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구글 선호 매체 등록 광고 안병욱 | 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 이제 마치는 글로, 나이 따라 흘러다니면서도 늘 어릴 적의 시골 아련한 기억으로 되돌아가곤 해서, 그 철모르던 시절의 회상을 속없이 떠벌리고 싶습니다.광고 고향 마을은 산으로 삥 둘러싸인 흔하디흔한 너비 1㎞도 안 되는 분지입니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식량을 대기에 부족하지는 않았던 듯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늘 “시집와 보니까 앞산과 뒷산 사이에 간짓대를 걸쳐도 될 것 같았다”면서 답답해하셨습니다. 생애 첫 기억은 6·25 와중에 집 마당에 들이닥친 ‘산사람’들로 소동이 일던 장면이고, 유년기 마지막은 6학년 때 4·19 항쟁 소식을 풍문으로 전해 들었던 때입니다. 중학교 진학 때까지 하룻밤도 마을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학교에 가려면 개울을 두번 건너야 했습니다. 다리는 없었고, 징검다리를 고학년이 어린 동생들 부축해 건너다녔으며, 비가 와 냇물이 불어났을 때는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하루 학업이 끝났습니다. 학교 파하면 애들하고 냇가에서 노닥거렸던 일이 가장 즐거웠는데, 한번은 깊은 물에 빠져 허우적댄 것을 형들이 뛰어들어 구해줬습니다.광고광고 봄가을에는 저보다 훨씬 영리했던 진돗개 혈통의 동무를 앞세워 산등성이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놀았습니다. 그 녀석은 온전히 내 몫이었고 이름도 로빈슨 크루소의 말벗인 앵무새 이름을 따 ‘보루’라고 불렀습니다. 산토끼 냄새를 쫓아다녔지만 매번 허탕 치다가 한번은 나를 멀찌감치 물러나게 한 뒤, 덤불 속에 숨어 있는 산토끼를 향해 낮은 포복으로 바람 반대 방향으로 기어가서는 순식간에 덮쳐 사냥에 성공했습니다. 그 녀석은 내가 중학교로 집을 떠난 사이 어른들의 흉악한 음모로 희생될 때까지 5년여 나의 절친이자 수종이었습니다. 들과 산에서는 찔레와 띠풀의 어린싹이나 산딸기 정금(머루) 맹감 등 입에 넣을 만한 것들을 훑었고 더러 빨치산 전투 흔적인 탄피와 실탄 뭉치들을 주웠습니다. 어른들의 주의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시절 내내 가장 유용한 장난감 재료였습니다. 학교 책 보따리를 집에서 푸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수업과 방학의 다른 점은 함께 놀 동무가 한동네 애들로 줄어드는지에 있었고, 무엇보다 방학 끝날까지 미룬 숙제 압박은 참 고통스러웠습니다. 다행히 마지막 날에 보다 못한 세살 위 누님이 늘 해결해주었습니다. 그때는 장래 희망이나 목표 같은 것의 개념도 의식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광고 그래도 산모퉁이 밖으로 기찻길과 정거장이 있어 도회지로 나들이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등하굣길에 기차를 마주칠 때는 모두 눈을 떼지 못하고 경이롭게 주목했습니다. 그 기차 덕분에 중학교부터 도시에 유학하면서 토·일요일마다 ‘집’에 다녀가곤 했습니다. 기차는 기적을 울리면서 산모퉁이를 돌아 긴 터널을 들고났습니다. 어느 기차도 정해진 시간표대로 다니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하루 십여차례 울리는 기적 소리로 시간과 때를 가늠하며 식사하고 일 나서곤 했습니다. 마을에는 옛날의 새댁들 몇분이 이제는 혼자인 할머니로 사시는데, 여전히 옛날 일 들먹이면서 반갑게 맞아주십니다. 또 사라진 것은 사시사철 바뀌는 ‘내깔’(시냇물)과 그 물길을 따라 노닐던 생명들입니다. 농지개량 사업에서 냇물이 직선으로 재단되면서 굽이쳐 생겨난 미역 감을 웅덩이는 없어지고 정든 진귀한 바위들은 파헤쳐져 실려 나갔습니다. 지금 냇가 기슭은 시멘트 아니면 철망으로 덮였고 바위 틈새를 맴돌며 노닐던 물고기들은 떠나버렸습니다. 한번은 동무들과 ‘여름감’ 서리에 나섰습니다. 한번도 구경한 적이 없는 여름감에 대한 부푼 기대를 안고 밭에 살금살금 기어가 대여섯개씩 따 움켜쥐고는 내달려 으슥한 곳으로 숨어든 뒤 모두가 전리품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한입 가득 깨물었습니다. 아, 그런데 생긴 것은 단감과 닮았는데 시큼하고 쓰디쓴 것이 감은커녕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헛된 정보를 가져온 녀석은 군밤 세례를 면하지 못했지요. 그것이 토마토였다는 것을 아는 데 한 삼년은 걸린 것 같습니다. 시골에서 내 기억 속의 가장 신비스러운 장관은 초겨울 해 질 녘 까마귀들의 군무입니다. 당시는 가을걷이 뒤 이모작 농사로 대부분의 논에 보리 파종을 했습니다. 12월 초 보리 싹이 파릇하게 돋을 무렵이면 수천마리 까마귀가 집 앞 논에 새까맣게 내려앉아 씨앗들을 파먹곤 했습니다. 그러다 해가 기울면 까마귀들은 일제히 날아오르기 시작하는데 빙글빙글 나선형으로 돌면서 위로, 더 위로 날아올랐습니다. 마침내 저 높이 까만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날아오른 뒤 갑자기 천둥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논바닥을 향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습니다. 바닥에 내리꽂힐 순간에 다시 솟구쳐 오른 뒤 산 너머로 날아가곤 했습니다. 이런 자연을 어디서 다시 마주할 수 있을까요.광고 나에게 동네 어른들은 평생 고맙고 훌륭한 스승이었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별별 귀찮은 질문에 언제나 따뜻이 설명해주셨습니다. 동네 어른들은 농번기가 끝난 겨울밤이면 사랑방에 청년부터 쉰살 어른까지 빽빽이 둘러앉아 두어시간 이야기꽃을 피우다 흩어지곤 했습니다. 나도 겨우내 한구석에 끼어들었습니다. 라디오 같은 오락 기구는 구경도 못 한 시절, 방안은 담배 피운 것인지 종이 태운 것인지 뒤섞인 연기로 가득 차 호롱불은 더욱 희미해지는 가운데 누군가 꺼낸 얘기들은 내용보다 끼어들기 참견 핀잔이 더해지면서 공방이 일고 흥미를 더했습니다. 나에겐 얘기들의 실재 여부야 어떻든 재미있고, 호기심 일게 하는 사랑방이었습니다. 나는 그 옛날을 생각하면서 닦달한 고향집에 가끔 며칠씩 머뭅니다. 집을 감싼 대나무 숲에서 밀려드는 바람을 맞으려 창문을 열어둔 채 잠들곤 합니다. 그러던 어느 풀벌레도 사라진 초겨울, 바람도 멎어 대숲까지 고요한 첫새벽에 생전 처음인 미세한 소리가 스며들었습니다. 소리라기보다 몸이 먼저 알아채고 마음이 뒤따라간 느낌이라고 해야겠네요. 동이 트는 순간의 떨림인지, 지구가 도는 울림인지, 아니면 해가 떠오르고 어둠이 사라지는 소리인지. 그렇게 시골집에 누워 ‘동트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아가 세상이 환해지는 소리도 듣고 싶습니다. 제 칼럼들을 3년간이나 양해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