던의 내셔널갤러리와 호텔에서 2주가량 지낼 정도로 미술에 미쳐 미술사학과 대학원에 입학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다양한 전시를 기획한다.
주목받지 못한 ‘페미니즘 미술’ 1세대 작가 박래현
우리 미술에서 ‘페미니즘’ 하면 쉬이 나혜석, 민중미술의 김인순, 윤석남 등이나 그 이후의 이불 등을 떠올린다. 하지만 박래현을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다. 박래현의 누락은 ‘페미니즘 운동’과 ‘페미니즘 미술’의 차이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됐다. 이는 우리 미술에서 페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