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구글 선호 매체 등록스웨덴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1849~1912)의 초상화(왼쪽)와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자화상. 위키미디어 코먼스 광고광기를 창조성의 동력으로 보는 사고방식은 그리 낯설지 않다.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로 알려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노래하게 하소서, 여신이여!”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앞으로 이어질 노래를 인간의 창조물이 아닌 신에게 붙들려 부르는 광기의 산물로 보는 시선이 담긴 도입부다. 대중문화의 성실한 소비자로 새천년을 맞이했던 필자와 같은 이라면, 가수 이정현의 무대를 떠올려 볼 수도 있다. 그의 무대를 보며 인간의 이성 너머에 있는 어떤 힘이 작은 몸 안으로 불쑥 찾아왔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관객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스트린드베리와 반고흐'에서 창조성과 광기의 관계를 탐구한다. 그가 의학에서 철학으로 넘어가던 과도기에 ‘응용정신의학 논문집’에 실었던 글을 꼭 100년 전인 1926년에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우리말 번역서의 저본은 1949년 개정판이다. 필자 같은 철학사 연구자에게 야스퍼스는 이른바 실존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하나로 우선 기억된다. 그런데 이 책에서 그는 ‘철학자’가 아닌 ‘정신병리학자’의 안경을 끼고서 날이 선 메스를 들어 올린다. 그가 먼저 수술대 위에 올린 이의 이름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광고 스트린드베리는 입센과 체호프를 잇는 근대 연극의 거장으로 불리는 대작가다. 하지만 이 이름이 대중에게는 꽤 낯설 듯하다. 혹 그의 이름을 들어 본 이들에게도 익숙한 것은 노벨상에 얽힌 풍문들이지 그의 작품은 아닐 성싶다. 그가 노벨을 ‘죽음의 상인’이라 칭하는 바람에 노벨이 결코 그에게는 노벨문학상을 수여하지 말라고 했다느니, 추천서가 스웨덴 한림원에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그가 노벨상 수상을 아깝게 놓쳤다느니 하는 그런 일화들 말이다.스트린드베리와 반 고흐 l 카를 야스퍼스 지음, 홍성광 옮김, 교양인, 2만3000원 호사가들이 입방아를 찧어 댈 이런 이야기들 때문에 야스퍼스가 스트린드베리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다. 그의 책을 관통하는 물음은 “창조성이 정신질환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가, 아니면 정신질환 때문에 나타나는가?”라는 질문이다. 자신이 경험한 환각이나 망상과 같은 여러 병적 체험에 대해 스트린드베리가 남긴 생생한 자전적 묘사에서 그는 이 질문에 답할 단초를 찾는다. 당대 정신의학이 정신질환을 다루는 방식에 의문을 품고 환자가 경험한 주관적 체험에 주목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열고자 했던 그의 기획을 현실화할 토대로 스트린드베리가 호출된 셈이다. 그래서 책의 절반은 스트린드베리를 살핀다.광고광고 야스퍼스는 스트린드베리의 사례에 만족하지 않는다. 신비주의 철학자 스베덴보리, 현대시의 정점이라 평가받는 횔덜린, 그리고 후기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역시 그는 살펴본다. 그가 위의 세 인물 각각을 개별적으로 의미를 갖는 사례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저자의 목표는 스트린드베리를, 더 정확히 말해, 그의 정신분열증을 그의 작품과 더 잘 연관 지어 살펴보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스트린드베리를 스베덴보리와 비교하고, 이어서 그를 횔덜린 및 고흐와 대조한다. 이러한 전략은, 내면에서 곧장 밀려오는 체험을 열정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형상화하는 고흐나 횔덜린과 달리, 스트린드베리의 경우 작품의 내용이 순전히 대상적이어서 쉽게 이해된다는 사실을 더 도드라지게 한다. 또 창조성 자체가 정신분열증에 의해 영향을 받는 횔덜린과 고흐의 경우와 달리, 스트린드베리의 경우 정신분열증이 작품 내에서 본질적으로 소재적이고 내용적인 의미만을 지닌다는 점이 잘 드러난다.광고카를 야스퍼스(1966년, 스위스 바젤대학교 연구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쯤 되면 정신병리학자 야스퍼스가 왜 지금껏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는지 조금은 짐작이 된다. 정신의학과 문학 그리고 미술을 가로지르는 백과사전적 지식을 바탕으로 학문적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연구를 소화하는 것은 녹록지 않다. 이런 연구가 정신의학계의 관심을 끌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물론 그가 정신병리학자로서 활발히 활동한 기간이 10년도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는 없다. 빛나는 철학적 저작들을 두고서 까다로운 그의 정신의학 저작들로 눈을 돌릴 여유가 철학사 연구자들에게도 없었으리라 짐작된다. 이건 퍽 애석한 일이다. 20세기 초 정신병리학사의 한 페이지가 제대로 기록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게다가, 이것은 철학사 연구의 한 페이지가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신병리학적 관심이 야스퍼스 철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추동하고 있다는 걸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우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스트린드베리와 반 고흐'의 번역본 출간은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다. 믿을 만한 출판사의 품에서 신뢰할 수 있는 역자의 손을 거쳐 이 책이 한국의 독자들과 만나게 되었다는 점이 이 소식을 더 반갑게 한다. “진주를 보고 기뻐하는 이가 조개의 병을 떠올리지 않”(204쪽)지만, 진주와 같은 이 역서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인고의 시간을 보냈을 이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머리가 핑핑 돌 정도로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다. 그 속에서 오늘도 누군가는 벽돌 한장을 쌓는 심정으로 좋은 글을 쓰고 훌륭한 글을 옮기고 또 묶는다. 그렇게 쓰고 또 옮겨 묶여 나온 글을 읽는 일은 그 변화를 따라잡는 데에는 별 보탬이 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변화의 파도 속에서 우리는 잠시 벗어날 필요가 있다.광고 저 파도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묻기 위해 우리는 저 파도를 창조한 ‘인간이란 누구인가’를 물어야 한다. 인간의 광기와 창조성을 들여다보는 일이 그 질문을 파고들어 갈 하나의 길을 보여 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시간이 “이전부터 주어져 있던 어떤 가능성들을 무조건적이고 어디에서도 멈추지 않는 경험으로 끌어올리는”(220쪽)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구교선 전북대 교수(서양윤리학)
광기는 창조성의 원천인가 장애물인가 [.txt]
광기를 창조성의 동력으로 보는 사고방식은 그리 낯설지 않다.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로 알려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노래하게 하소서, 여신이여!”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앞으로 이어질 노래를 인간의 창조물이 아닌 신에게 붙들려 부르는 광기의 산물로 보는 시선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