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읽어드립니다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0:00일러스트레이션 김우석 광고 정문정 | 작가·‘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저자광고 어버이날을 맞아 아이가 편지를 써 주었다. 내게 ‘최고로 사랑해요’라고 적고 아빠에겐 ‘보통으로 사랑해요’라고 해서 소리 내어 웃었다. 이 아이는 전에도 차별의 말을 했었다. 내게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꾸 아빠에게는 좋아한다고 표현해서 하루는 물어보았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니?”광고광고 아이가 명쾌하게 대답했다. “좋아하는 거에 100을 곱하면 사랑하는 거라고 생각해요.”광고 이 아이는 아무래도 이과 성향 같다고 추측하는데 대뜸 질문이 되돌아왔다. “엄마는요? 차이가 뭐 같아요?”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좋아하는 건 얼굴을 자꾸 보게 되는 거고, 사랑하는 건 속눈썹을 자꾸 보게 되는 거 같아. 나는 너 만나기 전까지 누구 속눈썹을 이렇게 유심히 본 적이 없거든.”광고 나를 귀애한다는 실감을 최초로 느끼게 해준 사람도 속눈썹 이야기를 종종 했었다. “속눈썹이 짧지만 진해서 예쁘다”고. 할머니는 내게 귓속말도 자주 했다. “네가 손주 중에서 제일 좋다.” “오천원 더 줄게. 몰래 가져가라.” 방학 때마다 책과 옷을 넣은 캐리어 가방 하나를 들고 혼자 성주까지 방문한 내게 할머니는 챙겨둔 김, 라면, 캔참치, 스팸 같은 걸 꺼내어 주며 반겼다. 모두 할머니는 입에 대지 않는 음식들이었다. 특히 삐걱거리는 나무발판이 있는 푸세식 화장실을 무서워해서 집 뒤 텃밭에 대소변을 보는 건 내게만 허락되는 거였다. 당시 나는 엄마의 아들 편애에 질려 있었으면서도 할머니가 나를 특별 대우하는 데 위로받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몇년 전부터 나는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부고를 내가 제일 먼저 알게 될 것 같다는 믿음이었다. 크게 넘어진 뒤로 운신이 어려워진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입원한 뒤로 이 빠지는 꿈을 여러번 꾸었는데 그때마다 서둘러 안부를 확인하곤 했다. 이 빠지는 꿈을 두번째로 꾸었던 주말, 할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에 갔었다. 채식주의자에 결벽증이 있어 칠순 잔치를 하던 날에도 맨밥에 간장만 비벼 먹던 할머니가 급식을 어떻게 드시나 궁금했다. 엄마가 설명했다. 이모들이 김치와 두부를 냉장고에 넣어두면 밥만 받아서 같이 드신다고. 내가 걱정을 하자 괜찮다고 반복하는 할머니 얼굴에 기름기가 하나도 없었다. 외출 허가를 받고 차에 탔을 때 할머니는 읍내 시장에 가고 싶다고 했다. 박카스와 두유, 초코파이를 사서 병원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다는 거였다. 내가 그 뒤를 따르며 계산을 했다. 할머니는 만나는 상인들 앞에서 한참 머물렀다. 아는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느리게 말을 건넸다. “잘 있었소?” “나를 기억하요?” “잘 계시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명절은 막내 이모 집에서 치렀다.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앉았다. 농장에서 바로 받아오는 날달걀을 술과 먹으면 취하지 않는다고 이모부가 말했다. 취하지 않을 거면 왜 술을 마시냐고 삼촌이 장난스레 타박했다. 이모부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컵을 여러개 가져왔다. 동그란 나무채반에 담긴 달걀도 가져왔다. 톡 깨지는 소리와 함께 유리컵 안에 노른자가 봉긋 솟아올랐다. 신문지에 싸인 병을 풀어 그 위에 참기름을 떨어트리고 꿀꺽 삼킨 이모부가 이어서 소주를 들이켰다. 사람들이 잔을 하나씩 건네받았다. 거실에 참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참기름을 모두 쏟아버리기라도 한 듯 후각을 포위하는 냄새였다. 둘러싸인 향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강렬하게 느껴졌다. 문득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하리란 직감이 들었다. 급히 맞은편에 앉은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할머니는 입을 헤 벌리고 사람들 얼굴을 눈으로 하나하나 매만지며 황홀해 하고 있었다. 시장에서 했던 것처럼 작별인사를 하는 중이라는 걸 나는 알았다. 최근 소설가 박완서의 마지막 산문집 ‘세상에 예쁜 것’을 읽다가 한 대목이 눈에 걸려 들어왔다. 그는 암 투병 중이던 남편과 가족 나들이를 떠났던 당시를 이렇게 기록했다. ‘그때는 보이는 모든 것이 왜 그리도 아름다웠던지. 젊은 내 새끼들의 옷깃과 검은 머리칼을 나부끼게 하는 바람조차도 어디 멀고 신비한 곳으로부터 그 애들이 특별히 아름답게 보이라고 불어온 특별한 바람처럼 느꼈으니까. 아마도 나는 그때 곧 세상을 하직할 남편의 눈으로 그 모든 것을 보았던 것이다.’ 책을 덮고 심호흡을 하는데 표지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손을 들어 눈물을 천천히 닦아냈다. 손이 ‘세상에’를 지나 ‘예쁜 것’에 닿았다. 우리 할머니도 나를 보면 항상 “예쁜 것”이라고 했었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자꾸 내 꿈에 나타나서 하는 말이 바로 그거였다는 게 기억이 났다. 할머니는 내 속눈썹까지 특별하게 들여다보던 사람이었다. 그게 바로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