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클립아트코리아광고김현정 | 강동숲속도서관 문학상주작가·‘연중마감, 오늘도 씁니다’ 저자 양희씨의 시계는 3시30분에 멈춰 있었다. 이상했다. 분침도 초침도 움직이지 않는 손목시계를 왜? 요즘 유행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한 건 따로 있었다. 그는 멈춰 선 시계를 문득문득 들여다보았다. 마치 습관처럼. 한참 뒤 맥주 몇잔이 돌아가고 나서야 까닭을 알게 되었다. “제 시계는 항상 세시 반이에요.” 배터리가 닳아 버린 것도, 단순한 패션도 아니었다. 일부러 멈춰 세운 시간. 양희씨의 시간은 언제나 3시30분이었다.솔직히 고백해볼까. 양희씨는 조금 부담스러운 학생이었다. 개강 날 출석을 부르다 흠칫 놀라 학번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내 또래인데 왜 강의실에 앉아 있는 거지? 선생을 당황하게 할 정도로 양희씨는 동기들보다 스무살 이상 나이가 많았다. 이름하여 만학도. 당연히 조심스러웠다. 호칭은 어떻게, 존칭이라도 해야 하나. 새삼스러웠던 고민은 문자메시지 한줄로 정리됐다. ‘특별대우 말아주세요. 친구들과 똑같이 대해주세요.’ 나보다 딱 두살 어린 양희씨는 어리고 발랄한 복장으로 캠퍼스를 누볐다. 학업도 열심이어서, 한창 머리 좋을 이십대를 제치고 과톱을 독차지했다.광고학기를 모두 마치고,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여유로운 싱글인 줄 알았던 그는 실은 초등학생 딸을 가진 워킹맘이었다. 사격선수였던 고등학교 시절, 부상으로 그만둔 학업이 내내 아쉬워 다시 도전한 공부라고 했다. 하필 몇달 전부터는 운영 중인 작은 회사가 폐업을 고려할 만큼 난처해진 상황이기도 하다. 달리 도와줄 방법이 없으니 ‘맥주라도 한잔 할까요?’ 제안이 오갔고, 그러다 발견한 것이 3시30분에 멈춰진 시계였다.오후 3시30분은 양희씨가 태어난 시간이다. 오후의 해가 뜨겁고 찬란하게 빛나던 시간, 여름 아기는 첫 울음을 밖으로 내놓았다. 엄마도 아가도 온 힘을 다해 세상과 마주했을 순간이다. 이른 실패로 앞이 보이지 않았던 이십대, 캄캄했던 절망의 시기에 양희씨는 시계를 샀다. 울고 싶을 정도로 힘들 때면 그 시간을 생각한단다. 멈춰 선 시계를 한번 보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세상과 만난 3시30분. 그 순간만큼은 우주에서 가장 특별한 아이였을 3시30분. 이토록 힘들게 태어난 이유가 있겠지 생각하면, 세상에 두려울 일이 없더란다. 호흡이 가벼워지고 처진 어깨에 다시 힘이 들어간다.광고광고돌아보니 특별한 시간은 나에게도 있다. 옛날 사람인 우리 엄마가 늘 하시는 말씀. ‘너는 대낮에 낳은 말띠 아이라, 평생을 쉼 없이 일하고 다니는구나.’ 방송작가 시절, 업무가 끊임없이 몰아치는 바쁜 순간마다 그 말을 붙들고 버텼다. ‘아, 나는 오후에 뛰는 말이지. 피곤하고 슬프지만 어쩌겠어. 대신 나는 씩씩하고 멋진 말이야. 낮잠이나 퍼져 자는 다른 말과는 달라.’ 까닭 모를 정신승리로 고된 노역을 극복해왔다. 촌스럽고 어이없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엄마의 엉터리 사주풀이가, 분주한 나를 긍정하고 인생을 견디는 방식이었다.술기운 탓이었을까. 잔을 부딪치는 눈가에 이슬이 잠깐 맺혔다. 새삼스레 돌아본다. 버티며 도전하는 삶에는 저마다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회사를 접어야 할 만큼 난처한 상황, 아마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전체가 실패처럼 느껴질 순간에도 양희씨는 ‘오후 3시30분’을 꺼내 보았다. 그 순간의 양희씨는 실패한 사업가도, 나이 많은 학생도, 고단한 워킹맘도 아니다. 그저 세상에 처음 도착한 소중한 아이일 뿐이었다. 인생의 특별함은 남들이 알아봐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부여하는 서사와 의미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매일 보는 가족이며 친구의 얼굴, 그리운 여행의 풍경들이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평범하고 보잘것없지만, 나를 일으키고 붙들어준 소중한 순간들이다. 그리하여 당신께 묻고 싶다. 당신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