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고희림 시인이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광고대구 10월문학제는 올해 14년을 맞는다. 동인이 8명(고희림, 송광근, 신기훈, 이정연, 이중기, 이철산, 정대호, 조선남)인 10월문학회는 결성 12년이다.2013년 대구에서 처음 10월문학제가 열려 와이엠시에이 강당에서 염무웅 문학평론가가 10월항쟁과 문학에 대해 특별강연할 때 청중 약 300여명이 몰렸다. 10월문학회는 매년 시첩을 냈고 최근엔 동인 8명이 그간 발표한 10월항쟁 시 중에서 골라 시선집 ‘시월, 곡비의 노래’(한티재)를 냈다.올해 80년을 맞은 10월항쟁 행사를 총괄하는 행사위원회 공동대표인 고희림 시인은 “10월문학의 산파”로 불린다. 10월문학제와 10월문학회를 앞장서 띄웠기 때문이다.광고늦깎이 대학원 시절인 2010년에 운명적으로 10월항쟁 유족과 만난 그는 대학원도 관두고 유족들과 살다시피 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채록해 시로 남겼다. 지금껏 구술을 받은 유족이 약 200명이다. 그는 유족과 함께 한국전쟁 전후 보도연맹 사건으로 학살당한 희생자 유골 발굴에도 나섰다. 이런 활동으로 나온 그의 시집 ‘인간의 문제-끝나지 않는 시월’(2013), ‘대가리’(2016), ‘가창골 학살’(2016)은 이중기 시집 ‘시월’, ‘영천 아리랑’ 등과 함께 10월문학의 주요 성과로 꼽힌다.그는 현재 대구 ‘4·9인혁재단’ 이사이자 사회주의 성향 잡지인 ‘정세와 노동’, ‘현장과 광장’ 편집위원이다. 1979년 들어간 숙명여대 정외과 시절 “운동권 주변을 얼쩡거리긴 했지만” 결혼 뒤 교사를 그만두고 시 창작에 몰두할 때 대구 지역 순문예지 ‘시와 반시’ 발행인도 잠깐 했던 그가 10월항쟁을 만난 게 계기가 되어 사회변혁의 열망을 품게 된 것이다.광고광고그는 2016년 경북 성주에서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반대 투쟁이 일어났을 땐 성주로 집과 주소지까지 옮겨 4년 동안 온몸으로 사드 저지 투쟁을 했다.지난달 28일 대구 4·9인혁재단 사무실에서 고 시인을 만났다.광고‘시월, 곡비의 노래’ 표지.해방 이후 미군정의 강압적인 식량 공출이 도화선이 되어 터진 10월항쟁은 1946년 10월1일 대구에서 시작해 그해 12월 중순까지 73개 시군에서 일어났다. 항쟁 참여자들은 4년 뒤 한국전쟁이 터지자 예비검속 명목으로 집단 학살되었다. 10월항쟁 연구자들은 1만명이 넘는 한국전쟁 전후 대구·경북 지역 학살 피해자 상당수가 10월항쟁과 연관되었다고 본다.“어떤 집회 뒤풀이에서 유족을 만나 그분들 이야기를 들었어요. 4·9인혁재단 상임이사인 함종호 선배 등이 데려온 분들인데요. 아버지가 학살되었는데도 아버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시인으로서 시심이 발동했죠. 함 선배도 예술가들이 10월항쟁을 알리는 데 나서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고요.”어떻게 10월항쟁과 만났느냐는 물음에 대한 고 시인의 답이다. 그는 이후 채영희 전 10월항쟁유족회장 등과 함께 거의 매일 유족을 만나 구술을 받았다. “제가 증언을 받은 기록이 다 변호사한테 넘어가 국가 대상 손배소송 자료로 활용되었죠. 그렇게 배상을 받은 분이 약 50명입니다.” 왜 그랬느냐고 하자 그는 “너무나 역사적인 문제이면서 눈물겹기도 하고 또 영광스러운 일”이었단다. “눈물겨운 모든 사연을 손을 잡고 들어주는 일을 한 거죠.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시인이 그런 것 아닌가요?”성주 사드 기지 앞 집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고희림 시인. 고희림 제공유족회와 시민단체가 2015년에 대구 달성군 가창골에서 직접 유골 발굴에 나설 때도 그는 유족처럼 열정을 발휘했다. “유족들 만나러 가창골에 매일 가니 제보가 들어오더군요. 여기 발굴하면 무조건 뼈가 나온다고요. 밤에 길을 가면 뼈가 툭툭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천막 치고 보도연맹 모집책 후손의 안내까지 받아 발굴에 나섰죠. 당시 일부 유족은 저도 유족인 줄 알았어요. 거의 매일 24시간을 같이 했으니까요.”광고그의 시집 ‘인간의 문제’와 ‘가창골 학살’은 시중에서 구할 수 없다. 10월항쟁을 서둘러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온라인 서점 판매 등록이 안 된 지역의 작은 출판사에서 냈기 때문이다. 두 시집을 두고 정지창 문학평론가는 ‘현장감과 사실성을 극대화한 현장 기록시’로서 높게 평했지만 한편에서는 문학적 완성도의 부족을 지적하기도 했단다.10월항쟁 유족과 살다시피 하며 200명 이야기 채록해 시로 남겨 희생자 유골 발굴, 제 일처럼 뛰어 “눈물겨운 모든 사연을 손을 잡고 들어주는 일, 시인이 그런 것 아닌가”결성 12년 ‘10월문학회’ 동인 8명 시선집 ‘시월, 곡비의 노래’ 발간“시인으로서 고육지책이었어요. 빨리 알리려는 마음에 문학적으로 불성실한 거죠. 하지만 그때는 누군가는 거칠지만 10월항쟁을 알리기 위해 시집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만들어 놓으면 누군가의 역사가 됩니다. 짧은 생각이지만, 저는 이게 더 시적이라고 봐요. 그 전에 없었던 것들을 막 얘기하는 순간의 느낌이라고 할까요. 몰랐던 그런 걸 이야기하는 게 바로 시적인 찰나이죠.”가장 기억에 남는 증언을 묻자 그는 ‘가창골 학살’에 실린 시 ‘저그 아버지 붙들리 죽은 날과 순기 해산한 날이 같은 날 되쁬제-미망인 서계특’에 담은 이야기를 꺼냈다. “보도연맹 건으로 남편이 경찰에 끌려간 다음 날 애를 낳았는데, 애가 보이지 않더랍니다. 애를 던져놓고 피를 흘리며 빨래를 하고 남편을 찾아다녔다는 이야기입니다.”그의 시는 이렇다. “나는 산기가 있어가지고/ 아(딸 순기)를 막 해산하자마자 피가 질질 나오는데/ 아는 던지놓고 걸어서 걸어서 35리길을/ 강물에 서답(빨래감)을 빨아가 다시 차고 몇 번이나 그래그래/ 해가지고 가이께네/ 남편 면회를 안시키주고 없다 카데.”이번 시선집 ‘시월, 곡비의 노래’에서 곡비는 ‘누군가를 위해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다. 고 시인은 책 제목을 두고 동인들 사이에 토론이 있었다고 했다. “시인이 대신 울어주는 것도 맞지만 저는 새 나라 건설을 위해 10월항쟁 참여자들이 노력하다 학살된 점이 강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죠.” 이런 말도 했다. “유족도 부모님이 무엇을 염원하다 학살되었는지 그 점을 좀 더 생각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많은 분이 독립운동을 했고 사회주의 세상의 꿈을 꾸다 돌아가셨어요.”‘폭동’이었던 10월항쟁은 2016년부터 적어도 대구에서는 ‘항쟁’으로 바뀌었다. ‘10월항쟁 지원’ 조례가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그 뒤 유족과 시민단체 노력으로 대구 지역 경찰서에 걸린 현대사 설명문 등에서도 항쟁 명칭이 일반화되었단다.고희림 시인. 강성만 선임기자시인에게 왜 10월항쟁을 기억해야 하는지 물었다. “해방 뒤 말도 안 되는 부조리가 한꺼번에 터져 농민들이 살 수가 없는데 미국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와 친일 경찰들을 보호하고 일제 때도 안 하던 보리 공출까지 했어요. 해방 뒤 바뀐 게 아무것도 없고 악독한 고문 경찰까지 다 원대 복귀했으니, (10월항쟁은)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전민항쟁이었죠.” 변혁 운동에 동참하면서 더 강건해졌고 비로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는 시인에게 마지막으로 왜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인지 질문을 던졌다.“인간을 황폐화시키는 게 자본주의의 본질이기 때문이죠.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를 누군가는 견제해야 합니다. 그런 꿈도 못 꾸고 살 순 없잖아요. 10월항쟁으로 돌아가신 많은 분들은 인민의 자유와 평등한 독립국가를 염원했습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민중의 자유와 평등한 독립국가 염원이 10월항쟁 정신”
대구 10월문학제는 올해 14년을 맞는다. 동인이 8명(고희림, 송광근, 신기훈, 이정연, 이중기, 이철산, 정대호, 조선남)인 10월문학회는 결성 12년이다. 2013년 대구에서 처음 10월문학제가 열려 와이엠시에이 강당에서 염무웅 문학평론가가 10월항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