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구글 선호 매체 등록미디어아트 작가 라파엘 로자노헤머의 ‘펄스 룸’(2006). 작품은 장치를 통해 몸이 빛이 되고, 신호가 되고, 배열이 되는 모습을 시각화한다. 그러나 빛과 신호와 배열이 곧 몸 전체는 아니다. 의료도 돌봄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 돌봄을 완성하지는 못한다. ‘펄스 룸’ 사진은 허쉬혼 미술관 누리집에서 갈무리했고, 사진은 캐시 카버 작가의 작품이다.광고의료윤리나 의료인문학을 소개할 때 접하는 두가지 흔한 반응이 있습니다. 하나는 다 아는 내용을 왜 그렇게 설명하느냐는 것, 다른 하나는 문제가 아닌 것을 굳이 문제로 만드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앞의 반응은 주로 이 분야가 다루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굳이 필요한가, 라는 질문이고 이에 대해선 여러 생각을 해볼 수 있지요. 하지만 뒤의 질문은 늘 저를 고민하게 만듭니다.치료 과정에선 여러 불편이나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의료인의 언어는 늘 낯설고, 병원에서 만나는 도구나 장비는 둔탁하며, 진료실이나 병실은 어색하거나 무섭습니다. 더구나 애초에 병 때문에 아픈데, 치료를 받는 과정이 집에 누워 있는 것처럼 편할 수는 없겠죠. 그런데 여기에 대고 “현대 의료는 환자를 경시한다”라느니 “의료는 기술에 매몰되어 사람을 잊어버렸다”라고 말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을 괜히 환자니 사람이니 핑계를 대어 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입니다.분야 전공자로선 억울합니다. 의료윤리나 의료인문학은 의학에 이것도 저것도 모두 챙기라고 요구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병원이 호텔처럼 편안해야 한다거나, 의료진이 늘 다정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의료가 환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지 묻고 있을 뿐이죠.광고다만, 때로 저도 의문이 들긴 해요. 환자가 병원에서 기다리는 돌봄을 의학이 전부 제공할 수 있을까요?의학은 환자의 필요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의학은 의학의 방식으로 환자를 만납니다. 그것이 애초에 ‘인간적’일 수는 있는가 하는 질문도 떠오르지요. 그때, 저는 카프카의 짧은 우화 ‘법 앞에서’를 떠올립니다.광고광고법 앞에서 l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민음사(2017)그의 소설 ‘소송’에 등장하고 별도의 단편으로도 읽혀온 이 작품에는 시골에서 온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법’ 안으로 들어가려 하며 그 앞엔 문과 문지기가 버티고 있지요. 주인공은 들어가도 되느냐고 묻지만 문지기는 지금은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언젠가 허락이 떨어질 거라고 믿으며 기다립니다. 문은 눈앞에 있지만 그는 끝내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가 죽어갈 때 문지기는 말합니다. 이 문은 오직 당신을 위한 것이었고, 이제 닫겠다고요.표면적으로 이 작품은 권력 또는 관료제에 대한 비판으로 읽힙니다. ‘법’, 제도와 권력이 개인을 위한 것처럼 굴지만 실은 그를 끝없이 배제함을 꼬집는 이야기로요.광고그러나 이런 독해는 마지막 문지기의 말을 조롱과 반어로 이해하게 합니다. 이런 독법은 너무 단순하지요. 애초에 왜 ‘문’을 설정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문은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문이 있다는 것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문이 없었다면, 그는 애초에 법이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문이 있다는 사실이 곧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문이 보여주는 가능성 때문에 사람은 이도 저도 못하고 붙잡혀 있지요.철학자 데리다가 ‘법의 힘’에서 카프카를 읽으며 주목한 것도 이 지점입니다. 그는 이 이야기에서 법과 정의의 관계를 생각합니다. 법은 조항과 절차, 규칙과 판결의 형태로 존재하며, 정의를 구현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우리는 법의 구현이 정의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법 앞에서 정의를 찾는 경우도 많지요.즉, 법은 정의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법이 없다면 정의를 요구하고 다툴 자리도 사라진다는 점에 있습니다. 법은 정의가 숨겨져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아닙니다. 법은 정의를 계속 문제로 떠올리게 만드는 자리라고 할 수 있어요. 문은 법 안쪽에 완전한 답이 있다고 약속하는 대신, 우리를 법 앞에 세우고, 질문하고, 기다리게 만듭니다.광고저는 이 이야기에서 의료와 돌봄을 생각합니다. 의료 없이도 돌봄은 가능할 겁니다. 그러나 병든 몸 앞에서 우리는 의료를 통하지 않고는 무엇이 그 사람을 위한 돌봄인지 알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진단은 병의 이름을 열어주고, 검사는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며, 치료는 고통에 개입할 길을 만듭니다. 그런 점에서 의료는 돌봄을 가능케 합니다.하지만 바로 그 의료가 돌봄을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진단 기준, 치료 지침, 임상 경로는 모두 환자를 돌보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 한 사람’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죠. 의료는 비슷한 몸들을 묶고, 평균적인 반응을 기준으로 판단하며, 절차에 맞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래야만 치료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이 사람의 고통 일부는 언제나 문 앞에 “남아 있습니다”. 의료는 환자를 위해 있지만, 환자가 요청하는 돌봄을 그대로 보장하지는 못한다는 뜻입니다.그렇다고 의료가 틀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의료가 없으면 돌봄은 그저 선의나 위로에 머물 거예요. 즉, 의료는 돌봄을 가능케 하면서, 동시에 돌봄을 계속 문제로 만드는 문입니다. 그렇기에 의료인문학은 의료를 폐기하고 더 인간적인 무엇으로 나아가자고 말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료 안에서 돌봄이 어떻게 가능해지고, 또 어떻게 어려워지는지를 묻는 시도입니다. 카프카의 문이 누군가를 법 앞에 세워둔 것처럼, 질병은 환자를 의료 앞에 세웁니다. 그러나 의료 없이, 우리는 그를 위한 돌봄을 떠올릴 수 없습니다.이런 모순 속에서 한쪽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저는 의료인문학의 자리로 이해합니다. 환자 진료를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도, 그 최선이 원리상 환자의 돌봄을 완성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리고 그때, 응답되지 않은 ‘돌봄’의 요청을 기억하는 것 말이죠.김준혁 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