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구글 선호 매체 등록생전의 반려견 길상이가 함민복 시인과 악수를 하고 있다. 시인이 마스크 차림인 것으로 보아 2021년 즈음으로 보인다. 길상이는 이듬해인 2022년 4월9일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 함민복 제공 광고함민복이 13년 만에 낸 시집 제목 ‘물빛인쇄소’는 강화도에 있는 펜션 이름과 같다. 시인이 혹시 상호를 표절한 것인가. 그럴 리가. 펜션 이름을 지은 이가 바로 함 시인이다. 강화 남동쪽 동막해수욕장 근처 양철 지붕 집에 혼자 살던 2006년 무렵이었다.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바다에도 나가고 술도 마시고 하던 그에게 새로 개업하는 펜션 주인들이 작명을 부탁해 왔고, 시인 특유의 감수성과 언어 감각으로 빚어낸 이름 가운데에 ‘물빛인쇄소’가 있었다. 시인이 이 제목으로 시를 쓴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시집에는 ‘물빛인쇄소’와 ‘물빛인쇄소 2’ 두편의 표제시가 실려 있다. 두 시에서 확인할 수 있는바, 물빛인쇄소란 강화 섬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이고 그 인쇄소에서 찍어내는 것은 빛과 사랑과 생명이다. “잔잔 잔잔 제 몸을 구부려/ 반짝 반짝 빛을 출력하는 바다// (…) // 눈물렌즈/ 사랑은 물빛인쇄소”(‘물빛인쇄소’)광고 “거의 다르고/ 조금 같은// 조금 다르고/ 거의 같은// 생명은/ 생명들은// 물빛/ 물빛인쇄소”(‘물빛인쇄소 2’ 전문) 눈물렌즈 장착한 물빛인쇄소는 그의 절창인 ‘눈물은 왜 짠가’를 떠오르게도 한다. 가난한 어머니의 안쓰러운 모정을 노래한 이 시는 숱한 독자들로 하여금 눈물깨나 흘리게 했던 터였다. 함민복 시의 열성 독자라면 ‘눈물은 왜 짠가’와 더불어 그의 또 다른 절창 ‘반성’을 기억할 것이다. “늘/ 강아지 만지고/ 손을 씻었다// 내일부터는/ 손을 씻고/ 강아지를 만져야지”라는 짧은 작품이다. 반려견 길상이와의 이야기를 담은 시인데, 새 시집에는 그 길상이의 다음 이야기도 들어 있어 반갑다.광고광고함민복 시인이 지난 25일 오후 서울 은평구 이호철북콘서트홀에서 열린 북토크가 끝난 뒤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하루 산책 걸렀다고 삐쳐/ 손 내밀어도 발 주지 않고 돌아앉는/ 길상이는 열네살” 이렇게 시작하는 시 ‘악수’에서 시인은 길상이의 질투심을 자극하고자 어린 단풍나무와 악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그런데 그의 눈에 이런 모습이 들어온다. “단풍나무는 세상 모두와 악수를 나누고 싶어/ 이리 온몸에 손을 달고/ 바람과 달빛과 어둠과/ 격정의 빗방울과/ 꽃향기와/ 바싹 마른 손으로 젖은 손 눈보라와/ 이미/ 이미/ 악수를 나누고 있었으니”광고 어린 단풍나무에게 오히려 악수하는 법을 배웠노라는 이 시는 시인에게 2020년 유심작품상을 안겼다. 그렇게 17년을 함께하다 몇해 전 떠나보낸 길상이의 죽음을 애도한 아래 시에는 ‘길상 아빠’ 함민복 시인의 부정이 애틋하다. “한평생 주인을 기다린/ 개가 죽어간다/ 죽음 속으로 들어가며/ 눈동자 단추 여며/ 반가움의 분수/ 꼬리가 멎고/ 이제야 목줄 풀린/ 기다림/ 한 덩어리가 죽어간다”(‘임종’ 전문) 길상이를 떠나보낸 뒤 시인 자신도 많이 아팠다. 2년 전 여름 호흡 곤란으로 병원을 찾은 그는 결국 관상동맥에 스텐트를 박는 시술을 했다. 결과는 양호했지만, 최악의 경우까지 각오했던 경험이었다. “컴퓨터에 마지막 인사말도 써놓고/ 그동안 썼던 시들도 다급히 정리해/ ‘삶과 죽음은 모래시계, 끝나지 않는 키스’라고 가제도 달고/ 집을 둘러보며 길고양이 물도 가득 떠놓았었지요”(‘왕관’ 부분)광고 이번 시집에는 실제로 책 제목이 될 뻔한 작품도 들어 있다. “삶 속으로 죽음이, 죽음 속으로 삶이/ 쏟아지게, 수없이 뒤집어보게 설계된/ 죽음과 삶은/ 모래시계”라는 대목에서 보다시피 삶과 죽음의 동행을 다룬 작품이다. 이것 말고도 시집에는 죽음을 노래한 시가 여럿이다. “애초 목적지를 등져본다/ 죽음도 이와 같아서/ 등지고 살아보나/ 결국 등지고 달려가는 것”(‘KTX 역방향을 타고 가며’), “다가올/ 죽음도/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란 훈수이런가”(‘노안’), “잠시 머물러 있음인/ 삶을 비춰주는 죽음 한그루”(‘죽은 나무’), “죽음은 멍키스패너, 삶을 조여주고 풀어준다”(‘공구함’) 등이 대표적이다.지난 25일 오후 서울 은평구 이호철북콘서트홀에서 열린 북토크 ‘문예북흥’에 참가한 함민복 시인이 13년 만의 신작 시집 ‘물빛인쇄소’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이호철북콘서트홀 제공 죽음을 다룬 여러 시 중에서도 연백댁의 마지막을 그린 ‘모시조개’는 뭉클하게 가슴을 울린다. 물때가 맞지 않아 다른 조개잡이꾼들이 없는 가운데 “뻘길 십리를 홀로 걸어 들어”간 그이는 평소처럼 “뻘 속에 발목을 묻고” 한참 조개를 잡던 중, 아차, 밀물에 갇혀 빠져나가지 못하게 된다. 죽음을 예감한 그이가 한 일은 무엇이었던가. 우선 “한평생 따라다니던 미안한 마음”을 담아 “고무 대야에 잡아놓은 모시조개를/ 사방에 흩뿌린다”. 이어서는 숭어 그물 매던 말뚝의 줄로 제 몸을 묶는데, 이때 그이가 선택한 방향을 보라. “혹시 초물에 들어오는 배가 있으면 손을 흔들어볼까 싶어/ 장봉도 쪽을 바라다보며 몸을 묶을까 하다가/ 돌아서 집이 있는 마니산 아랫마을을 향했다/ 객지에 나간 자식들, 시신이라도 찾아/ 먼 나중 마음이라도 편하게…” 이렇게 “스스로 하는 염습, 수직의 염습”을 마친 연백댁이 머리 위까지 올라온 물속에서 “꼬르륵!/ 모시조개처럼 숨을 쉬어”보는 장면으로 시는 마무리된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들을 생각하는 그이에게서는 자연스럽게 ‘눈물은 왜 짠가’의 어머니가 겹쳐 보인다. 앞서 언급한 ‘삶과 죽음은 모래시계, 끝나지 않는 키스’에는 ‘화살표를 위하여 2’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이 작품을 비롯해 시집에는 같은 부제의 연작시 10편이 실렸다. 시인에게 화살표가 중요한 화두임을 알겠거니와, “속도를 섬기는 신앙”(‘방향의 숲-화살표를 위하여 1’)이라거나 “단호한 사상으로 무장된 화살표”(‘삶과 죽음은 모래시계, 끝나지 않는 키스-화살표를 위하여 2’)와 같은 구절들은 화살표의 부정적 속성을 보여준다. 화살표와 함께 시인의 최근 관심사인 그물 또한 부정적이지만, “경계가 삶을 가두는 그물이 아니라/ 안전망이 될 수는 없을까”(‘제주행 비행기에서’)에서는 그물의 긍정적 가능성을 모색해 보기도 한다. 함민복 시인은 신작 시집 출간에 즈음해 지난 25일 오후 서울 은평구 이호철북콘서트홀에서 북토크 행사를 마련했다. ‘말랑말랑한 힘에서 물빛인쇄소까지’라는 이름으로 열린 이 행사에서 그는 “해월의 경물(敬物)과 의상의 화엄사상 등을 통해 그물의 긍정성을 찾아보려는 게 나의 최근 관심사”라며 “1996년 연고도 없던 강화도에 들어와 올해로 30년이 된 만큼, 이제는 강화도의 사건과 장소 등을 주역의 궤와 연결시키는 시를 써 보고 싶다”고 말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물빛인쇄소 l 함민복 지음, 창비, 1만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