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구글 선호 매체 등록프랑스 작가이자 사진가인 에르베 기베르(1955~1991). 사진은 그의 에세이 ‘유령 이미지’의 표지에 쓰인 것이다.광고우리는 거울 앞에서도 자신을 연출한다. 어쩌면 거울 속 나는 진짜 내가 아니라 하나의 연출된 상일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왜곡된 거울은 단연코 에스엔에스(SNS)다. 스마트폰 화면 속에는 상을 왜곡할 수 있는 각도, 현실을 보정하는 조명, 확대된 취향의 ‘나’가 존재한다. 이곳이야말로 현대판 나르시시스트들의 호수가 아닐까. 이 호수에 비치지 않는 것은 질병(정확히는 질병의 무게), 노화, 구차한 삶들. 유토피아적 자아 안에 그런 것들은 설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에스엔에스는 일종의 편집된 전시 공간이다. 그곳에 전시된 수많은 ‘나’를 관람하다 보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카메라 렌즈 앞에 자신을 세우되 자기에게 편집권을 허락하지 않은 작가, 에르베 기베르다.프랑스의 작가이자 사진가, 사진 비평가 에르베 기베르. 나는 그의 작업을 ‘노출’이 아닌 다른 말로 설명할 재간이 없다. 오토픽션, 셀프포트레이트, 자기 기록 등 아무리 고상한 말을 붙여봐도 결국 ‘노출’로 수렴된다. 그의 ‘노출된 세계’는 마지막 유작 다큐멘터리 ‘수치심 혹은 파렴치’에서 정점에 이른다. 에이즈 합병증으로 죽음과 싸우던 마지막 1년, 기베르는 홈비디오 카메라로 투병 중인 자신을 촬영한다. 이 영상에서 카메라는 피사체인 기베르와 어떤 교감도 나누지 않는다. 화면 속 그는 주사를 맞거나, 의자에 쓰러지듯 앉아 있거나, 병원 침대 위에 누워 있다. 관찰 카메라가 담은 일종의 투병기라고 해야 할까.이 작업의 의미가 궁금하다면, ‘에르베 기베르’라는 전시 공간으로 들어가보자. 그곳에서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것은 피사체일까, 아니면 그것을 담는 렌즈일까. 단순히 피사체만 바라본다면 우리의 감상은 에이즈에 허물어진 한 인간의 육체를 동정하는 데 그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신체를 찍고 있는 렌즈의 존재, 즉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기베르의 시선을 의식하는 순간, 이 투병기는 다른 차원의 해석을 얻는다. 그에게 육체는 연민을 구걸하는 대상이 아니라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철저히 해부하고 관찰해야 할 하나의 재료였기 때문이다. 그는 카메라의 렌즈를 자신에게 고정함으로써 관찰 주체와 관찰 객체의 경계를 완전히 지운다. 한 인간이 자신의 생물학적 소멸 과정을 어디까지 객관화하고 이미지로 고착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리적 실험, 이것이 바로 이 관찰 카메라가 도달한 예술적 성취라고 할 수 있겠다.광고이러한 시각적 실험은 그의 문학적 세계와도 만난다. 에르베 기베르의 작업은 크게 두가지 축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언어를 매개로 한 글쓰기이고, 다른 하나는 렌즈를 이용한 사진 및 영상 기록이다. 기베르는 이 두 매체를 이용해 한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영역을 전시 공간으로 옮겨놓는다. 그는 글과 사진 모두에서 자기 자신을 해부학적 대상으로 삼는다.1980년대 후반, 에이즈 진단을 받은 이후 기베르의 기록 방식은 더욱 구체화된다. 그는 질병으로 인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신체의 수치, 외형적 변화, 매일 복용하는 약물의 종류 등을 데이터화하듯 기록하며, 이른바 ‘질병 문학’을 탄생시킨다. 다만 그의 문학은 고통에 대한 심정적 해석이 아니라 육체의 붕괴 과정을 담아낸 정밀 보고서에 가깝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내 삶을 구하지 못한 친구에게’는 이 관찰의 포커스를 확대해 자신과 주변의 은밀한 비밀까지 비춘다. 당대 프랑스 지성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미셸 푸코의 사망 원인이 에이즈였음을 폭로하며, 사회에 충격을 던진 것이다. 당시 지식인들과 푸코의 지인들은 사생활을 침해한 이 무자비한 노출을 두고 거센 비난을 쏟아냈다. 물론 기베르에게 푸코의 비밀을 폭로할 권리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의 푸코가 아니라 ‘기베르’라는 서사적 공간 안에 있는 하나의 필연적 등장인물이라면 어떠한가. 여기서 중요한 본질은 기베르가 자신과 주변의 삶을 서사적 재료로 동등하게 취급했으며, 그 폭로 과정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비난과 사회적 파장마저도 기록의 일부로 수용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그의 이 독특한 창작 방식에 일반적인 도덕적, 윤리적 잣대를 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광고광고내 삶을 구하지 못한 친구에게 l 에르베 기베르 지음, 장소미 옮김, 김현 해설, 알마(2018)그렇다면 이 전시장에서 우리가 감상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먼저 몸이다. 다시 말해 에이즈로 인해 한 남자의 몸이 폐허로 변해가는 과정이다. 당시 사회가 은폐했던 이 질병을 시각화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행위는 일종의 저항이었다. 실제로 기베르 이후, 에이즈는 눈에 ‘보이는’ 질병이 되었으며, 이는 의학적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나는 그가 전시한 ‘몸’을 일종의 의학적 실험 대상이나 공익을 위한 희생으로 설명하고 싶진 않다. 그의 모든 노출 행위에서 가장 아름다운 진실은, 그가 질병을 앓는 몸의 온전한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때때로 질병이 우리의 정체성을 ‘환자’라는 수동적인 존재로 바꾸도록 방치한다. 하지만 기베르는 소멸하는 육체를 기록의 재료로 삼으며 몸의 주권을 되찾아온다. 자신의 죽음 또한 질병에 내어주지 않겠다는 의지였을까. 그는 치사량의 디기탈린을 삼키고 2주 후에 세상을 떠났고, 우리에게는 그의 기록이 남았다.모든 것이 보기 좋게 편집되는 디지털 사회에서 기베르가 남긴 유산은 우리에게 몇가지 물음을 던진다. 당신은 거울과 렌즈 앞에서 자기 연출을 멈추고, ‘타인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의 간극을 지워낸 진짜 ‘나’를 직시할 용기가 있는가. 그리하여 내 삶과 몸의 진정한 주체가 될 자신이 있는가. 관찰 대상이 완전히 소멸해 사라진 뒤에도, 기베르의 시선은 텍스트와 이미지라는 견고한 물질로 남아 여전히 우리를 응시한다.신유진 | 작가·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