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구글 선호 매체 등록이진경 작가의 글씨 작업. 이진경 제공 광고 제미란 | 디자이너·아트 워크샵 리더광고 버드나무 사이로 사람 인(人)자 두 개가 나란히 웃고 서 있는 쌈지길 로고가 있다. 쌈지길 곳곳의 간판들을 어눌하고 다정한 한글 서체로 만든 이는 당시 아트 디렉터로 일하던 이진경 작가다. 한때 인사동 골목을 채웠던 그의 글씨는 ‘이진경체’라는 폰트로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그가 사는 강원도 홍천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강물에 발을 담근 채 쏘가리를 낚는 사람들과,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왜가리 한 마리가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글씨는 그 사람’이라던데 과연 작가는 글씨와 똑 닮은 모습이다. 대학 졸업 후 포천에서 작업에 몰두하던 그가 인사동 저잣거리로 나온 계기는 화재 때문이었다. 봄바람에 번진 아궁이 불이 작업장을 모두 태워버린 것이다. 잿더미 위에 걸터앉아 자문했다.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돌아온 답은 뜻밖에도 ‘불탄 집’이더란다. 그을린 옷과 이불로 끈을 엮고, 녹아내린 카세트테이프 같은 잔해들을 돌돌 말아 색실공을 만들었다. 첫 번째 작업실은 그렇게 두 개의 트렁크 안에 담겼다. 전재산 40만원을 쥐고 홍천 땅으로 이주했다. 피눈물로 얻은 빚으로 다시 집을 짓기 시작했고 빚을 갚기 위해 소개장 들고 찾아간 곳이 쌈지였다.광고광고 소나무 맞배지붕으로 야무지게 지어진 작업실 곳곳에 그의 친근한 글씨와 그림이 놓여있다. 그가 손글씨를 작업으로 시작한 것은 20대 시절부터다. 울릉도에 가려다 발이 묶인 묵호항의 추억을 기억하려 푸른 빛으로 써 내려간 ‘바다횟집’. 그는 시골 장터에서 흔히 만나는 “사과 몇 개에 얼마” “마늘 갈아 드립니다” 같은 생활의 필요로 또박또박 쓰인 글자들이 아름다웠다. ‘할머니가 차려준 밥상 같기도 하고, 무심히 쌓인 비료 푸대 같기도 한 것들에 참맛이 있다’고 그는 믿는다. ‘그냥’이 주는 고요한 진정성. 그래서일까. 식탁 옆이나 부엌 입구에 아무렇게나 걸린 ‘싱싱하게 살아 있으라’ ‘목숨 수(壽)’ ‘내일도 발보리심’ ‘때 밀어드립니다’ ‘선함은 강함에서 온다’ ‘생긴 대로’ 같은 글들을 속으로 따라 읽다 보니 마음 한편이 흥건해졌다.이진경 작가의 글씨 작업. 이진경 제공 그는 방방곡곡을 다니며 지역의 풍토와 식생을 박물지처럼 담아낸다. 굽이진 노랫가락들뿐 아니라 구전되는 신화, 지나온 역사와 그 속에 사라진 이들의 이름까지 한 자 한 자 다시 쓴다. 담담한데 곡진한 호명과 필체를 따라가다 보면 마치 제문을 읽는 것처럼 말갛게 경건해진다. 우리 땅의 아픈 역사를 말할 때조차 비장하기보다 가볍고 투명하게 씻어내는 담백한 위무다.광고 “결국 작업은 혼자 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붓이나 종이 같은 물리적인 것들부터 가족, 친구, 사람들의 호의와 노고, 그들의 이야기와 역사를 한 술씩 덜어서 쓰는 것이죠. 그래서 예술은 모든 존재가 누리는 공공재여야 합니다.” 달빛 환한 밤 농협 창고에서 열린 내촌마을 전시는 오래 기억에 남았다. 호박 바구니를 안고 온 농협 예금계 직원은 창고에는 처음 와봤다며 수줍게 미소 지었고, 작품 ‘바르게 살자’ 앞에 선 팔순 어르신은 문득 지난 세월을 참회하셨다. 예술의 본질은 사람과 사람 사이, 그 관계에 있다고 믿는 그가 꾹꾹 눌러 쓰고 있는 것은 글자가 아니라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