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읽어드립니다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0:00[길을 찾아서 - 장남수 노동의 문장] 26화 1987년 여름의 기억1987년 노동자 대투쟁 때 최루탄 파편에 맞아 숨진 대우조선 21살 노동자 이석규 열사의 장례식. 대우조선노동조합 자료집 ‘옥포만의 함성, 1992년’ 광고광고 1987년 6월 대학 교정에서 스물한살의 대학생이 죽었다. 최루탄 파편이 박혀 피 흘리며 쓰러지는 이한열을 학우가 부둥켜안은 사진 한장은 국민의 심장에 박제되었다. 분노해서 광장으로 나온 시민들도 매일 최루가스로 뒤덮였다. 눈가에 치약을 묻히고 운동화 끈을 야무지게 조인 시위 행렬이 도로를 달리면 서울 종로와 명동의 사무실 창가에서 흰 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팔을 내밀어 있는 대로 흔들었다. 그들이 던져주는 두루마리 휴지가 하얗게 벽을 타고 내려와 시민들의 얼굴에 얼룩진 최루를 닦아냈다. 군중은 점점 늘어났고 흰 셔츠들도 문을 박차고 달려 나왔다.광고광고 결국 6월29일 전두환의 적자인 민정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는 ‘간선제 대통령 선거를 폐지하고 직선제를 보장하는 개헌을 하겠다’ 선언했다. 그렇게 치러진 그해 12월의 선거 결과는 차치하더라도 직선제는 열사들의 피와 시민들의 분노로 이루어 낸, 직접 투표 쟁취였다. 그해 7월9일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의 ‘민주 국민장’은 서울에서만도 100만명의 인파가 몰려나와 신촌 일대와 애오개 육교 위, 광화문까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이날, 문익환 목사는 혼신을 모아 한명 한명 민주열사들의 이름을 불렀다. 전태일 열사여! 장준하 열사여! 김경숙 열사여! 박종철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메아리가 시민들의 머리 위로 전류처럼 퍼졌다. 당시 한국 노동자복지협의회의 홍보담당자로 아침 일찍부터 연세대 정문 밖에 한 자리 잡고 서 있던 내 머릿속으로도 번개가 지나갔다.광고 열기를 타고 전국의 공장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울산의 현대엔진, 현대미포조선 등을 선두로 타오른 노동자들의 권리 쟁취 투쟁은 부산, 마산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광산업, 운수업 등 업종을 망라해 들불처럼 퍼졌다. 당시 온갖 구호가 하늘 높이 펄럭였지만, 주요 쟁점은 ‘민주노조 쟁취’, ‘어용노조 타파’였다. 거제도 대우조선도 예외 없었다. 이미 그해 1월부터 현장에서는 회사의 부당한 행태 들을 고발하는 ‘상고문’이라는 유인물이 주기적으로 배포되고 있었다. 회사는 주모자를 찾아내어 부서 이동, 파견, 해고 등의 조치를 단행했지만, 더는 봉합하고 억눌러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선박 용접 중인 대우조선 노동자. 대우조선노동조합 자료집 ‘옥포만의 함성, 1992년’ 언젠가 대우조선에서 노동자 가족을 공장으로 초대해 작업장 견학을 시켜 준 적이 있었다. ‘골리앗’이라 부르는 거대한 크레인에 아슬아슬한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 보기도 하고 도장, 용접, 탑재, 철판 절단 작업장들도 둘러보았다. 그날 노동자의 아내 가운데 어떤 이는 집에 돌아가 통곡했다고 한다. 한발만 삐끗하면 시커먼 바다 귀신이 될 수도 있고, 뙤약볕에 달궈진 철판은 0.01㎜만 잘못 잘라도 쓸 수 없으며, 삼복 더위에 우주인처럼 방진복을 겹겹이 입고 눈만 빼꼼한 남편들이 피부 연고를 들고 다니며 일하는 작업장 안을 처음 본 것이다. 남편이 최고의 배를 만들어 낸다는 자부심보다는 고된 노동에 대한 연민이 사무쳤다는 고백이었다. 1988년 초 나는 자취방 짐을 꾸려 거제도로 향했다. 능포 바닷가에 작은 방 하나를 세 얻어 대우조선 노동자들의 역사와 과정을 청취하고 기록했다. 노동조합의 지원을 받아 대우조선의 현장도 구석구석 돌아볼 수도 있었는데 그때 통곡했다는 가족들의 심정이 사무치게 전해졌다.광고 그 가족들이 공장을 견학한 시기는 노동조합이 자리를 굳혀 예전에 견주면 훨씬 나아진 때다. 이전엔 작업 중에 사용하던 석필, 토치 바늘, 줄자, 심지어는 헌 면장갑을 뒷주머니에 꽂고 무의식중에 퇴근하다 적발되어도 ‘회사 물품 절도’라며 단칼에 해고되기도 했다. 작업 상태를 감시하는 ‘인사 기강’의 오토바이는 공포였고 ‘경영합리화’를 앞세운 해고 위협은 불안이었다. 눌러둔 분노가 1987년 여름 활화산으로 터져 나왔다. 최루탄의 독한 가스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옥포, 장승포 등 노동자 밀집 지역은 투쟁 대열이 지날 때면 가족들이 음료수와 물을 공급해 주며 뒤따랐다. 아이를 업은 부녀자들도 구호를 외쳤다. 시위 차량이 마이크로 방송을 하면 사원 아파트의 가족들이 발코니로 몰려나와 화답했고 립스틱과 아기 기저귀로 쓰는 천을 창밖으로 던져주기도 했다. 립스틱은 매직 대용으로, 흰 천은 펼침막으로 사용되었다.선박 도색 작업하는 대우조선 노동자. 대우조선노동조합 자료집 ‘옥포만의 함성, 1992년’ 대우조선 노동자들은 보름여를 밤낮없이 노사 단체교섭이 진행 중인 옥포관광호텔 앞 사거리로 집결했다. 협상은 지리멸렬했다. 습도와 아스팔트 열기로 숨이 차는 한여름, 8월22일이었다. 협상이 거듭 결렬되었음을 확인하며 대열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호텔 안으로 들어가자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대우 소속 호텔이어서 경영 주체들이 그 안에 있었다. 들어가려는 노동자들과 막아서는 전투경찰의 실랑이가 벌어지며 바닷가로 밀려났다 다시 모여들기를 반복했다. 대치가 이어지던 오후 1시30분, 평화시위만큼은 보장하겠다던 경찰이 돌변했다. 강경한 기류가 흐르면서 불시에 휘몰아친 최루탄 파편이 한 노동자의 심장을 뚫었다. 스물한살 이석규, 남원 출신, 대우조선 대조립부 외업반. 푸른 작업복이 피에 젖고 아스팔트 위에 신발이 나뒹굴었다. 4개의 파편이 그의 가슴을 뚫고 그중 두개가 오른쪽 폐에 박혔다. “사람이 죽었다.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죽었다.” “이제 돈도 필요 없다. 석규를 살려내라.” 노동자들의 몸부림으로 옥포만이 뒤흔들렸다. 비보를 접한 이소선 어머니, 이상수 변호사, 노무현 변호사 등이 달려왔다. 장지를 광주 5·18 민주 묘역으로 하자는 노동자 쪽과, 고향인 남원으로 하겠다는 유족 대표 간의 논의가 오래 걸렸으나 광주로 합의했다. 영결식과 노제를 마친 뒤 대형버스 28대에 1500여명을 태운 장례 행렬이 걸음을 뗐다. 의아하게도 취재하던 기자들이 방독면을 쓰고 영구차보다 30여분 앞서 출발하는 장면이 눈에 띄었다. 그동안 민주열사의 장례가 시위로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경찰이 주검을 탈취하는 사례가 있던 터라 노동자들은 순간 긴장했다. 다행히 거제대교를 무사히 넘으면서 안도했으나 속임수였다. 고성 사거리에 이르렀을 때였다. 초상화와 사진을 실은 차, 영구차 등 세대의 차량이 지나는 찰나 불시에 15톤 덤프트럭 한대가 불쑥 나타나 도로를 가로로 막아버렸다. 양옆은 논밭이라 꼼짝할 수 없었다. 당황할 틈도 없이 도로 옆 산등성이에서 전경과 백골단이 새카맣게 몰려나왔다. 마치 적진을 치기 위해 잠복한 군대가 출몰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들은 재야인사들과 이석규의 광주 직업훈련학교 동기들이 탄 네번째 다섯번째 차량의 유리를 깨고 들어와 끌어냈다. 일부 사람은 경찰차에 처박히고 일부는 논과 산을 넘어 달아나는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난자당한 만장만 어지러이 남긴 채 앞의 차량만 경찰에 에워싸여 떠나버렸다. 차는 광주가 아닌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밤 9시 임박해 남원에 도착했을 땐 폭우가 쏟아졌다. 밭에서 일하다 혼비백산 거제로 달려와 내내 말 한마디 하지 못하던 이석규의 부모는 아들의 관을 부여안고 몸만 떨었다. 이석규의 주검은 한밤중에야 축축한 땅에 묻혔다. 한편 장지에도 가지 못하고 쫓겨 돌아온 노동자들은 밤새 거제 시내를 돌며 “경찰에게 석규를 빼앗겼다” 울부짖었다. 경찰서로 연행된 재야인사들 가운데 이상수, 박용수 등은 구금되고 이소선, 이해찬 등 10여명은 수배령이 떨어졌다. 전국에서 거행된 이석규 열사 추모제 건으로 933명이 연행되었고 64명이 구속되며 이 사건은 엄청난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이때 이석규 장례위원을 맡았던 노무현 변호사도 쟁의 조정법의 ‘제3자 개입 금지 위반’으로 구속되었는데 거세게 항의하며 싸우던 그의 열정이 노동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1987년 노동자 대투쟁 때 최루탄 파편에 맞아 숨진 대우조선 21살 노동자 이석규 열사의 장례식. 대우조선노동조합 자료집 ‘옥포만의 함성, 1992년’ 1987년 여름, 스물한살 동년배 대학생과 노동자의 죽음이 정치의 한복판에서 소용돌이쳤다. 이들 외에도 수많은 목숨이 역사의 광장에서 희생되었다. 지금은 잘 기억되지 않는 이름들이다. 장남수 | 경남 밀양 출생. 1958년생으로 열여섯살부터 공장에서 일하며 신정야학에서 공부했다. 원풍모방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해고된 뒤 노동운동을 하며 글을 써왔다. 늦깎이로 검정고시를 거쳐 성공회대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제주도에 살면서 걷고 배우며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1984년 ‘빼앗긴 일터’를 시작으로 ‘빼앗긴 일터, 그 후’ ‘파문’ ‘노동의 시간이 문장이 되었기에’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