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읽어드립니다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0:00황재형 작가의 화단 데뷔작이자 초기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황지 330’. 높이가 2m 넘고, 폭도 130㎝나 되는 큰 화폭에 갱도 붕괴 사고로 숨진 탄광 노동자의 해지고 구멍 난 러닝셔츠, 작업복을 근접 사진처럼 정밀하게 묘사해냈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제공광고전두환 정권의 강압 통치가 한창이던 1982년 7월이었다. 서울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 내걸린, 사람 키보다 큰 작업복 그림 한점이 미술판에 충격을 던졌다. 5회 중앙미술대전 장려상 수상작으로 나온 30살 작가 황재형의 유화 그림 ‘황지 330’이었다. 1980년 황지탄광 매몰 사고로 숨진 광부 김봉춘의 낡은 작업복과 그 안의 쌍방울표 러닝셔츠, 작업복에 매달린 신분증 표지까지 핍진하게 옮긴 극사실주의(하이퍼리얼리즘) 그림이었다.이전에 볼 수 없던 소재와 핍진한 묘사로 점철된 이 그림은 예사롭지 않은 메시지와 의미를 갖고 있었다. 1980년 사북 사태 뒤 불온 세력의 온상으로 지목된 탄광촌의 현실을 사실상 처음 예술의 미학적 언어로 드러냈고, 어설픈 문명 비판이나 초현실 경향으로 향하던 당대 다른 작가들의 하이퍼리얼리즘과는 격이 다른, 지금의 한국적 현실에 뿌리내린 새로운 차원의 리얼리즘으로 향하는 비상구를 보여준 것이었다. 벽지 같은 단색조 유사 모더니즘의 획일화한 경향에 신물을 내며 막 태동한 ‘현실과 발언’ 동인의 비판적 리얼리즘 미술 운동에 공감을 보내던 젊은 미술인들은 물론, 정권과 서울대·홍익대 학맥의 눈치를 보던 기존 미술인들도 이제 갓 서른의 청년 화가가 그린 작업복 그림의 성취에 놀라워했다.당시 대학을 갓 졸업하고 화단에서 문필 활동을 시작했던 미술평론가 최석태씨는 이렇게 회고했다. “대학원생 때 작품을 봤는데 대단한 화제가 됐지요. 죽은 광부의 낡은 작업복을 소재로 써서 거대한 확대 사진처럼 담아낸 구성이 특출했어요. 이런 구도로 탄광의 현실을 육박하듯 박력 있게 보여주니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느꼈어요. 지금 봐도 감흥은 여전합니다.”광고이 그림은 작가가 당시 동료·후배 작가 4명과 함께 모교 중앙대 교정 앞 낡은 상가 건물 2층에 마련한 화실 ‘모인오’에서 1년여간 그린 역작이었다. 작가는 대학 졸업 2년 전부터 고향인 전남 보성 근처의 화순 탄광과 강원 태백 등의 광산촌에 틈만 나면 오가며 현장 사생을 해온 터였고, 광산촌으로 생활 기반을 옮겨야겠다는 생각도 어렴풋이 하던 참이었다. 그러던 중 갱도 붕괴 사고 소식을 접하고 현장을 살피며 기록했고, 이 과정에서 숨진 한 광부의 유족들이 남아 있는 작업복을 보며 애달파한 사연을 들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족의 허락을 얻어 작업복을 통째로 화실로 들고 와 창틀에 내걸고 작업했다.당시 상황을 지켜본 중앙대 후배 문경찬씨는 이렇게 회상했다. “원래 두점의 선행 작업이 있었어요. 러닝셔츠를 암울한 톤으로 그린 작업과 작업복을 다른 구도로 놓고 그린 작업이 있었는데, 이 두 작업을 종합해 더 큰 화폭에 표출한 것이 바로 ‘황지 330’이죠. 중앙미술대전 수상 뒤 ‘관찰자에 머무르며 작업한 것으로 큰 상을 받은 데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며 괴로움을 털어놓았던 게 기억나요. 일부 화가들 사이에서 ‘광부 생활을 한 척하며 그렸다’는 음해성 소문이 돌았던 것도 기억납니다.”광고광고수상 뒤 작가의 번민은 심해졌고, 결국 그는 1983년 9월 부인 모진명씨를 설득해 갓 태어난 어린 아들을 데리고 아예 태백 황지로 거처를 옮겼다. 거기서 광부로 취업하고 작업을 병행했다. 같은 대학 동문으로 함께 그림을 그리다 1978년 결혼한 모씨는 “‘황지 330’이 너무 뛰어나고 단단한 사실적 구도의 작품이어서 이런 작품을 그리는 이라면 언제 어디라도 함께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어 이주 제안에 기꺼이 응했다”고 털어놓았다. 모씨는 이 작품이 당대 다른 리얼리즘 작품과 달리 흑백 구도를 유난히 강조하면서도 연노랑, 연보라 같은 희망을 연상시키는 색조를 절묘하게 배합하며 곳곳에 색감을 구사한 덕분에 삶과 죽음, 희망이 함께 녹아 있는 황재형 회화의 구도를 가장 먼저 내보인 작품이 됐다고 분석했다.‘황지 330’은 하이퍼리얼리즘이 노동 현실과 만나 새로운 한국적 리얼리즘으로 전화하는 새 지평을 보여주었다. 아울러 이 작품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한 노동미술의 대두를 예언하면서 선행 작품임에도 후대 작품을 능가하는 미학적 성취를 보여주는 한국노동미술사의 시원적 기념비가 되었다. 작가는 1982년 수상 뒤에도 이 작품을 보관하면서 평생 수장하겠다고 다짐하곤 했지만, 다짐은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임영방 당시 관장의 주도로 ‘민중미술 14년’전을 연 직후 민중미술 계열 작가 작품들의 소장품 구매를 처음 추진할 때 그에게 구매 제안을 했다. 작가는 막 학교에 들어간 아이의 교육비와 생계를 걱정하는 부인 모씨의 모습을 보고 결국 작품을 매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 된 ‘황지 330’은 현재 서울관 1전시실의 상설전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의 들머리에서 볼 수 있다.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황재형 작가의 운명을 바꾼, 숨진 광부의 작업복
전두환 정권의 강압 통치가 한창이던 1982년 7월이었다. 서울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 내걸린, 사람 키보다 큰 작업복 그림 한점이 미술판에 충격을 던졌다. 5회 중앙미술대전 장려상 수상작으로 나온 30살 작가 황재형의 유화 그림 ‘황지 330’이었다. 1980년 황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