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서울무형문화축제 중 맹인독경 시연 장면. ©장지희, 성북마을아카이브 광고“백성 중에 불쌍한 게 나이 늙은 병신이요, 병신 중에 불쌍한 게 눈 못 보는 맹인이라. 내 해몽과 같아서 자네 몸이 잘 되거든 우리 같은 병신 목숨 부디부디 잊지 마소.” 판소리 ‘심청가’의 한 대목이다. 여기서 ‘병신(病身)’은 장애인을 비하하거나 경멸하는 표현이 아니라, 말뜻 그대로 ‘병든 몸’이라는 의미였다. ‘병신’이 경멸과 혐오의 비속어로 전락한 것은 19세기 근대 이후다. 그 전까지 장애는 단순히 고치기 어렵거나 항구적인 질병 정도로 여겼다. 병은 누구나 걸릴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장애인’이란 단어가 정착한 것은 불과 반세기 전이다. 유엔(UN)은 1981년을 ‘세계 장애인의 해’로 정했다. 그해 우리나라에서도 ‘심신장애자 복지법’이 제정(1989년 ‘장애인복지법’으로 개정)됐다. 우리말 ‘장애인’은 영어 단어 ‘disability(무능력, 불능)’를 일본이 ‘장해자(障害者)라고 번역한 것을 옮겨왔다. 그 전까지 주로 ‘불구(자)’라는 용어가 쓰였다. 광고 정창권 고려대 교수(한국고전문학)의 신간 ‘한국 장애사’는 이 땅에서 장애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생한 역사를 서양의 사례와 비교해 가며 고대부터 중세, 근대 중 시대 흐름에 따라 살피고, 각 시대의 특징적인 장애사와 장애복지, 사회상까지 고증한 역작이다. 정 교수는 비장애인이지만 청소년 시절 한때 중증장애인시설에서 지낸 경험에서 장애(인)과 여성 등 사회적 소수자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겨레에 밝혔다.한국 장애사 l 정창권 지음,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만5000원 오늘날 한국인들은 장애와 비장애가 분리된 사회에서 마치 남들처럼 살아간다. 그러나 본래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몸의 다름을 결함으로 여기고 사회적으로 배척하려는 의식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한데 어울려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통합사회였다는 것이다.광고광고 그런 전통은 19세기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급속히 파괴됐다. 특히 근대 이후 서구 문명화, 기독교화, 식민지화 과정을 겪으며 장애(인)는 차별과 배제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잊어버리고, 서로 분리해 사는 것이 외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처럼 여기게 됐다. 정 교수는 먼저 서양 문명의 원류인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살폈다. 그들의 차별적 인식은 ‘완전’과 ‘불완전’의 이분법적 구분과 ‘완전’에 대한 강박적 추구 때문이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열등한 부모의 자식들과 불구 상태로 태어난 경우에는, 밝힐 수 없는 은밀한 곳에 숨겨”두라고 했다. 스파르타에서는 “아이가 연약하고 몸이 성치 않을 경우 아포세테라고 불리는” 바위 틈에 내다 버리는 영아 유기가 합법이었다.(플루타르크 영웅전)광고 서양 중세를 지배한 기독교 세계관도 플라톤의 세계관과 비슷했다. 장애는 ‘흠(결함)’이자 ‘죄의 대가(천형)’이었고, 배제와 격리 대상이었다. 빅토르 위고가 15세기를 배경으로 쓴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1831년, 원제는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비운의 주인공 콰지모도는 평생을 성당 종탑에 숨어 지냈다. 인간의 이성을 중시한 17~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도 다를 게 없었다.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은 장애를 사회적 유용성 관점에서 평가절하했다. 존 로크는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갖추지 못한 사람을 능력의 미달이나 결여로 보고 교육의 대상에서 배제했다. 이런 시각은 19세기 우생학으로 이어졌다. 장애인은 결혼 금지와 강제 불임수술의 대상이 됐다. 20세기 나치 독일은 장애인 학살 프로그램을 시행했다.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한 장면. 비련의 주인공 콰지모도는 척추장애인(곱추)으로,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성당 종지기로 살았다. 마스트인터내셔널 제공 반면 동양은 일찍부터 선진적인 장애의식과 장애복지 정책을 갖고 있었다는 게 지은이의 설명이다. 한 예로, 중국 경전 ‘장자’에 나오는 척추장애인 이야기는 신선하고 파격적이다. “지리소는 턱이 배꼽에 닿고 어깨는 목보다 높고 목뼈는 하늘을 향하며(…) 두 넓적다리는 옆구리에 있다. 등이 휘어 있어 바느질과 빨래를 할 때 안성맞춤이다. 사방에서 일을 시키므로 먹고 사는 데 걱정이 없었다.(…) 큰 공사판으로 부역으로 끌려갈 걱정이 없었다. 나라에서 구제가 있을 때는 쌀 석 섬과 장작 열 단을 꼭 받을 수 있는 혜택자였다. 신체가 뒤틀린 장애인도 자신의 몸을 기르고 수명을 온전하게 지킨다.”(‘장자’ 내편 중 제4편 ‘인간세’)광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삼국시대에 장애인은 평상시 각자의 기능에 따라 경제적 자립 생활을 했다. 기근이 들어 모두가 먹고살기 힘들어지면 국가는 환과고독(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과 함께 장애인을 우선 구휼했다. 고대에 점복(占卜)은 전문 지식이었다. 고구려·백제·신라는 당나라의 관제를 받아들여 점복 관련 박사 제도를 운영했는데, 주로 시각장애인이 점복에 종사했다. 이때까지 장애는 단순히 몸의 ‘병’이라는 독립된 범주로 인식되지 않았다. 10세기 말 고려 성종 대 이후 장애는 독질(篤疾), 폐질(廢疾), 잔질(殘疾) 등으로 지칭해 쓰이기 시작했다. 몸 상태의 취약 정도로 구별했지만 모두 질병의 한 유형으로 봤을 뿐이다. 고려 왕실은 이들에게 베와 쌀, 약 등 생필품을 제공했다. 그뿐 아니라 점복·독경·악사 같은 전문 직업과 교육 기관을 마련해주고, 과거시험과 관직 제도까지 시행했다. 이런 전통은 조선 시대에도 이어졌다. 왕과 공신, 사대부의 초상화는 얼굴의 흠이나 장애까지 그대로 묘사했다. 조선 중기 병조판서를 지낸 홍진의 초상에는 주먹만큼 부풀어 오른 코주부 안면장애가, 조선 후기 병조판서를 지낸 장만의 초상에는 왼쪽 눈의 검은 안대가, 영·정조대 재상 채제공의 초상에는 두 눈동자의 초점이 다른 사시가 가감 없이 그려졌다. 장애를 편견 없이 개방적이고 자연스럽게 생각했다는 방증이다.조선의 문신이자 장군 장만(1566~1629, 왼쪽)은 한쪽 눈을 잃은 시각장애인,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김재로(1682~1759)는 등이 굽은 척추장애인, 영·정조대 명재상 채제공(1720~1799)은 두 눈의 초점이 다른 사시 장애인이었다. 이들은 장애와 상관없이 최고위급 관직을 역임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장애는 관직에도 장벽이 되지 않았다. 지은이가 확인한 조선 시대 장애인 정치인은 삼정승만 14명, 고위 관료와 지방관은 22명에 이른다. 조선 초 ‘국조오례의’를 편찬한 허조(좌의정 역임)는 ‘곱사등이’였고, 세종 때 집현전에서 ‘고려사’를 편찬하고 공조판서와 대사헌을 지낸 눌재 양성지는 ‘말더듬이’였으며,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권균은 뇌전증(간질)을 앓았다. 이들에 대한 기록이 (왕조) 실록보다는 주로 야사·문집·일기·초상화 등에 나타나는 것도 장애를 특이하게 여기지 않은 당대의 인식을 보여준다.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낸 심희수는 말년에 다리를 저는 지체장애를 얻자 무려 104차례나 사직서를 냈지만, 임금은 “경이 걸을 수 없다는 것은 증상에 불과하고 그 마음은 병들지 않았을 것(…), 국가에서 정승을 두는 목적은 오직 도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는 데 있을 뿐이니 다리 힘의 강약은 따질 필요가 없다”며 사직을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숙종 치세의 윤지완은 부모의 삼년상을 지내다가 동상으로 왼쪽 다리를 잘라냈는데도, 숙종은 그에게 우의정을 제수했다. 윤지완은 출퇴근이 어렵다며 완강히 거부했으나 숙종은 “경에게 근력의 일은 책망하지 않겠다.(…) 대신이 (궁궐에) 출입할 때 부축하는 것은 이미 고사가 있으니 경은 가마에 편안하게 타고 안심하고 올라오라”고 분부했다고 한다.(숙종실록) 중인과 평민들에게도 장애는 차별의 벽이 아니었다. 시각장애인들은 당시 신뢰받는 전문직인 점복과 독경으로 생활하며 제법 많은 돈까지 벌었다고 한다. ‘맹인 독경’은 고려 중기 이래 지금까지 전승되는 민간신앙으로, 2017년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됐다. 이들은 승려처럼 삭발하고 주로 도교 계통의 경을 읽으며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는 구실을 한 까닭에 ‘맹승’으로 불렸으나 실제 승려는 아니었다.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소속회원들이 지난 18일 서울역에서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를 하고 있는 가운데 4호선 열차가 무정차 통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선 조정은 맹인들의 집회소인 명통시의 설립을 허가해서 그들의 단체 활동과 후진 양성 등을 위한 복지기관으로 이용하도록 헀다. 세조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쓰였다. “잔질·독질로서 더욱 의탁할 곳이 없는 자와 양인을 위해서는 이미 명통시를 설립하였고, 농아와 건벽(절름발이) 등의 무리는 한성부로 하여금 널리 돌봐줄 사람을 찾도록 하고 동서 활인원에서 후히 구제하되, 계절마다 임금에게 글로 아뢰도록 할 것.”(세조 3년, 1457년) 맹인 독경 의례는 17세기 후반까지 국가 주관 기우제로 열릴 만큼 사회적 위상이 높았다. 이들이 꾸린 조합이자 집회소인 명통시는 조선 중기 들어 조광조 등 사림파가 도교 사원이던 소격서를 철폐하면서 함께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우리 역사에서 전생에 죄를 지어 현세에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는 인과응보적 장애관은 19세기 후반 개화기가 되어서야 나타났다. 장애는 죄의 업보라는 기독교적 장애관이 유입되고, 이것이 불교의 인과응보설과 결합해 다양한 형태로 변용됐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근대에 뒤늦게 유행한 고전소설이나 설화, 야담 등에서 많이 나타난다. 앞서 지은이는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2005, 문학동네)를 시작으로, ‘역사 속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2011, 글항아리), ‘한국장애인사’(공저, 2014, 솟대), ‘실학자의 눈으로 본 장애 이야기’(2025, 사람의 무늬) 등 다수의 장애사 관련 저작을 펴낸 바 있다. 그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이번 책은 기존 연구들을 종합하고 서양과도 비교해서, 우리가 역사적으로 장애를 포함해 소수자 인권에 대한 인식과 처우가 선진적이었던 사실과 그 내적 특성을 밝히려 했다”며 “(이 책을) 영어로 번역해서 객관적 평가를 받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은이는 책의 맺음말에서 “장애는 막연한 신체적·정신적 결함이 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모습 중 하나일 뿐”이라며, “한국 사회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차별 없이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함께 살아가는 통합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