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_소나무 초상일러스트레이션 김예원광고“어명이요!” 큰 나무를 벨 때는 그냥 도끼부터 들이대지 않았다고 한다. 아름드리 고목 앞에 상을 차리고 고사를 지낸 뒤, 임금의 명령이라고 외치고서야 도끼를 들었다. 그것이 수백년을 산 나무에 대한 예의였다. 강원도 정선 땅에서 옛 노인들에게 들은 이야기다. 그렇게 쓰러진 나무는 뗏목이 되어 남한강의 물길을 타고 한양으로 갔다. 하늘을 받치던 나무는 기둥이 되고 대들보가 되어 지붕을 받쳤다. 나무는 산에서 한생을 살고, 집이 되어 또 한생을 살았다.지난 8월15일 아침, 동생과 나는 큰 나무 앞에 상을 차렸다. 경남 통영의 집 언덕에는 큰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었다. 오전에는 집 앞의 볕을 가리고, 해가 기울면 뒷밭에 서늘한 자리를 내주었다. 우리에게는 여름을 견디게 하는 고마운 나무였지만, 밭 주인에게는 농작물의 햇볕을 훔쳐 가는 나무였던 모양이다. 햇볕에는 지번이 없지만 사람의 땅에는 지번이 있었다. 나무는 평생 제자리를 지켰는데, 그림자가 경계를 넘었다.광고어느 날부터 소나무 한 그루가 이상했다. 푸르러야 할 솔잎이 빛을 잃었다. 살펴보니 몸통에 구멍이 나 있었고, 그곳으로 약이 들어갔다. 고추 농사를 짓는 뒷밭 주인이 한 일이었다. 통영집에 사는 동생 진정섭이 이 일을 떠안았고, 경찰서를 오간 끝에 자백을 받았다. 그렇다고 이웃에게 죽은 나뭇값을 매정하게 매길 수도 없었다. 분쟁을 겪으며 들어간 경비만 받고, 대신 함께 소나무에 고사를 지내자고 했다. 그 사람과 우리 형제가 한자리에서 죽은 나무에 술잔을 올리자는 것이었다. 죽은 나무에 이제 와 무슨 소용일까마는, 소나무의 죽음을 없던 일로 만들지는 말아야 했다.마을은 낚시꾼들에게 이름난 동네다. 주민들은 대개 낚싯배와 민박으로 먹고산다. 그러니 물때가 밥때이고, 조황(낚시 성과)이 벌이다. 어느 집 배에서 무엇이 몇마리 올라왔다는 소문은 바닷바람보다 먼저 돈다. 7월 초 문어 금어기가 풀리면 한동안 바다가 야단이다. 금어기가 끝난 며칠은 막대기만 담가도 문어가 붙어 나온다고 한다. 한동안 사람 손을 피했던 놈들이 세상 물정을 잊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며칠, 낚싯줄이 자꾸 내려오면 문어도 금세 사태를 파악한다. 지금은 감성돔이 한철이라 배들이 또 바쁘다.광고광고이 바쁜 철에 아침 열시 고사를 지낸다고 사람을 모았다. 마을의 소식통 이상권 상진호 선장에게 말했다. “안 오면 ‘하까짝대기’로 끄집어 당깁시다.” 긴 작대기 끝에 갈고리가 달린 것이 하까짝대기다. 갈고리를 영어로 ‘후크’(hook)라 한다. ‘피터 팬’의 후크 선장(Captain Hook)이 손 대신 달고 다니는 바로 그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런 갈고리 장대를 ‘훗쿠’라 부른다. 그런데 같은 꼴의 물건을 ‘핫카’라고도 부른다. 귀어학교에서 들은 바로는, 이 ‘핫카’가 남해안 어촌에서 ‘하까’가 되고 여기에 작대기의 사투리 ‘짝대기’가 붙었다는 것이다. 영어와 일본어와 한국 사투리가 긴 막대기 하나에 차례로 올라탄 꼴이다.레저보트 면허와 소형선박 면허까지 땄지만, 막상 마을에서 살면서 요긴했던 것은 면허증보다 바닷가 사람들의 말이었다. 먼 타지 사람이 무심한 듯 ‘하까짝대기’를 뱉어놓으면 “그 말을 우찌(어떻게) 아노?” 하며 웃음이 터진다. 그 웃음 한번이면 마음속 경계 하나가 무너진다. 하까짝대기는 배를 끌어당기는 물건이지만, ‘하까짝대기’라는 말은 사람을 끌어당겼다.광고바로 옆 고성군에도 전화를 돌렸다. “어디 ‘월평리 구장술’이겠습니까.” 이 말은 희한하게도 고성에서만 통한다. 이장을 구장이라 부르던 시절의 이야기다. 월평리 구장이 주막에서 한턱을 냈는데, 술도 안주도 조금만 시켰다. 술이 떨어지면 남은 안주가 아까워 “술 쪼매만(조금만) 더”, 안주가 떨어지면 남은 술이 아까워 “안주 쪼매만 더.” 그렇게 ‘쪼매만’이 이어졌다. 아끼려고 찔끔찔끔 시킨 것이 돈은 돈대로 들고 일은 일대로 커진 것이다. 그래서 고성에서는 술상이 쪼잔할 때, 더 나아가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게 되는 형국에도 ‘월평리 구장술’이라 한다. 그러니 내 말인즉 이번에는 그 반대로, 처음부터 통 크게 내겠다는 뜻이었다. 고성 사람에게는 긴 설명보다 ‘월평리 구장술’ 한마디가 빨랐다.바쁜 어촌의 아침 열시에 장정 스물몇명이 모였다. 예삿일은 아니었다. 마을 최고령인 희영호 선주 만수 어른이 오니 판의 위신이 섰고, 장년들이 좌우를 채웠다. 동생 회사 사람들도 세 차에 나눠 타고 왔다. 고성에서는 고성오광대 인간문화재 이윤석, 고성탈박물관 이도열 관장 등이 한 차로 왔다. 마을은 통영에 속하지만 장은 가까운 고성으로 보러 간다. 서로 인사는 안 했어도 낯은 익은 사이였다. 몇마디 건네자 말들이 술술 섞였다. 소나무를 올려다보며 탄식했고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그 틈에서 뒷밭 주인만 찬물에 기름 돌 듯 겉돌고 있었다.내가 나서서, 예전 한옥 목수였던 동생에게 들은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옛날에는 큰 나무를 벨 때 먼저 축문을 지어 고사를 올렸다. 도끼질 끝에 나무가 기울기 시작하면 벌목꾼은 얼른 저고리를 벗어 쓰러지는 쪽으로 던졌다. 쿵, 천지를 울리며 고목이 넘어지고 저고리가 그 밑에 깔린다. 도끼질한 놈이 당신에게 깔려 죽었으니 이제 원을 푸시라는 뜻이었다. 능청스러운 속임수지만, 사람보다 오래 산 나무에 예의는 차렸던 것이다. 나는 오늘 우리 마을의 고사도 다르지 않다고 했다. 마을 아래쪽에는 두 그루의 소나무가 오래된 장승처럼 나란히 서서 마을을 지켜왔다. 그런데 그중 한 그루를 사람이 해쳤다. 죽은 나무의 원한을 풀고, 산 나무의 슬픔을 달래는 고사라 했다.인간문화재 이윤석이 집례로 들어섰다. 나는 그의 춤이 깃든 큰 풍채를 두고 언제나 ‘영남춤의 육체적 지주’라고 소개해 왔다. 고사(告祀)의 고는 고할 고다. 사람에게는 나무의 죽음을 고하고, 나무에는 사람의 잘못을 고하는 자리라고 했다. 동생과 나는 초헌으로 첫 잔을 올려 죽은 소나무에 애도의 뜻을 고했다. 두번째 잔은 나무를 해친 사람의 자리였다. 집례는 밭 주인을 아헌으로 불러냈다. 조금 전까지 사람들 틈에 섞이지 못하고 겉돌던 사람이 고사상 앞으로 나왔다. 그가 죽은 소나무 앞에 두번째 술잔을 올렸다. 죽은 나무는 살아나지 않지만, 산 사람은 다시 얼굴을 보고 살아야 한다. 그도 제 몫의 잔을 올리고 나니 비로소 판 안으로 들어온 듯했다.광고종헌은 고성탈박물관 이도열 관장이 맡았다. 탈을 만들고 장승을 깎아온 사람이니 평생 나무를 손으로 다뤄온 사람이다. 그에게는 그만의 나무 위로법이 있었다. 세번째 잔을 올리고 술을 뿌리며 축원 소리를 했다. 이어 몇 사람이 차례로 나와 절을 올리면서 고사를 마쳤다. 돌아보면 첫 잔은 애도였고, 두번째 잔은 사죄였으며, 세번째 잔은 위로였다.소나무 초상이 웬만한 사람 초상 못지않았다. 예전 마을에 초상이 나면 온 동네에 일이 생겼다. 아낙들은 전을 부치고 상복을 만들었고, 남정네들은 돼지를 잡고 상여를 멨다. 사람마다 제 몫이 있었다. 한 사람의 초상이 온 마을의 일이었다. 그러다 장례식장과 장의사가 일을 대신하면서 마을 사람들이 맡던 몫이 사라졌다. 그저 부조금 내고 밥 먹고 나오는 자리가 되었다. 그래도 상주 곁에서 밤을 함께 새웠는데, 코로나19를 지나며 밤샘도 사라졌다. 이제는 아예 문상객을 받지 않는 초상도 생겼다.그런데 거꾸로 소나무 한 그루의 초상이 사람을 불러 모았다. 고사가 끝나자 소나무에 올렸던 술이 사람의 잔으로 내려왔다. ‘하까짝대기’가 먼 데 사람까지 술상으로 끌어당겼고, ‘월평리 구장술’의 ‘쪼매만’은 권커니 잣커니 술을 더 부르는 말이 되었다. 아침 열시에 시작한 고사는 어느새 잔치가 되어 있었다. 소나무는 그늘 때문에 죽었다. 그런데 죽어서도 그늘 하나를 더 만들었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함께 앉을 그늘이었다.진옥섭 |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소룡의 ‘당산대형’을 보고 ‘무(武)’를 알았고, 탈춤과 명무전을 통해 ‘무(舞)’에 빠졌고, 서울의 굿을 발굴하면서 ‘무(巫)’를 만났다. 기생, 무당, 광대, 한량을 찾아 ‘남무(男舞)’, ‘여무(女舞)’, ‘전무후무(全舞珝舞)’를 올렸다. 마침내 ‘무(無)’를 깨닫고, 사무친 이야기를 담은 ‘노름마치’를 출간했다. 국가유산진흥원 이사장을 역임하고, 담양군문화재단 대표이사로 일했다. 현재 ‘사서삼통’, 4일은 서울 3일은 통영에 있으며, 무대와 마당 사이의 문화판에 산다.
나무는 죽어서도 그늘을 만들었다 [진옥섭 풍류로드]
28 _소나무 초상 “어명이요!” 큰 나무를 벨 때는 그냥 도끼부터 들이대지 않았다고 한다. 아름드리 고목 앞에 상을 차리고 고사를 지낸 뒤, 임금의 명령이라고 외치고서야 도끼를 들었다. 그것이 수백년을 산 나무에 대한 예의였다. 강원도 정선 땅에서 옛 노인들에게 들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