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이 잡념잡상 _30 ‘피크닉’ 대표 김범상 젊은 친구들의 취향은 그리 단순하지 않아요.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는 것과 ‘피크닉’에 다녀오는 것은 다릅니다. 전자는 ‘우리’이고, 후자는 ‘나’예요. 취향을 통해 나를 드러내는 거죠. 어디에 사는가가 아니라 어디에 가는가, 무엇을 듣고 무엇을 읽는가, 어떤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가, 그게 곧 자기 서사예요.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광고눈 내리는 거리, 나는 차 안에 있다. 빨간 우산을 쓴 여인이 차창 곁을 지나간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우산 색이 예쁘다. 사진을 한장 찍고 싶다. 나는 얼른 창문을 내려 반 셔터로 렌즈 초점을 잡고 선명하게 담는다.광고 그는 창문을 내리지 않고 찍는다. 사진에는 가까이 차창과 창틀의 윤곽,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과 숨으로 서린 김이 흐리다. 초점이 맞지 않은 빨간 우산을 든 여인, 오히려 그 뒤의 노란색 차량과 건물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렌즈와 피사체 사이 창과 물방울과 김, 그리고 초점을 잃은 4중의 필터가 있다. 무엇을 찍은 것인지 알 수 없다. 한마디로 핀트가 나간 ‘비(B)컷’이다. 그런데 묘하게 당긴다. 한번 더 보고, 다시 한번, 언젠가 보았던 듯한 장면이 지나고 나서야 생각나듯이, 눈길이 되돌아간다. “이상하죠? 이상한 매력,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미래에도 살아남을 예술은 항상 모호함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거울처럼 독자의 특성을 그들 자신에게 비추며 세상의 지도와 같은 기능을 한다.’ 모호함이 거울과 지도라는 이 말도 좀 모호하죠? 모호함은 뭘까요?”광고광고 전시 공간 ‘피크닉’ 대표 김범상(53)의 말이다. 차창을 닫은 채로 사진을 찍은 이는 사울 레이터(1923~2013), 탈무드를 버리고 카메라를 든 유대계 미국인, 60년간 사진을 찍고 80대에 이르러 유명해진 컬러 사진의 선구자. “난 그저 남의 집 창문이나 찍는 사람이오. … 별거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한쪽 구석에 뭔가 알 듯 말 듯 한 게 있는 사진을 좋아해요. 내 사진은 왼쪽 귀를 간지럽히는 게 목적이에요. 아주 살살요.” 사울 레이터의 말이다. 사진은 흐릿하고 어둡다. 유리창 너머로 거리와 자동차 빌딩 행인 우산 같은 도심의 풍경들, 그냥 있거나 지나가거나 다가오는 것들을 찍었다. 앞의 ‘빨간 우산’은 1955년 작이고, 동명의 사진이 몇장 더 있다. ‘장례식 같은 결혼식’은 담배를 문 남자, 흑백의 실루엣이다. 중절모를 쓰고 가방을 든 남자가 지나가는 ‘상자’는 클로드 모네의 그림 같다. 낡은 구두만 잔뜩 나오는 ‘구두닦이의 신발’, 이발소 앞에 선 남자 ‘헤어컷’ 등등. 특별한 것은 없다. 초점은 아무 데나 잡혀있다. 구도와 형식도 없는 듯하다. 그냥 어떤 순간이다. 그 순간이 내가 다가가는 것이 아니고 내게 다가오는 것처럼 보인다.광고 우리 삶에 초점이 잡혀 있는, 반짝거리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사는 일이 대개는 대숲에 이는 바람이나, 저 산 너머로 흘러가는 구름처럼 그렇게 지나가는 것, 딱히 기억나는 희로애락의 순간은 잠시, 의미랄 것도 없는 무료함과 지루함과 모호함의 연속이지 않은가? 날마다 백야 같은 하얀 밤 어디에 핀트를 맞춰야 할지, 그러고 보니 난감한 일이다. “왼쪽 귀가 간지러운가요?” 김 대표가 묻는다. 사진을 책으로 넘겨보는데 귀는 안 간지럽고, 늦가을과 생맥주 생각이 난다. “사울 레이터는 눈에 보이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순간을 사랑한 듯해요. 본다, 하면 뭘 보는 걸까요? 무엇을 찍고자 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가도, 유심히 보고 있으면 전체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시를 한번 읽어 무슨 소리인지 통 모르다가 어느 순간에 아하 그렇구나 하고 안개가 걷히듯이 말이죠. 유리창이나 거울을 통해 반사되고 굴절되어 비치는 인물들은 어딘지 아련하고 쓸쓸해 보입니다. 사진 속의 그가 보는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지 않나요?” 김범상은 고교 시절부터 ‘문청’(문학청년)이었다. 서울예대 문창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를 나왔다. 단편소설을 써서 신춘문예를 두드렸으나 낙방했다. 산문과 희곡을 쓰고, 단편 영화도 여러편 찍었다. 그는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아, 이청준처럼 평생 글만 쓰고 살 자신이 없었다고 했다. 예술가가 아닌 전시기획자로 젊은 날을 보냈다. ‘글린트’라는 회사를 차려 2013년 기획한 첫 전시를 통해, 그는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이시엠(ECM),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 전시회는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두달간 열렸다. 이시엠은 1969년 창업하여 재즈 뉴에이지 클래식 음반을 주로 발매한 독일 회사다. 미국 재즈와 다른 북유럽의 재즈로 유명하다. 대표는 만프레드 아이허,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시절의 베를린필 오케스트라 콘트라베이스 주자였다. ‘소리를 전시하다’라는 부제를 달아, 아시아에서 처음 연 이 전시회는 큰 인기를 끌었다. 김범상은 아이허와 나란히 서서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2018년 전시 공간 ‘피크닉’을 열었다. 회현동, 서울역에서 이어지는 옛날 홍등가의 끄트머리, 줄지은 고층빌딩과 남산, 가까스로 서 있는 축대 위의 낡은 집들이 공존하는 언덕, 1970년대 제약회사 3층 사옥을 개조했다. 폐교 같기도 하고, 시간여행을 온 듯한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개관 첫 전시로 류이치 사카모토 40년 회고전. 영화 ‘마지막 황제’ 음악을 맡아 1988년 아시아인 최초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마에스트로. 음악가이자, “100%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말했던 사회운동가. 우리나라 첫 전시에 그가 직접 참여하여 ‘피크닉’은 하루 관객 1500여명이 몰리는 대성황을 이룬다. 영국 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 독일 무대미술가 페터 팝스트, 프랑스 사진가 프랑수아 알라르, 일본 사진가 우에다 쇼지, 그리고 ‘명상’, ‘국내여행’, ‘회사 만들기’, ‘힐튼 서울 자서전’ 등 9년간 14번의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회의 이름들, 통 들어보지도 못한 외국의 낯선 이름들은, 그곳에 가지 않으면 왠지 문화적 흐름에 뒤떨어질 것만 같고, 다녀오면 갔다 왔다고 자랑하고 싶은, 묘한 욕심을 자극한다.광고 2010년 등장한 인스타그램의 가입자가 10억명을 돌파한 해가 2018년, ‘피크닉’이 오픈한 해다. ‘피크닉’은 단숨에 사진을 찍어 올릴 만한 감각적이고 매력적인 공간, ‘인스타그래머블’이 되었고,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른다. “그 덕을 봤으니 운이 좋았죠. 하지만 젊은 친구들의 취향은 그리 단순하지 않아요.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는 것과 ‘피크닉’에 다녀오는 것은 다릅니다. 전자는 ‘우리’이고, 후자는 ‘나’예요. 취향을 통해 나를 드러내는 거죠. 어디에 사는가가 아니라 어디에 가는가, 무엇을 듣고 무엇을 읽는가, 어떤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가, 그게 곧 자기 서사예요. 단순 ‘핫플’이 아닌 나만의 ‘문화’를 즐기는 사람, 이런 흐름이 ‘피크닉’의 방향과 맞아떨어지지 않았나 싶어요.” 그는 대중성과 예술성의 균형이 제일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너무 난해하면 대중이 멀어지고, 너무 대중적이면 예술적 긴장이 사라진다. 그 둘이 잘 어울린 것이 2021년 ‘사울 레이터’전이다. 딱 하나만 꼽으라면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라는 부제를 단 그 전시회라고 했다. 그는 책자 ‘기획자의 글’에 이렇게 쓰고 있다. ‘어쩌면 예술의 본질은 모호함에 있지 않을까요? 모호함을 자기 시각으로 해석해 나가는 과정이야말로 예술 행위 그 자체인지도 모릅니다. 모호함은 유리창에 낀 성에처럼, 정의하기 어려운 어떤 시정(詩情)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사진가가 왜 눈을 즐겁게 하지 않고 귀를 간지럽힐까?” 차창을 내리고 사진을 찍는 나는 못내 그것이 궁금했다. 그가 말했다. “도시 거리에 그저 평범한 풍경들이 어린 시절 겨울 아침처럼, 누군가 떠나가던 뒷모습처럼, 비에 젖은 가을처럼, 뭔가 좀 애잔하지 않은가요? 보여주는 게 아니라 들려주는 거죠. 사진 속의 저 여인은 반소매를 입고 있지만 내가 서 있는 곳은 늦가을이야, 그런 속삭임. 내 곁으로 다가와 왼쪽 귀에다 대고 속삭이듯이, 아주 살살요.” ‘피크닉’은 1년에 두번 전시회를 여는 와중에 계간 잡지처럼 매년 4차례, ‘소설극장’과 ‘희곡극장’을 열고 있다. 작은 강당에 작가를 초대하여 자기 작품을 낭독하고, 작가와 독자를 연결해주는 일이다. 글을 읽지 않은 시대에 글을 소비하는 한 방식이랄까? 2019년 작가 한강이 이곳에 초대되어 시로도 쓰고 단편소설로도 썼던 ‘파란 돌’을 읽으면서 독자와 만났다. 지금은 ‘온 세상 만들기의 비밀을 찾아서’라는 전시회(~9월6일)를 열고 있다. 한국 출신 아무 송과 핀란드인 요한 올린, 부부 디자이너가 20년간 찾아 헤맨 기록, ‘우리가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왔지만 지금은 점점 위협받고 있는 삶의 방식에 관한 이야기’다. 다음 전시회는 “되게 퇴폐적이고 흐느적거리는 어떤 패션 사진가”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모호한 것이 계속 모호하고, 보이는 것은 들리지 않고, 왼쪽 귀가 통 간지럽지도 않은 사람, 사진을 찍을 때 꼭 창문을 열고 찍는 사람은 이 여름에, ‘피크닉’에 한번 다녀오면 좋다. 이광이 | ‘정말로 바다로 가는 길을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바다로 가는 노력을 그쳐본 적이 없다’ 목포 김현문학관에 걸린 이 글귀를 좋아한다. 시와 소설을 동경했으나, 대개는 길을 잃고 말아 그 언저리에서 산문과 잡글을 쓴다. 삶이 막막할 때 고전을 읽는다. 읽다가 막히면 ‘쓴 사람도 있는데 읽지도 못하냐?’면서 계속 읽는다. 해학이 있는 글을 좋아한다. 쓴 책으로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 ‘스님과 철학자’(정리), ‘절절시시’, 산문집 ‘행복은 발가락 사이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