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정호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경계성 인격장애는 과거에는 치료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강했지만 지금은 여러 근거 기반 정신치료가 개발돼 있어 제대로 치료받고 꾸준히 참여한다면 충분히 좋아질 수 있다”고 조언한다. 강남세브란스병원 제공 광고“무조건 도망치세요. 곁에 있으면 지옥을 맛봅니다.” “학대의 연속이었던 어린 시절, 매일 자해를 하며 버텼습니다.”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경계성 인격장애’(BPD) 관련 영상의 댓글창은 극명하게 갈린다. 가족이나 연인으로 환자를 겪었다는 이들은 감당하기 힘든 감정 기복과 집착, 반복되는 갈등에 지쳤다며 ‘손절’을 권한다. 반대편에는 당사자들의 고백이 있다. 어린 시절 학대와 방임, 따돌림의 상처,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가까운 사람에게 매달렸다가 밀어내기를 반복해 겪은 경험, 견디기 힘든 감정을 자해로 버텨온 시간들이다.광고 경계성 인격장애는 당사자는 물론 주변 사람까지 힘들게 할 수 있지만 정확한 진단과 치료로 이어지기 쉽지 않은 질환이다. 석정호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건강보험 빅데이터에서 경계성 인격장애 진단코드를 분석한 결과, 진단율은 인구 대비 약 0.05%였다. 국외에서 보고되는 유병률보다 상당히 낮다. 단순 비교에는 한계가 있지만, 석 교수는 국내 환자가 실제로 적다기보다 우울증이나 양극성장애, 공황장애 등 다른 진단 아래 가려져 있을 가능성에 주목한다. 석 교수는 2005년 대학병원 교수로 부임한 뒤 난치성 우울증 클리닉을 운영하며 우울증과 자살예방을 연구해왔다. 2013 년부터 경계성 인격장애 치료를 위해 영국에서 개발된 마음헤아리기치료(MBT)를 국내에 도입 하기 위해 준비하여 지난해 본격적으로 시행 중이며 , 오는 9 월에는 미국 하버드대학의 경계성 인격장애 정신치료 프로그램을 들여오기 위한 온라인 워크숍도 준비하고 있다 .광고광고 진단과 치료의 문턱을 낮추기 위한 기술 개발에도 뛰어들었다. 2019년 교원창업으로 마인즈에이아이를 설립해 타액 속 코르티솔과 심리평가를 결합한 정신건강 분석 프로그램 ‘마인즈내비’, 가상현실(VR) 기반 치료 프로그램 ‘치유 포레스트’ 등을 개발하고 있다. -경계성 인격장애를 가장 쉽게 설명한다면.광고 “인간관계, 자아상, 감정의 ‘세 가지 불안정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누군가와 열정적으로 사랑하다가도 극단적으로 싸우고 헤어질 수 있고,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나는 아무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한다. 감정도 매우 빠르게 바뀐다. 세 영역은 서로 연결돼 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안정돼 있지 않아 다른 사람의 반응에 자신의 가치가 크게 좌우된다. 가까운 사람이 조금만 거리를 둬도 ‘역시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빠지고 감정이 폭발한다. 그 감정이 다시 관계를 흔드는 악순환이 만들어진다.” -가까운 사람에게 심하게 의존하면서도 갑자기 밀어내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핵심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가 ‘버려짐에 대한 공포’다.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싫어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매우 크다. 그 밑에는 ‘나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부정적인 자기상이 자리 잡은 경우가 많다. 사랑받고 싶어 강하게 다가가면서도 완전히 믿었다가 상처받는 것은 두렵다. 예를 들어 연인의 답장이 늦으면 ‘바쁜가보다’가 아니라 ‘마음이 변했다’ ‘곧 나를 떠날 것이다’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불안해져 반복적으로 사랑을 확인하면 상대는 부담을 느껴 거리를 두고, 이는 다시 ‘역시 나를 버리려 했다’ ‘ 나는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 ’ 라는 확신을 강화한다.”광고 -상대를 ‘최고의 사람’이라고 했다가 ‘최악의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를 ‘이상화와 평가절하’, 또는 한 사람의 좋은 면과 좋지 않은 면을 함께 보지 못하고 둘로 갈라 보는 ‘분열’과 연관해 설명한다. 일반적인 관계에서는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서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경계성 인격장애에서는 이런 회색지대를 유지하기 어려울 수 있다. 관계가 좋을 때는 ‘최고의 사람’이었다가 작은 갈등이 생기면 ‘최악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경계성 인격장애는 아침에는 기분이 좋았다가 그날 저녁에는 죽고 싶을 정도로 감정이 떨어질 만큼 변화가 빠를 수 있다. 애인과의 이별이나 부모의 말 한마디처럼 대인관계 사건이 촉발 요인이 되는 경우도 많다.” -자해와 자살 위험이 큰 이유는 무엇인가. “만성적인 공허감과 극심한 불안, 분노, 자기혐오에 압도될 수 있다. 이때 몸에 통증을 주면 마음이 잠시 편해지거나 멍했던 정신이 맑아지는 것처럼 느끼는 사람도 있다. ‘나는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자신을 벌주는 의미로 자해하기도 한다. 따라서 자해를 ‘관심받으려는 행동’이나 ‘쇼’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죽음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더라도 심각한 정서적 고통의 신호다. 특히 우울증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고 자살 위험도 커 반복적인 자해나 죽고 싶다는 표현이 있다면 전문적인 평가와 치료가 필요하다.” -우울증 등 다른 질환으로 진단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들이 실제로 우울증을 많이 겪는다. 다만 그것이 환자의 문제를 전부 설명하지 못할 수 있다. 약물치료로 우울감이 줄어도 연인과 갈등이 생길 때마다 극심한 절망과 분노, 자해가 반복된다면 그 밑에 있는 자아상과 애착, 감정조절, 대인관계 문제까지 살펴봐야 한다. 실제로 조울증이나 공황장애, 우울증 등 여러 진단을 받다가 경계성 인격장애를 알고 ‘이건 정말 내 이야기 같다’며 찾아오는 환자들이 있다. 자신의 반복되는 삶의 패턴을 처음 이해하게 되고 치료법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희망을 느끼기도 한다.” -경계성 인격장애는 왜 생기나. “타고난 정서적 민감성과 성장 환경이 함께 작용한다고 본다. 원래 남들보다 예민해 상대방의 말투나 감정 변화에도 빠르게 반응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인정받지 못하거나 반복적인 상처와 트라우마를 경험하면서 성장하면 어려움이 커질 수 있다. 예민한 아이가 많이 울고 보채면 부모도 지쳐 강하게 통제할 수 있다. 그러면 아이는 더 불안해져 부모에게 매달리고 부모는 더욱 지치는 악순환이 생긴다. 이런 과정에서 불안정한 애착이 형성되고 어린 시절의 관계 방식이 성인이 된 뒤에도 반복될 수 있다. 다만 ‘부모 때문에 생기는 병’이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타고난 기질과 환경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치료는 어떻게 이뤄지나. “현재까지 경계성 인격장애 자체에 선택적으로 효과가 있는 약물은 없다. 우울증이나 불안, 불면 같은 동반 증상은 약물로 조절할 수 있지만 핵심은 근거 기반 정신치료다. 대표적인 것이 변증법적 행동치료(DBT)와 마음헤아리기치료(MBT)다. DBT는 강한 감정이 올라왔을 때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법을 배운다. 자해 충동이 생겨도 일단 멈추고 ‘지금 내 마음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살핀다.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행동 사이에 작은 틈을 만드는 것이다. MBT는 자신의 마음과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훈련이다. 내가 무엇에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과거의 상처가 현재의 반응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해한다. ‘너는 나를 싫어한다’ ‘분명 나를 떠날 것이다’라고 단정하는 대신 ‘나는 그렇게 느끼지만 실제 상대의 마음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연습을 한다.” -난치성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제대로 치료받고 꾸준히 참여한다면 충분히 좋아질 수 있다. 과거에는 치료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강했지만 지금은 여러 근거 기반 정신치료가 개발돼 있다. 다만 오랜 성장 과정에서 만들어진 애착과 관계 방식을 바꾸는 만큼 한두 달 만에 좋아지기는 어렵고 1 년 이상 장기간의 집중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치료 목표는 성격을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강렬한 감정을 알아차리고 견디는 방법, 자신을 미워해온 방식을 바꾸는 방법, 다른 사람의 마음을 버림과 배신으로 미리 단정하지 않는 방법을 다시 배우는 것이다. ‘나는 버림받을 것 같다’는 감정과 ‘실제로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다를 수 있다. 그 차이를 알아차리는 데서 치료가 시작된다.” 윤은숙 기자 sug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