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 - 장남수 노동의 문장] 30화 글쓰기의 시간‘씨알의 소리’ 1978년 1월호 표지와 필자의 글이 실린 지면 사진. 장남수 제공 광고 고백하듯 이 지면의 마지막 글을 써봅니다.광고 칼럼이 실린 날이면 귀가 쫑긋해집니다. 아침 일찍 전화를 걸어와 먹먹해 하는 어른, 매주 잘 읽었다는 격려의 문자를 보내주거나, 꼼꼼한 감상을 보내주는 분, “내 이야기 편하게 써도 돼, 믿으니까”라 말해 준 동료, “현장의 생생한 소리, 역시 현장이 답이다” 힘을 실어 주는 분들 덕입니다. “작가님이 이렇게 그때의 진실을 밝히듯이 그 역사는 또 다른 모습으로 길이 남게 될 것입니다. 애쓰셨습니다”라는 댓글로 펜 끝을 더욱 다잡게 한 독자들도 있었습니다.광고광고 특히 공감해 주어 고마웠던 때는 원풍모방 노조 9·27 사건(1982년 국가의 노조 파괴 사건) 관련 칼럼이었습니다. 쓰면서 가장 많이 숨을 몰아쉬었고, 수십번을 되뇌어도 아린 장면들이 독자에게도 닿기를 바랐습니다. 1978년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똥물 테러’에 항의했던 연대 시위로 나를 비롯해 여섯명이 구속된 ‘부활절 사건’ 글이 나갔을 때는 남영나일론에서 일했던 한 선배가 아침 일찍 문자를 전해왔습니다.광고 “당시 문래동 법원에서 열린 너희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공장에 거짓말하고 휴가를 냈어. 그때 약혼 상태에서 구속된 ○○의 어머니에게 크게 혼나며 무조건 사죄도 드렸지. 네 최후진술 들으면서는 많이 울었어.” 나는 법정에 서 있었다지만 법정 밖에서 어렵게 휴가를 내서 재판을 방청해 주고 구속자의 부모에게 대신 혼이 나며 동료를 지킨 사람들이었지요. 내가 아는 범주, 경험한 이야기만 쓰고 있지만 문장이 되지 않은, 잘 보이지 않는 역사는 다 어찌할까, 싶어졌습니다. 나의 글이 최초로 공개 지면에 게재된 건 1977년 원풍모방에 갓 입사한 열아홉살 때였습니다. 정권 탄압으로 광고를 싣지 못해 뒷장이 하얀 백지로 나오던 재단법인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월간대화’를 접했습니다. 그 책을 통해 눈앞에 보이는 세상이 다 진실이 아님을 깨닫게 된 나는 공장의 모든 풍경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현장 풍경과 동료들 이야기를 써서 투고했지요. 노동조합의 권장 도서로 많이들 읽던 그 책에서 ‘W모방 노동자’가 쓴 글을 발견한 노조 간부 누군가가 찾아왔던 기억이 어렴풋합니다. 글 좀 쓰는 노동자라는 걸 주변에서 알게 되면서 어느새 역할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은 기독교회관에서 매주 열리던 시국기도회의 기도를 맡게 되었지요. 그날 단상에서 내려오자 바로 기자가 다가와 ‘씨알의 소리’에 싣고 싶은데 읽은 기도문을 줄 수 있느냐고 하더군요. 그때 옆에서 또 다른 기자가 물었습니다. “혹시 ○목사가 써 준 거 아닌가요?” 나는 좀 발끈했으나 아무튼 ‘씨알의 소리’ 1978년 1월호에 실렸습니다. 두번째로 글이 공개 지면에 실린 때입니다. 공장 다니는 여자애가 글을 쓴다는 걸 사람들은 잘 믿지 않더군요. 노동자가 가물에 콩 나듯 쓴 글은 에세이나 문학이 아니라 ‘수기’라 했습니다. 광고 차이가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꼭 그렇게 노동자 수기, 농민 수기, 빈민 수기라고들 하는군요. 구분이 필요할까요? 노동자의 글에 대한 식자층의 인식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심의 과정에서 내가 쓴 경위서를 읽은 조사위원이 “이건 누가 써 준 거죠?” 묻기도 했으니까요.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몇권의 책을 내고 이런저런 매체에 글을 써오는 동안 내 글을 눈여겨보거나 인정해 준 사람은 또 대개 지식인이었습니다. 정작 노동자 동료들은 책을 접하기 어려운 조건이거나 무심하니 그게 참 쓸쓸하기도 합니다. 수십년 전 원풍모방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 중 많은 이들은 지금도 “노조 사무실에 책이 많아서 좋았다” “지부장이 언제든 노조 사무실에 와서 편하게 책 읽어도 된다, 빌려 가서 읽고 와도 된다고 해서 정말 기뻤다” 말합니다. 노조 사무실 한칸 벽은 키 큰 책장이 빼곡했고 도서 대출 카드가 놓여 있었습니다. 누가 무슨 책을 빌려 갔는지를 흘끔거리는 재미도 있었지요. 세계적인 문학작품은 드물었지만, 좋은 책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노조가 파괴된 후의 삶은 글을 쓸 여력이나 기회 자체가 없었습니다. 노조 없는 공장은 너무 열악했고, 노동운동 현장은 너무 치열해, 사건이 아닌 사념을 쓰기는 어려웠거든요. ‘여성이 소설을 쓰려면 연간 500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 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방’은 아득하기만 했습니다. 조부모부터 삼대의 식구들이 두개의 방에서 조롱조롱 살던 어릴 때는 농사에 지친 식구들이 잠든 시간 호롱불을 책으로 가리고 서서 읽다 보면 기름 떨어진 심지가 파들대다 꺼져버리곤 했습니다. 열세명이 한방에서 생활하며 시간 맞춰 전깃불을 끄는 기숙사, 미어터지는 출퇴근에 시달리며 야근과 휴일 특근을 마친 자취방은 밥해 먹을 기운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노동자가 가난한 노동자와 결혼해 아이 낳아 키우고, 새벽부터 일하러 나가거나 집안 살림을 하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이란 얼마나 가능한 것일까요? 2025년 4월 제주문학관에서 제주 4·3 평화상 수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오른쪽)와 필자. 장남수 제공 은어가 뛰놀던 고향의 강물에서 싹튼 내 글쓰기의 씨앗은 원풍노조라는 공동체의 가치와 양분으로 자랐습니다. 공장의 소음과 기름, 먼지와 기계의 밤을 견디게 했던 자긍심과 우정 동지애의 경험은 처절하면서도 치열하고, 서러우나 반짝이는 그 무엇으로 각인되었습니다. 늘 그 ‘무엇’을 쓰고 싶었습니다. 고맙게도 ‘마감 있는 작가’가 되어 7개월을 보냈습니다. 작년 가을, 신문사에서 칼럼 청탁 전화를 받았을 때 몹시 놀랐으나 청탁의 이유에 공감해 용기를 내면서 한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지난해 봄 ‘제주 4·3 평화상 수상 작가 초청’ 시간에 만난 이는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러시아어로 글을 쓰는 벨라루스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였습니다. ‘목소리 작가’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그가 이날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며 소개한 사도 바울의 성서 한 구절이 맴돌았습니다. “듣지 못하는 시대도 있다. 공허히 외치는 시대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치는 걸 멈추지 말아야 한다.” 매주 글이 나가는 동안 긴장과 두려움을 넘어 더 열심히 써야 할 이유가 점점 명확해졌습니다. 어느 작가가 한 말처럼 나에게는 ‘이전에 써온 글이 고백이었다면, 이번의 칼럼은 소명’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칼럼을 통해 원풍노조를 알게 되었다는 사람이 많아져 기쁩니다. 사실 대단한 통찰이랄 게 없는 글로 익명의 신문 독자를 만나는 일은 설레고도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거듭 밝히는 바이지만 나의 삶이 대단하거나 특별하지 않습니다. 훨씬 더 치열하게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빛도 없이’ 곧게 걸어온 선배 동료들이 많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고공의 철탑이나 시멘트 바닥에서 수백 수천의 밤을 넘기며 분투한 후배 노동자들의 현장을 떠올리면 내 이름으로 책상 앞에 앉아 뭘 내놓는 게 민망할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그간 써온 글의 힘이 밀어주어 여기서 또 독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읽어주신 독자들, 일곱달 동안 귀한 지면을 내어 준 한겨레와 응원 보내준 동료 선후배들께 깊은 고마움을 전합니다. 아울러 혹여 오류가 있었거나 불편함을 느낀 지점이 있다면 나의 역량 탓이니 아량을 바랍니다. 가끔 가만히 읊는 고려 시대 문인 이인로 선생의 문장 하나를 떠올리며 이 지면의 마지막 인사를 드립니다. “이 세상 모든 사물 가운데 귀천과 빈부를 기준으로 높고 낮음을 정하지 않는 것은 오직 문장뿐이다.” (끝)2025년 10월 제주도 달리도서관에서 열린 필자의 에세이집 ‘노동의 시간이 문장이 되었기에’ 북토크 모습. 장남수 제공 장남수 | 경남 밀양 출생. 1958년생으로 열여섯살부터 공장에서 일하며 신정야학에서 공부했다. 원풍모방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해고된 뒤 노동운동을 하며 글을 써왔다. 늦깎이로 검정고시를 거쳐 성공회대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제주도에 살면서 걷고 배우며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1984년 ‘빼앗긴 일터’를 시작으로 ‘빼앗긴 일터, 그 후’ ‘파문’ ‘노동의 시간이 문장이 되었기에’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