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읽어드립니다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0:00지난 8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국회에 참석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광고야마구치 지로 | 일본 호세이대 법학과 교수미국·이스라엘-이란 전쟁이 끝나지 않고 있다. 원유 수급 문제로 세계 경제에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 불안감을 인정하지 않고 일상을 이어가라고 국민에게 요구하는 것 같다.일본 정부는 국내에서 휘발유·경유 보조금을 지급하는 대신에 이란 전쟁에 따른 물자 절약 대책을 내놓을 생각이 없다. 그사이 석유와 관련 제품 부족 현상이 각종 경제 활동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위기감을 호소하는 이들에게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의 일부 지지자들은 인터넷 등을 통한 공격을 퍼붓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말, 일본 정부는 패전이 분명해졌는데도 국민에게 거짓 정보를 퍼뜨렸다. 이른바 ‘대본영(전쟁 지휘본부) 발표’다. 다카이치 정부는 석유 위기와 관련해 ‘대본영 발표’를 거듭하고 있다. 덕분에 물가 상승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은데도 다카이치 정부 지지율은 여전히 60% 안팎을 유지한다.광고정부의 ‘대본영 발표’에는 또 다른 목적도 있는 것 같다. 다카이치 정부는 국민에게 필요한 정책 대신 국가주의나 권위주의 정책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것처럼 보인다. 일본이란 국가 자체를 개조하려는 시도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집권 자민당은 향후 ‘천황’ 계승자를 확보하기 위해 ‘황실 전범’을 개정하려 하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남성 ‘황계’만 ‘천황’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 ‘천황’(나루히토)과 그의 동생(후미히토)은 자녀 세대에 남성 ‘천황’ 계승자를 한명만 뒀다.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 과반수는 여성 ‘천황’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 그러나 다카이치 총리가 속한 자민당과 보수 정당들은 ‘남성 우위’라는 관념을 지키려 여성 ‘천황’ 가능성을 부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를 위해 옛 ‘천황가’의 먼 친척 가문 남성을 현재 ‘천황가’의 양자로 허용하는 게 황실 전범 개정안의 뼈대다.광고광고일반적으로 왕실의 정통성은 혈통에 있다. 특히 일본에선 직전 아키히토 ‘천황’(지금 ‘천황’의 아버지)이 헌법 이념과 전후 일본의 평화국가 노선을 옹호한다는 점을 수시로 드러내면서 황실에 대한 국민 공감을 키웠다. 이를 무시하고 느닷없이 과거처럼 남성 우위, 여성 경시의 ‘도그마’로 ‘천황제’를 재편하려는 시도에 국민은 합의하지 않았다.아울러 현재 진행되는 개헌 논의에서 최대 관심은 ‘긴급 사태’ 법제 정비다. 자민당은 대형 재난이나 팬데믹 때, 중의원(하원) 의원의 임기를 연장하고 정부가 법률과 동등한 ‘긴급 시행령(정령)’ 공포 권한을 갖는 개헌안을 내놨다. 하지만 이미 재해대책기본법 등 현행 법률을 통해 긴급 사태 때 정부에 강력한 권한이 주어진 상태다. 또 헌법에 ‘참의원(상원) 긴급 집회’라는 규정을 마련해 중의원 없이 참의원만으로 국회를 운영하는 안도 포함됐다. 긴급 사태라는 명목으로 정부에 막대한 힘을 부여하고, 국회의원의 장기 집권을 용인하겠다는 것이다.광고개헌파는 일본의 오랜 전통에 걸맞은 헌법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제정 80년이 지난 현행 헌법은 이미 일본인들에게 ‘전통’이 됐다. 이를 굳이 변경하겠다는 것은 개헌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관념적 주장이다.다카이치 총리는 지난 중의원 선거 때 “국론을 양분하는 쟁점에도 과감히 대처하고 싶다”면서도 그게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참의원은 아직 부족하지만) 일단 중의원 쪽에서 개헌 발의에 필요한 3분의 2 이상 의석을 확보하자 헌법과 황실 전범을 손보기 위해 기를 쓰고 있다. 그가 하는 행동은 국민과 정부·여당 사이를 ‘양분’시키는 것이다.※한겨레는 일본의 군주를 원칙적으로 ‘일왕’으로 표기합니다. 그러나 이번 글은 일본인인 필자의 표기를 존중해 ‘천황’ ‘황실’ 등 관련 표현들을 그대로 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