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읽어드립니다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0:00 광고 필자와 독자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필자의 자리와 독자의 자리가 다르고, 필자의 욕망과 독자의 욕망이 다르다. 무엇보다 필자와 독자는 텍스트와 다른 관계를 맺는다. 쓰는 이는 탐색과 사유, 단어의 선택을 통해 세계를 텍스트로 벼려내지만, 읽는 이는 주어진 텍스트를 재료로 기억, 공감, 상상을 펼쳐낸다. 필자와 독자는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둘의 영역은 구분될 수밖에 없다. 몇 번의 ‘딸깍'으로 생성한 ‘인공지능체’ 글이 넘쳐나고있다. 연합뉴스 텍스트의 생산과 소비에 필요한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차이가 더욱 두드러진다. 문학을 예로 들어 보자. 빠르게 읽는 독자는 중장편 소설을 몇 시간이면 읽어내지만 저자는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을 창작에 투여한다. 적확한 시어를 찾느라 긴 세월을 통과한 시인의 삶이 몇분 내로 답을 내야 하는 입시 문제의 지문이 되기도 한다. 이같은 변신은 특히 입맛이 쓰다.광고 사실 이런 비대칭은 어디에나 있다. 제빵사가 2~3일 숙성을 거쳐 구워낸 빵을 1분 안에 먹어치우는 소비자, 평생 수정한 회화를 스치듯 ‘감상’하는 관객처럼 만드는 이와 향유하는 이는 엄연히 다른 시간을 산다. 우리는 이와 같은 비대칭에 익숙하다. 아니, 대부분의 경우 아예 인지하지 못한다. 독자가 헤아리는 것은 작가와 출판사의 시간이 아니라 배경과 등장인물, 관계와 사건의 배치다. 거대언어모델로 대표되는 인공지능은 의도치 않게 이렇듯 가려진 시간의 비대칭을 폭로한다. 우리의 몸에는 긴 창작의 시간이 비교적 짧은 이해의 시간을 압도해 온 역사가 새겨져 있다. 인공지능은 바로 이 체화된 감각을 완전히 뒤집는다. 오랜 노동으로 써낸 글을 비교적 짧은 시간에 읽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의 ‘딸깍'으로 생성된 글을 수고들여 읽어야 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만나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와 블로그 곳곳에서 ‘인공지능체'가 감지되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광고광고 이러한 비대칭이 어딘가 불쾌하게 다가오는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미디어 생성의 속도는 비약적으로 빨라지고 있지만 이해의 속도는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을 사용해 수십 쪽의 문서를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해도 안구운동과 단어 인식, 글의 구조와 의미의 연결, 분석과 종합의 속도를 비약적으로 높인 인간은 없다. 우리는 여전히 같은 몸과 뇌를 가지고 이해하고 곱씹고 비판한다. 여기에서 적잖은 사람들이 인공지능에 과의존한 글을 읽기 꺼리는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상대가 3분 만에 쓴 글을 1시간에 걸쳐 읽어야 할 때 비대칭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이는 우리가 체화한 감각과 완전히 반대라는 것. 이것은 인공지능으로 생성한 텍스트의 내용과는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는 감각이다. 그리고 이 감각이 단시간에 사라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광고 최근의 연구는 과학자들조차 인공지능 활용 여부를 투명하게 드러내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 중 상당수는 대학 교원이고 인공지능으로 생성된 과제물에 대해 반감을 지니는 경우가 많다. 인공지능 사용을 투명하게 밝히라는 가이드라인은 ‘생산성은 높이되 인공지능을 쓰지 않는 저자라는 이점은 챙기자’는 욕망 앞에서 무력하다. 모든 상황에 천편일률적인 규칙을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읽고 쓸 때마다 “다른 사람이 해 주었으면 하는 행위를 하라”는 황금률을 한번쯤 새겨야 하지 않을까? 응용언어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