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읽어드립니다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0:00[길을 찾아서 - 장남수 노동의 문장] 24화 민주노조 운동과 연대의 등대1980년 2월 설 명절에 원풍모방 기숙사에서 귀성하지 못한 조합원들을 위한 잔치가 열린 가운데 크리스챤 아카데미 간사로 노동 분과 교육을 담당했던 신인령 선생(윗줄 맨 왼쪽)이 방문해 필자(윗줄 왼쪽에서 두번째) 등과 만나고 있다. 필자 제공 광고 광고 얼마 전 모임 참석차 나선 서울 방문 일정에 마음먹고 이틀을 더 잡았다. 몇년 사이 우리 사회의 큰 어른들이 유명을 달리하면서 어른이 그리워졌기 때문이다. 공항에서 직행해 종로구 사직단 옆 신인령(83·이화여자대학교 전 총장) 선생 댁으로 향했다. 만면에 웃음을 품고 포옹하는 선생님 댁 현관 안에 가방을 던져두고 또 한분 어른을 마중하러 지하철역으로 달렸다. 원풍모방 노조 조직부장 출신 이필남(77) 선배가 손수 지은 찰밥과 나물, 밑반찬들을 바리바리 눌러 담아 버스와 지하철을 바꿔 타며 메고 온 커다란 가방을 받아들었다. 직접 차린 밥 한번 대접하고 싶다는 뜻을 말리지 못한 보따리였다.광고광고 선배는 원풍노조 고 방용석 지부장, 박순희 부지부장 등과 함께 민주노조 기초를 다진 인물이며 노조 탈춤반 결성을 주도하고 고문 일을 맡아 헌신적으로 지원했다. 선배가 결혼한 뒤에는 탈춤반 친구들이 식기 세트를 들고 신혼집으로 몰려간 적도 있다. 배고프다는 내 성화에 선배는 앉을 새도 없이 선생님 댁 주방에서 가스레인지를 켜고 준비해 온 재료로 뚝딱 국을 끓여냈다. 내 집처럼 거침이 없었다.광고 책상으로 쓰는 탁자를 비집고 의자를 끌어와 옹기종기 둘러앉았다. “배추가 달아 물김치가 맛나고, 이건 죽순을 볶은 거고,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맛있다.” 연신 설명하는 선배에게 “본인이 만든 음식을 본인이 맛있다고 하는 이 사람….” 선생님이 깔깔 웃으셨다. 그게 선배다. 허세 같은 건 손톱만치도 없고 개의치도 않고 그저 사람들을 챙기는 게 좋을 뿐인 선한 오지랖. 나 같으면 한끼 사 먹고 말지 엄두를 내지 못할 수고를 자청하며, 손수 지은 밥을 먹이는 게 큰 의미인 분이다. 1984년 창립한 노동운동 단체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노협) 사무실에는 김지하의 시 ‘밥은 하늘입니다’ 액자가 걸려 있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시 구절 아래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밥을 나누었다.광고 어릴 때의 고향 마을은 동네에 누군가 결혼해 새 식구가 들어오거나 멀리 객지로 떠나는 이가 있으면 더운밥을 지어 대접했다. 밥을 나누는 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요즘 같은 때는 또 그만큼 관계들도 멀어지는가 싶다. 이런 시대에 밥 나눌 기회를 잘 만드는 선배는 영원한 조직부장이 아닐 수 없다.1980년 3월1일 정월 대보름을 맞아 경기도 용인 한국민속촌에서 필자(왼쪽)와 당시 원풍모방 노조 조직부장이었던 이필남 선배가 나들이 간 모습. 필자 제공 즐겁게 음식을 나누었으나 돌아서는 걸음이 헛헛했다. ‘5분을 걸으면 어디에든 앉아 5분을 쉬어야만 해’서 외출을 거의 안 한다는 신인령 선생의 얼굴이 걸음을 더디게 했다. 선생님은 “이제는 많은 이름을 잊었는데도 칠팔십년대 함께한 노동자 동지들 이름은 잊지 않았다” 하셨다. 이화여대 법대 출신인 선생은 학생운동을 하다 졸업 뒤 경동교회 고 강원용 목사가 중심이 되어 1965년 설립한 ‘재단법인 크리스챤 아카데미’ 간사로 일했다. 교회, 여성, 학생, 산업(노동), 농촌사회 5개 분야에 담당 실무자를 두고 리더십을 키워내려는 중견 집단 육성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선생이 맡은 분야가 노동 분과였다. 교육은 기수별 4박5일 일정으로 진행된 뒤 각자의 일터로 돌아가 현장 활동을 한 다음 2차, 3차로 연결하는 방식이었다. 원풍노조뿐 아니라 많은 활동가가 이 교육을 이수했고 여성, 농촌 등 사회 각 분야의 훌륭한 리더를 배출했다. 동시에 ‘월간대화’를 발행해 언론이 외면하는 진실을 드러냈다. ‘월간대화’는 원풍모방에 입사하기 한해 전 열여덟의 나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애석한 건 원풍노조에 우뚝한 선배 활동가들이 너무 많아 새카만 후배인 나에게는 기수별 교육 기회가 오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차례는 한참 남았는데 유신정권이 1979년 3월 크리스챤 아카데미를 용공 좌경으로 몰아 산산이 깨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노동 분과 간사였던 신인령 선생을 비롯해 실무진들이 연행되고 원풍노조 박순희 부지부장, 와이에이치(YH)무역 최순영 지부장, 동일방직 이총각 지부장 등 노조 간부들도 연행되었다. 하지만 아카데미 간사들이 혹독한 고문을 감내하면서도 노조 간부들을 지키기 위해 애쓴 덕에 이들은 구속을 면했다. 아카데미 간사들은 징역 5년 등 중형으로 구금되었고, 1980년에 일부가 무죄나 집행유예 등으로 풀려났다. 신인령 선생은 원래 원풍노조의 최고 인기 강사였다. “여러분, 노조 대의원이 되어서 떨린다고 하셨지요? 민주노동운동을 해나가야 할 대의원들이니 당연히 새로 시작하는 긴장과 떨림을 유지해야 합니다.” 1978년 교육 시간에 선생이 강조한 ‘떨림’의 의미를 살면서 종종 생각한다. 한국노동법학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선생이 2002년 이화여대 총장이 되었을 때, 덕분에 이대도 가 보고 퇴임식 때는 두꺼운 저서도 받아왔다. 오래된 사진첩 속에 선생이 원풍노조의 명절 잔치에 초대 손님으로 참석한 모습이 보인다. 1980년 초 감방에서 석방된 직후이니 모두 반가워 난리가 났었다. 그날 누군가의 색동 한복을 빌려 입고는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 제비처럼 입을 벌리고 앉은 스물두살 내 모습이 간밤의 꿈 같다. 당시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지도력 강화 교육이나 도시산업선교회의 활동가 양성 프로그램들은 노동자들이 서로의 생각과 어려움을 털어놓는 장이자, 논의를 모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었다. 콘트롤데이타, 반도상사, 와이에이치무역 등 민주노조들의 연대가 활발했던 주요 매개가 크리스챤 아카데미, 도시산업선교회, 가톨릭노동청년회(JOC) 등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1980년대 중반께 노동운동 발전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내는 장면. 후일 김대중 정부 때 노동부 장관이 된 고 방용석 원풍모방 노조 지부장(앞줄 오른쪽 세번째)도 참석했다. 필자 제공 한편 노동조합이 어용이거나 미조직이었던 남영나일론, 해태제과, 롯데제과, 대일화학, 방림방적 등의 노동자들은 탄탄한 몇곳의 민주노조를 몹시 부러워했다. 회사의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기 일쑤인 노조를 바꾸려 애쓰다 해고당하거나 부서 이동을 당하며 외롭게 싸우던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어떡하면 자신의 공장에 방용석이나 박순희 같은 지도자를 세울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원풍노조 운동장에서 지부장을 헹가래 치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지금도 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이는 원풍동지회가 부럽기만 한 사람들이다. 자랑스럽다가도 철렁, 그 눈빛들이 짠했다. 부러워도 하고 응원도 하며 바라봐 준 시선들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다짐하게도 됐다. 원풍노조는 민주노조의 표상답게 어디서건 어려운 소식이 들리면 식당에 모금함을 놓거나 머릿수를 보탰다.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노동자 탄압 규탄 집회에서 원풍 노조원이 갈비뼈가 부러지는 폭행을 당하고, 해태제과의 8시간 노동 쟁취 투쟁에 동참하다가 연행되었다. 방림방적 노동자를 지원하러 갔다가 구금되고, 동일방직 노조 탄압 항의 시위로 구속되고, 와이에이치무역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에 힘을 보태고 후원 손수건을 팔았다. 1800여 조합원이 3교대 근무를 활용해 민주 인사들의 재판 방청, 기독교회관, 명동성당 가리지 않고 달려갔다. ‘위장 결혼식 사건’으로 유명한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시국 집회 때도 원풍노조에서 조직적으로 대거 참석해 노조원 10명이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런 사태가 빈번해 노조 사무실은 불이 꺼질 새가 없었다. 그렇게 서로 손을 잡고 물살을 헤쳤다. 고난의 현장마다 달려 나와 함께 걷던 민주 인사들, 얼굴만 봐도 좋았던 동료들이 울타리와 언덕이 되어 불온한 사회를 극복하며 버텨왔다. 또한 이런 연대의 힘이 원풍노조를 건강한 ‘전설’로 만들었다. 사람도 조직도 혼자는 설 수 없다. 장남수 | 경남 밀양 출생. 1958년생으로 열여섯살부터 공장에서 일하며 신정야학에서 공부했다. 원풍모방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해고된 뒤 노동운동을 하며 글을 써왔다. 늦깎이로 검정고시를 거쳐 성공회대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제주도에 살면서 걷고 배우며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1984년 ‘빼앗긴 일터’를 시작으로 ‘빼앗긴 일터, 그 후’ ‘파문’ ‘노동의 시간이 문장이 되었기에’ 등을 썼다.
민주노조가 주고받은 연대의 기억…울타리·언덕이 된 사람들
[길을 찾아서 - 장남수 노동의 문장] 24화 민주노조 운동과 연대의 등대 얼마 전 모임 참석차 나선 서울 방문 일정에 마음먹고 이틀을 더 잡았다. 몇년 사이 우리 사회의 큰 어른들이 유명을 달리하면서 어른이 그리워졌기 때문이다. 공항에서 직행해 종로구 사직단 옆 신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