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고원 데미샘 바로 아래에서 시작하는 섬진강의 첫 시냇물. 조승현 기자 shcho@hani.co.kr광고지난 6월26일 금요일 늦은 오후, 거의 만석으로 남서울터미널을 출발한 전라북도 장수행 막차는 무주, 안성, 장계에 차례로 손님을 내려주고 늦은 밤 장수에서 시동을 껐다.승객 3분의 2가 무주에서 우르르 내린 뒤 고속도로가 아닌 꼬불꼬불 까마득한 시골 산길을 한참 달린다는 걸, 그래서 갑절이나 먼 남해안 어딘가를 갈 만큼의 시간이 걸린다는 걸 서울내기는 알지 못했다. 장수에 내린 승객은 단 넷뿐이었다. 하루 세 차례, 서울과 장수를 오가느라 12시간 이상을 길 위에서 보낸다는 버스 기사는 이런 이유로 무주부터는 완행을 할 수밖에 없고, 거리에 비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요금도 비싸다고 했다.서구이재, 해발 850m 분수령섬진강은 장수 시내와 등을 맞댄 진안군 백운면 진안고원 데미샘에서 발원한다. 필자처럼 외지에서 온 자전거 여행자가 섬진강 최상류에 접근하려면 장수공용버스터미널이 최선의 출발지다. 시작부터 섬진강과 금강의 분수령인 해발 850m 서구이재를 넘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지만 체력이 충분한 초반에 걸어서 넘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마을 어귀 달빛 밤하늘에 그려진 거대한 음영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광고*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픽 조승현 기자 shcho@hani.co.kr기대와 걱정을 오가느라 달뜬 심장을 맥주 한 캔으로 잠재우고 운 좋게 구한 숙소에서 눈을 감았다. 뒤척였는지 잠들었는지 모를 몇 시간 뒤, 6월의 여명이 긴 하루를 예고하며 눈꺼풀을 열었다. 준비를 마치고 숙소를 나와 마주한 첫 풍경은 거대한 음영보다 한참 낮게 걸린 구름 띠였다.시내를 벗어나자마자부터 서구이재를 만났다. 속에서 욕이 치미는 급경사는 없지만 오르막 8㎞ 내내 숨 돌릴 평지도 거의 없다. 가장 가까운 마을 진안 가는 길에 이 유난스러운 고개가 있다니 고립의 역사가 오죽했을까.광고광고부지런히 페달을 밟아도 시속 6㎞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땀을 식힐 바람을 만들 수 없는 속도다. 사이클링 컴퓨터(속도계, 내비, 온도계, 기압계 등이 통합된 디지털 장치)에 찍힌 온도는 16도지만 얼마 못가 소나기라도 만난 듯 온몸이 젖었다. 가장 가벼운 기어에 체인을 걸고 심장을 달래며 고통을 길게 참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다.서구이재 오르막. 조승현 기자 shcho@hani.co.kr인기척에 놀란 다람쥐가 급히 몸을 숨기고, 웃자란 하룻강아지들이 발치까지 다가와 멍멍 어설픈 텃세를 부리다 지쳐 물러나는 산골의 평화로운 새벽. 여행자의 심장과 허벅지만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잔뜩 달고 온 캠핑용 가방만 없어도 덜 고통스러웠을텐데.광고한 시간 가량 페달을 밟아 다다른 정상에서 인근 주민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뒷짐을 지고 산책하다가 선량한 목소리로 “힘든데 고생하십니다” 먼저 인사를 건넸다. 푹 젖은 자전거 여행자의 모습에 익숙한 말투다.서구이재 정상. 조승현 기자 shcho@hani.co.kr데미샘, 두 바다로 향하는 작은 꿈서구이재 정상부터 긴 내리막이 펼쳐진다. 땀 흘린 직후 긴 내리막은 대체로 춥다. 덧입을 옷을 챙기거나 몸을 충분히 말린 뒤 출발하는 게 좋지만, 둘 다 아니라면 몸으로 때울 수밖에. 정상을 떠난 지 30여 초 뒤, 팔다리에 소름이 돋고 이가 덜덜 떨리는 고통이 찾아왔고, 뒤이어 찬바람 맞은 배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이 전해졌다. 시속50㎞ 내리막에서 한 인간의 존엄이 위협받고 있었다.위기의 내리막 어딘가에서 데미샘 입구 삼거리를 만났다. 큼지막한 이정표가 서 있으니 못 보고 지나칠 일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데미샘자연휴양림 주차장까지 가는 길은 서구이재보다 더한 오르막이고, 그 뒤로 산길을 한참 걸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만난 오르막에서 정신없이 땀을 쏟다 보니 방금 전까지 복부를 감쌌던 깊은 번뇌는 더 큰 고통에 묻혀 잊혀졌다.섬진강 발원지 데미샘 주변. 조승현 기자 shcho@hani.co.kr걸음이 불편한 로드 자전거용 클립리스(클리트) 신발 차림이라면 데미샘 방문은 깨끗이 포기하는 게 좋다. 운동화 겸용 클립리스 신발로도 산행의 즐거움보다 낙상 걱정이 컸다. 등산복 제대로 차려입은 커플이 뒤뚱거리는 자전거 여행자를 총총 앞질러갔다. 그 모습이 사라질 무렵 시냇물 소리도 멀어졌다.광고섬진강 발원지 데미샘. 조승현 기자 shcho@hani.co.kr요란한 구석 없이 조용히 솟는 깊은 산속 옹달샘. 데미샘의 첫인상이다. 양손으로 서너 번 뜨면 바닥을 드러낼 물이 다른 물을 만나 강을 이루고, 벌겋게 끓는 광양의 쇳물을 식히고, 호남평야 지평선 끝까지 황금빛 가을을 알알이 새긴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웅장해진다. 하지만 식수 부적합 표지가 붙어 있으니 새벽에 눈 비비고 일어난 토끼에게는 세수만 하고 가라고 알려주고 싶다.데미샘 입구 삼거리의 표지석. 조승현 기자 shcho@hani.co.kr데미샘자연휴양림 주차장부터 데미샘까지는 왕복 1시간 가량의 도보 이동이 필요하니 숙박이나 교통편을 예약했다면 유의해야 한다. 물이 콸콸 샘솟는 장관을 기대했다면 실망이 클 테니 삼거리 표지석 앞에서 사진 한 장 남기는 정도로 만족해도 좋겠다. 필자는 자물쇠가 없어 주차장 구석에 자전거를 숨겨놓고 후딱 데미샘을 둘러보고 왔다. 아무 일 없었지만 속편한 산행은 아니었다.진구사지, 시골 마을에 숨겨진 보물진안고원 아래, 마령면에서 바라본 마이산. 조승현 기자 shcho@hani.co.kr진안군 성수면에서 임실군 관촌면으로 향하는 섬진강변. 조승현 기자 shcho@hani.co.kr진안고원부터 임실군 관촌면까지, 35㎞ 가량 이어지는 한적한 시골길은 강 따라 평화롭게 페달을 밟으며 온갖 상념을 내려놓을 수 있는 ‘구도의 길’이다. 하류의 곡성군이나 구례군처럼 가장자리에 파란 자전거 안내 실선만 그어도 충분히 홍보가 될 텐데, 아쉬울 뿐이다. 임실군과 전주시를 잇는 길목 임실군 관촌면에는 근처에 없는 큰 식당, 편의점, 여행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버스터미널이 있으니 기억해두자. 마을 강 건너편에는 네 신선이 노닐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사선대가 있다.임실군 관촌면 사선대. 조승현 기자 shcho@hani.co.kr임실군 관촌면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 신평면의 중국집에서 11시께 이른 점심을 먹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이 있다는 셰프가 운영하는 곳인데, 도가니짬뽕을 추천하는 정보를 미리 접하고 갔지만 더위에 지친 몸이 뜨거운 국물을 거부해서 간짜장을 선택했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다시 와야 할 이유가 하나 생겼다. 메뉴를 고른 뒤 보조배터리 충전을 부탁했다.‘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추천하는 맛집은 의심부터 하라’는 말이 있어 조심스럽지만, 표지판도 온전치 않은 시골 마을 중국집의 간짜장은 전혀 예상 못한 ‘서울 연희동의 맛’이었다.임실군 신평면의 표지판. 낡은 표지판을 흉물로 여기는 이도 있겠지만 유행 지난 디자인 요소, 지금은 쓰지 않는 로마자 표기법 등을 살펴보는 것도 시골길 여행의 재미다. 조승현 기자 shcho@hani.co.kr임실군 신평면 중국집의 간짜장. 조승현 기자 shcho@hani.co.kr식사 뒤 근처 용암리 마을의 진구사지를 찾았다. 진구사는 통일신라 시대인 7세기 후반 옛 백제 땅에 고구려계 승려가 세운 절로, 조선 전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옛 절터에 남은 임실 진구사지 석등(보물, 높이 5.18m)은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12호, 높이 6.4m)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석등으로, 절이 온전히 남아 상륜부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순위가 뒤바뀌었을지 모른다. 사진으로는 느끼기 어렵겠지만 실물의 규모는 압도적이며, 단단한 화강암을 주물러 빚은 듯한 조형미 또한 대단하다.대한민국 보물 임실 진구사지 석등. 조승현 기자 shcho@hani.co.kr불교의 석등은 세상을 밝히는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하니 진구사는 화엄사만큼 크고 위엄 있는 사찰이었을 테지만 천년고찰도 조선의 억불숭유를 버티긴 어려웠을 것이다. 첩첩산중 암자도 아닌 민가 사이의 큰 절이라면 오죽했겠는가. 폐허가 된 천년 역사는 안타깝지만, 거대한 조형물 하나만 남겨놓고 모든 게 소멸된 빈 공간은 역설적으로 신비롭기 그지없다. 멀리 소나무 네 그루가 솟은 언덕 앞 풀밭 공터를 1천 살이 넘은 거대 석등이 홀로 지키는 장관을 우리나라 어디서 또 볼 수 있을까 싶다.임실 진구사지. 조승현 기자 shcho@hani.co.kr여기서 이름 모를 고개 하나만 넘으면 거대한 인공호수 옥정호와 만난다. 새벽에 오른 서구이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서울 남산 정도 오르막이지만 쉴 새 없이 물을 들이켜도 한낮의 갈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젖었다 마르기를 반복한 카키색 셔츠엔 여러 겹 하얀 소금 얼룩이 남았다. 귀한 염분을 놓칠세라 온몸에 숲속 날벌레들이 달려든다.눈앞이며 귓가를 맴돌며 따라오는 날벌레는 여름철 자전거 여행의 복병이다. 눈가와 귓가를 맴도는 벌레를 쫓는다고 팔을 휘젓다가 사고가 나는 경우도 있다. 시속 15㎞ 정도로만 꾸준히 달려도 뒤쳐지는 굼뜬 녀석들이지만, 오르막에서는 방충 복면(버그넷)을 뒤집어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바람이 막혀 맨 얼굴보다 더워도, 설령 범죄자를 연상시켜도 도리가 없다.*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더위와 벌레떼를 피하려 정상에서 조금도 쉬지 않고 내리막에 접어들었다. 금새 컨디션이 살아났다. 자연계 최상위급인 인간 지구력은 땀의 기적적인 냉각 효율에서 비롯되는 게 맞다.섬진강이 서해로 향하는 사연1928년 일제는 호남평야의 용수 문제를 풀기 위해 임실군 운암면에 운암댐을 세워 섬진강 물줄기를 분수령 반대편으로 넘겼다. 일대는 물이 가득 찬 대접 형세가 되었고, 섬진강은 원래 물길 반대쪽, 정읍시 칠보면 쪽으로 넘쳐 서해로 흐르기 시작했다. 해방 뒤 운암댐보다 더 높은 섬진강다목적댐과 우리나라 최초의 유역변경 발전소인 칠보수력발전소까지 세워졌다. 자연지리적으로 섬진강은 남해로 흐르는 게 맞지만 위와 같은 사연으로 한 세기 전부터 서해, 정확히는 동진강 하류 새만금으로 가는 것도 맞다.국사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옥정호 붕어섬 일대. 조승현 기자 shcho@hani.co.kr옥정호는 섬진강다목적댐으로 생긴 거대한 인공호로, 임실과 정읍의 여러 마을들이 이 호수 아래에 잠겼다. 운암면 소재지 쌍암리는 실향민 이주단지로 조성된 마을이며, 호수 주변에 남은 길들 대부분은 옛 산길이다. 평평한 땅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축소된 고도표에서 보지 못한 오르막과 내리막이 톱날처럼 반복된다. 데미샘의 감동, 천천히 페달을 밟으며 생각을 다듬었던 기억은 물론 시원하게 내리막을 달리며 체력을 회복했던 몇분 전 일까지. 호수 초입 국사봉을 지날 즈음 모두 초기화됐다. 땀으로 다시 젖은 카키색 셔츠엔 여러 겹 흰색 소금 띠에 먼지와 꽃가루가 엉겨 붙어 곰팡이 핀 듯 황토색 분홍색 얼룩이 더해졌다.옥정호반 도로는 고부하 운동과 휴식이 쉴새없이 반복되는 고난의 ‘인터벌 훈련’ 코스지만 풍경은 기가 막힌다. 전주나 정읍의 동호인들이 운동과 관광을 겸해 많이 찾는 명당답다.*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옥정호 북단에서 강 하류로 가는 길은 운암교에서 분기한다. 다리를 건너면 제법 높은 고개인 밤재를 넘어 임실군 강진면과 바로 이어지고, 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정읍시 산내면 방향으로 호수를 크게 돌아 섬진강다목적댐과 만난다. 다리 건너 밤재를 넘는 지름길이 압도적으로 편하지만, 필자는 모두 돌아보려는 심산으로 다리 건너 섬진강 물문화관만 관람하고 정읍까지 크게 돌기로 했다.댐으로 생긴 인공호 주변엔 어김없이 물문화관이 있는데 깨끗한 화장실과 정수기를 이용할 수 있으니 자전거 여행자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다. 이런 세속적 이유 말고도 물문화관에는 댐 건설 전 주변 풍경과 생활상, 실향민들의 망향 등을 담은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자료가 있기 때문에 주변 경치만 둘러보는 걸로는 인공호 여행은 완성되지 않는다는 게 개인적 지론이다. 짧은 관람을 마친 뒤 시지프스의 고행을 이어갔다. 영혼을 조금씩 갉아먹는 것 같은 자잘한 오르막과 내리막들은 운암교에서 약 13㎞ 가량 떨어진 정읍시 산내면 소재지까지 가야 겨우 끝난다.섬진강 물문화관에 전시된 줄배 재현품. 속초의 갯배처럼 뭍에 고정된 줄을 끌어 이동한다. 조승현 기자 shcho@hani.co.kr땀과 열기로 몸을 담금질한 뒤에는 어김없이 영혼을 달래는 시간이 찾아온다. 드라마로 유명한 의녀 대장금의 고향으로 알려진 산내면부터 섬진강다목적댐 앞까지의 10㎞ 구간은 그야말로 ’호젓하고 평화로운’ 호반 도로다. 황홀한 풍경과 옷깃을 파고드는 시원한 바람에 방금 전까지의 고통은 쉽게 잊혀졌다. 규칙적인 페달링 도중 불현듯 찾아오는 망각은 괴로운 감정의 강물마저 쉽게 증발시키니 안장에 앉아있는 동안엔 고통의 바다에 침몰하는 일이 없다. 긴 자전거 여행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정읍시 산내면 소재지에서 섬진강다목적댐 방향 옥정호반. 조승현 기자 shcho@hani.co.kr경치는 좋지만 외딴 곳이라 수요가 많을까 싶은 주택단지, 대장금 관련 시설들을 지나 섬진강다목적댐 주변을 눈에 담았다. 옥정호의 깊이와 담긴 물의 양은 댐 바로 뒤에 만나는 내리막의 경사와 길이로 짐작할 수 있다. 막힘 없이 뻗은 긴 내리막, 페달에 아무 힘을 주지 않아도 자동차 제한속도까지 금세 치솟는다. 자극적인 속도감과 흥에 취해 과속하지 않도록 매우 주의해야 한다. 혼자 넘어져도 이곳에서는 대형 사고가 될 수 있다.섬진강다목적댐. 조승현 기자 shcho@hani.co.kr*섬진강 여행 하편에서 계속됩니다편집자주: 자전거를 타면 오르막의 저항과 내리막의 해방감, 순풍과 역풍의 질감을 온몸으로 받아들입니다. 지도는 화면 속 평면이 아닌 입체로 살아 다가오고, 여행자의 요동치는 심장은 매 순간마다 목적지가 아닌 길에 몰입하게 됩니다. 철판과 유리로 막힌 공간 안에서 느끼기 어려운 느린 여행 이야기를 전합니다. 비정기 연재조승현 기자 sh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