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구글 선호 매체 등록[길을 찾아서 - 장남수 노동의 문장] 29화 원풍노조 동료 이야기 두번째10대 시절 나영금씨(오른쪽). 나영금 제공 광고광고 용역업체를 통해 ㅅ대학병원 장례식장 일 시작한 건 10년 됐지. 그전에 나 목욕탕에서 오래 일한 건 알지 언니? 목욕탕 세신 일이 수입은 괜찮았지만, 힘도 들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상대하는 거라 좀 답답하기도 했어. 장례식장은 사람 관계가 훨씬 넓고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어서 좋아. 내가 덜렁덜렁 사람들과 잘 지내는 편이지만 저게 아닌데 싶으면 또 못 참고 불쑥 뱉어 곤란한 적은 있어. 원풍모방 노조 시절과는 또 다른 상황인데 입을 가만히 두지 못해서.광고광고 근데 언니, 나 이 일 천직인 거 같아. 너무 잘 맞는 거야. 정년까지 2년 남았는데 진짜 아쉬울 거 같아. 아직 한참 더 일할 수 있는데…. 장례식장은 아침 6시부터 오후 3시까지 한 조가 마치면 다음 조가 이어받는 3교대 근무야. 우리 원풍모방 일할 때도 3교대였잖아. 그땐 10대였는데 지금은 60대 후반에 접어들었네.광고 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15살에 서울 노량진 원풍모방 계열 공장에서 기술을 익혀 정식 기능공으로 입사했어. 또래 양성공(신입사원)들이 물주전자 들고 다닐 때 나는 당당히 방직기 앞에 서 있었지. 당연히 임금도 더 받았어. 먼저 원풍모방에 다니던 우리 언니가 지독하게 모으고 나도 원풍 신협에서 퇴직금을 담보로 대출받아 미아리 산꼭대기에 집을 샀어. 지금 그 집에서 92살 된 우리 엄마를 낮에는 언니가 돌보고 저녁엔 내가 이어받으며 기저귀 갈아드리고 살아. 요양원에 모시려고 몇번 눈물 빼며 시도해 보다가 결국 못 했어. 아무튼 1970년대 이 집에서 원풍모방까지 출퇴근하려면 아침 조일 때는 새벽 첫 버스를 타야 했고 밤 10시 퇴근 때는 통금이 아슬아슬했어. 주소지가 서울이라 기숙사 입소가 어렵기도 했지만, 집 두고 왜 기숙사 가냐고 언니가 말려서 기숙사 추억이 없는 게 아쉬워. 원풍노조 시절은 생각만 해도 벙긋벙긋해. 내가 이렇게 덜렁거려도 책을 무지 좋아해. 노조보다 책장이 먼저 눈에 들어왔어. 오후 2시 퇴근하면 점심 먹자마자 바로 노조에 갔어. 식당 옆이 노조 사무실이라 더 좋았지. 책장을 쓱 훑어 한권을 뽑아 들면 다 읽을 때까지 앉아 있었어. 방용석 지부장님이 매일 와서 책 봐도 된다고, 적어 놓고 빌려 가도 된다고 하시는데 행복하더라고. 내가 밥 많이 먹는 거 원풍노조 사람들은 다 알잖아. 그런데 책 들고 앉으면 밥을 잊었다니까. 노조에서 20권짜리 ‘대망’을 빌려와서도 열흘 만에 다 읽었어. 사실 무협 소설을 좋아했는데 노조에 그런 책은 없었어. 물론 소그룹 활동도 신나고 산으로 바다로 놀러 다니는 재미도 쏠쏠했지.광고 어느 해 여름휴가 때 우리 또래 여덟명이 대천 해수욕장으로 피서를 갔어. 텐트를 쳐 놓고 물에 뛰어들어 놀다 지치면 텐트 안에서 노래 부르고 놀았어. 나는 ‘스잔나’ 노래를 좋아했어. ‘해는 서산에 지고 쌀쌀한 바람 부네 날리는 오동잎 가을은 깊었네~’ 그 노래 언니도 알지? 내가 또 그렇게 서정적인 노래 좋아해요. 그때 어쩌다 보니 가까운 텐트의 남자들 셋이 합석해서 저녁을 먹게 된 거야. 한 남자가 나한테 쪼매 관심이 있었는지 옆에 앉아 자꾸 말을 걸어. 근데 남들이 밥숟가락을 다 놓았는데도 나는 숟가락을 안 놓고 제일 큰 코펠에 잔뜩 담은 밥을 먹어 치우는 걸 보더니 놀랐나 봐. “아이고, 나는 영금씨 못 먹여 살리겠네.” 이러고 너스레를 떨더라고. 하하 들은 척도 안 하고 싹 비웠지. 그런 내가 1982년 9·27 사건 때(국가권력이 원풍모방 노동조합을 파괴한 날) 닷새나 단식농성을 한 건 기적이야, 언니. 단식농성 중에 내가 자꾸 먹는 이야기를 해서 면박을 받기도 했어. 사흘쯤 굶었을 때인가? 우리 공장 길 건너에 삼우치킨이 있었잖아. 옆의 누군가한테 그 가게 통닭 이야기를 했더니 막 핀잔을 주면서도 푹 꺼진 배를 움켜쥐고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니까. 내 별명이 ‘닭 한마리’였어. 웬만한 통닭 한마리 정도야 게눈 감추듯 해치웠거든. 그런 내가 닷새를 버티다니! 혼자였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어. 40년이 지난 얘기잖아요. 두들겨 맞고 끌려 나오고 한 건 흐릿해져도 배가 너무 고팠던 기억은 생생하다니까. 아참, 웃기는 일도 있었어. 우리 해고된 뒤 복직 투쟁 시위를 기획한 날이었을 거야. 아침 일찍 운동화 딱 신고 집 밖으로 나가는데 뒷집 아저씨와 또 다른 한 남자가 앞을 막아. 뒷집 아저씨가 형사였거든. 오늘은 무조건 자기들과 같이 있어야 한다는 거야. 도리 없이 차에 실려 돌아다녀야 했어. 점심때가 되어 식당에 가는데 보니 소고기를 파는 집이야. 이왕 이렇게 된 것 실컷 먹어 주자, 작정하고 제비추리를 배가 터지지 않을 만큼 먹었어. 내가 어디서 그런 고기를 먹어보겠느냐고. 속으로 놀랐을겨, 크크. 그날 이후 소고기는 언감생심, 목구멍에 풀칠해야 하는데 취업이 안 되잖아. 그놈의 블랙리스트가 온 공장에 뿌려졌으니. 지쳐서 대충 결혼했는데 불행했어. 네살 된 딸아이 손을 잡고 무작정 집을 나왔는데 막막해. 명환이네 가서 보름, 점옥이네 가서 또 며칠, 골고루 돌아다니며 죽치고 버텼어. 염치도 팽개치고, 나 그러고 살았어. 기댈 곳이 원풍 친구들밖에 없더라고. 이 친구들이 그걸 또 받아주네. 그래서 나는 친구들 일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달려가. 점옥이가 애 낳았을 때 산후조리도 내가 해줬어. 딸? 그때 이 집 저 집 데리고 다닌 그 애가 지금 너무 잘하고 살아. 토스트 가게 하면서. 우리 모임 할 때 내가 들고 간 토스트, 그게 우리 딸이 이모들이랑 드시라고 새벽에 만들어 준 거야. 엄마 노후는 내가 책임질 거니 걱정하지 말라고 해. 지금은 먹고사는 걱정은 없어. 내가 잘 먹기도 하지만 친구들이 맛있게 먹는 게 좋아서 원풍동지회가 ㅅ빌라에서(한겨레 3월31일치 24면, 16화 ‘사람이 존중받는 세상’…44년 차 빌라 ‘101호’의 꿈) 모일 때면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미 주방에 가 있었어. 밥하는 일이 나는 기쁘고 고마워.6월 현재 60대 나이로 장례식장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나영금씨. 나영금 제공 장례식장에서 일하다 보니 죽는 사람이 날마다 들어오는데 서울의 거리는 인파로 넘치고 아파트가 하늘 높이 빼곡한 게 때로 참 이상하고 무상해. 일하다 좀 틈이 날 때면 빈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가만히 봐. 사연도 경우도 다양하고 슬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데 십년을 반복하네. 동료들은 냄새도 나고 무섬증이 난다며 창고에 물건 가지러 가는 일을 꺼려. 그러면 내가 가져올게, 하고 가. 특히 오래 일한 사람도 고인의 주검에 마지막 인사를 하는 발인 장소는 무섭다며 뒷정리 일을 피하려고 해. 나는 그냥 안녕, 이제 편히 쉬시오, 하는 마음으로 인사해. 내가 간이 좀 큰지, 나름 산전수전 공중전 겪은 덕인지 모르겠으나 산 사람이 무섭지, 죽은 사람 무슨 짓을 하겠는가 싶어. 사람들이 나보고 일을 빨리빨리 하는 사람은 아닌데 느릿느릿하면서 할 거 다 한대. 하하 여기 일하며 서비스노조 분회 노조원이 되었어. 간호사들이나 직원 가운데 민주노총에 속한 조합원들도 더러 만나게 돼. ‘노조’ 소리만 귀에 들려도 무지 반갑지. 어느 날 회식하다 내가 원풍 이야기를 했어. 그러자 몇사람이 반색하는 거야. “아, 그 전설 같은 원풍노조 사람이냐?” 하며 나를 다르게 대해. 따로 찾아와 그때 이야기를 해달라는 사람까지 있어. 기분 좋더라, 반세기 전의 자부심이 다시 살아나더라고.2023년 5월 원풍모방 노조 동료들의 서울 북촌 나들이 모습. 앞줄 앉은 사람들 중 오른쪽에서 두번째 빨간 점퍼 입은 이가 60대가 된 나영금씨, 앉은 사람들 중 왼쪽 첫번째가 필자. 장남수 제공 사느라 고생했을 사람이 이승을 떠나는 마지막 밥상을 차리는 일이 나한테는 의식이나 소명 같기도 해. 죽음은 이제 그저 익숙한 일상이 되었어. 사는 날까지 욕심부리지 말고 우리 친구들과 즐겁게 살고 싶어. 장남수 | 경남 밀양 출생. 1958년생으로 열여섯살부터 공장에서 일하며 신정야학에서 공부했다. 원풍모방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해고된 뒤 노동운동을 하며 글을 써왔다. 늦깎이로 검정고시를 거쳐 성공회대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제주도에 살면서 걷고 배우며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1984년 ‘빼앗긴 일터’를 시작으로 ‘빼앗긴 일터, 그 후’ ‘파문’ ‘노동의 시간이 문장이 되었기에’ 등을 썼다.
원풍공장 ‘밥보’ 나영금의 단식투쟁…그 힘으로 인생을 건너왔다
[길을 찾아서 - 장남수 노동의 문장] 29화 원풍노조 동료 이야기 두번째 용역업체를 통해 ㅅ대학병원 장례식장 일 시작한 건 10년 됐지. 그전에 나 목욕탕에서 오래 일한 건 알지 언니? 목욕탕 세신 일이 수입은 괜찮았지만, 힘도 들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상대하는 거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