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자유공원에 남아 있는 옛 상무대 영창의 감방.광고오월길은 1980년 5월 광주항쟁의 흔적을 따라 걷는 66.2㎞의 길이다. 횃불, 희생, 광장, 열정, 영혼, 그리고 최근 추가된 ‘한강 작가 소년의 길’까지 6개 코스다. 길을 따라 주요 현장에 사적비를 세워 친절히 안내하고 있다. 광주광역시가 만든 스마트투어 앱 ‘5·18 민주화운동’을 따라 걸으면 편리하다. 5·18기념재단 홈페이지에도 오월길 안내 코너가 따로 있다. 광주에서 태어나 고교 시절 광주를 겪은 백기철 전 한겨레 기자가 오월길 이야기를 10여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오월길 광장 코스 종착점인 5·18자유공원은 상무대 옛터에 조성된 공원이다. 당시 군부대 영창이 남아 있다. 이곳 영창은 5·18민중항쟁 당시 계엄군에 붙잡힌 이들이 집단 수용돼 고초를 겪은 곳이다. 비인간적 처우, 악랄한 구타와 고문, 조작 수사로 수많은 이들이 고통받았다. 항쟁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5·18 고난의 역사가 이곳에서부터 시작됐다.공원 입구에는 널찍한 광장이 있다. 입구 왼쪽 길로 옛 상무대 표지석이 남아 있고 5·18 사적지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상무대 표지석은 1952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쓴 글씨라고 한다. ‘무를 숭상한다’는 뜻의 ‘상무’라는 말은 최근 광주에서 논란이 됐다. ‘상무대로’ ‘상무지구’ 등 상무대에서 따온 이름들이 여럿 있는데, 도시 정체성과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항쟁 당시 계엄군 지휘부가 상무대에 있었고, 진압작전 이름이 ‘상무충정작전’이었던 점 등으로 보면 상무란 명칭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일견 타당해 보인다.5·18자유공원의 영창과 법정은 인근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원래 자리에서 100m쯤 이동해 축소 복원했다. 몇 년 전 광주를 매주 찾을 일이 생긴 뒤 제일 먼저 가본 곳이 상무대 영창이었다. 46년 전 나도 이곳에서 지옥 같은 여름을 보냈다. 영창에서 보낸 두 달은 마치 동물원에 갇힌 짐승처럼 보낸 시간이었다. 우리에 갇힌 채 감시당하고 학대받는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상무대 영창을 둘러보면서 오월길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항쟁의 흔적을 따라 걸으며 과거와 현재의 오월을 되짚어보고 싶었다.광고5·18조사위 보고서는 1982년 육군본부 자료를 토대로 이른바 ‘광주소요’ 관련으로 검거된 이들이 모두 2577명이라고 적고 있다. 여기에 전국적으로 예비검속자 명단에 올라 영장 없이 체포되거나 검거된 정치인과 재야인사, 학생 등은 2699명이었다. 중복을 감안해도 5·18을 전후한 시기 연행·구금자는 5000명을 훨씬 웃돌았을 것이라고 보고서는 적고 있다. 이렇게 검거된 이들은 당시 합수단(치안본부·경찰서), 보안사(지역 보안대)뿐만 아니라 군부대(헌병대·상무대)에 구금됐고, 상당수가 불법 구금, 폭행, 고문 등 심각한 인권침해를 겪었다.몇십년 만에 다시 찾은 상무대 영창은 생각보다 작아 보였다. 연행자들로 북적일 때와 달리 한적했기 때문일 것이다. 철창 너머 마룻바닥으로 된 감방은 왜소해 보이기까지 했다. 감방 안으로 들어가 마룻바닥에 앉아봤다.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40년도 넘는 세월이 흐른 탓일 것이다. 영창 건물 옆 목욕탕, 면회실도 그대로다. 영창 마당 너머 정문 옆에 세워진 감시탑은 제법 위압적이다. 독일에서 보았던 나치 강제수용소의 감시탑을 떠오르게 한다.광고광고5·18자유공원 입구에 있는 옛 상무대 표지석. 광주광역시 스마트투어앱 ‘5·18민주화운동’ 갈무리.영창은 반원형의 커다란 공간을 부채살 모양으로 나눠 6개의 감방으로 배치했다. 앞쪽만 철장으로 터져 있고 뒤쪽 한켠에는 화장실이 있다. 중앙에 있는 헌병이 영창 내부에 수감된 이들을 한꺼번에 감시할 수 있는 구조다. 나무로 된 마룻바닥 방 한칸은 30명도 들어가기 힘들 만큼 비좁지만 계엄군은 150명씩 빽빽하게 밀어 넣었다. 1980년 5월27일 연행된 590명에다 기존에 연행된 3백여명까지 한꺼번에 수용하다 보니 틈이 없었다.영창 안내판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연행자들은 하루 종일 부동자세로 앉아 있어야 했고, 어떤 대화도 할 수 없었다. 정좌와 줄 세우기는 군대 영창의 통제 방식이다. 붙잡힌 시민들은 민간인이었지만 범죄를 저지른 군인과 같은 처우를 받은 것이다. 수감자들은 헌병들에게 모진 구타를 당했다. 수감자들이 구타와 함께 힘들었다고 말한 건 비좁은 공간과 굶주림이었다. 또 수감자들은 무더위로 창궐한 피부병 때문에 무척 고생했다. 피부병에 걸린 이들은 별도 소대로 격리됐다. 식사는 1인용 식기에 두 사람이 먹게 했다. 밥은 세 숟가락 정도밖에 주지 않아 굶주림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는 상무대 영창에서 식판을 마주한 두 사람이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어떤 사람들은 식판을 내려놓고 소리쳤습니다. 참을 만큼 참았어. 그렇게 네가 다 처먹으면 난 어쩌란 말이야.”광고고 최정운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명예교수는 ‘오월의 사회과학’에서 대학생과 노동자 출신 수감자들의 첫 번째 갈등은 음식이었다고 적었다. 학생·지식인들은 사회관계망을 통해 비밀리에 면회도 하고 사식도 가끔 접했지만 노동자들은 자신의 몸뚱아리 하나에 의존해 살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이 나눠 먹을 줄 모른다고 노동자들은 불만을 터뜨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양쪽은 접점을 찾아갔다. 학생들이 노동자 출신이 조사받는 데 도움을 주고 처우 개선을 위해 단식투쟁을 하는 등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상무대 영창에서의 고생담은 제법 많다. 많은 사람들이 길든 짧든 이곳을 거쳐 갔다. “가부좌를 하고 꼼짝도 못하게 했다. 눈동자만 돌아가도 철창 사이로 손을 내밀게 해 곤봉으로 손등을 내리쳤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통증이었다. 피하는 순간, 밖으로 끌려 나가 죽도록 맞았다. 좁은 방에 130명이 수감돼 있으니 칼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목욕은 며칠에 한 번, 1분 동안 물만 붓고 나오는 게 고작이었다”(경창수·당시 동신고 3년). “‘원산폭격’이란 얼차려를 너무 많이 받아 머리에 물집이 생기고, 그 물집이 굳어서 딱지가 됐다. 우리는 틈틈이 서로의 머리에 있는 딱지를 떼어주곤 했다”(오일교·당시 서석고 3년).내 기억이 무딘 탓이겠지만 상무대 영창에 있을 때 밥을 어떻게 먹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루 종일 말도 못하고 정좌한 채 앉아 있어야 했고, 뭔가 잘못돼 걸리면 철장 앞으로 나가 엎드려뻗쳐를 하면서 몽둥이찜질을 당하거나 곤봉으로 손바닥을 맞았던 일은 기억난다. 여기저기 쥐어터지며 철창에 동물처럼 매달리는 얼차려를 받기도 했다. 영창 밖 헌병대 식당은 밥 먹으러 간 게 아니라 수사관한테 조사를 받기 위해 한두번 갔던 것 같다. 당시 고교 2년생이던 나는 광주항쟁 직전 있었던 교내 시위 주동자로 분류돼 경찰 조사를 받다가 상무대 영창으로 넘겨졌다. 달리 조사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7월 초에 붙잡혀 들어가 9월 초까지 두 달 동안 갇혀 있다가 불기소 처분을 받고 석방됐다. 7월 초면 5월에 붙잡혀온 이들 중 일부가 훈방되기 시작하던 때다. 항쟁 직후와는 분위기가 조금은 달랐을 것이다.옛 상무대 영창 전경. 가운데 뒤쪽 파란색 문이 영창 내부 출입문이다.영창에 갇혀 수사받는 동안 가해진 구타와 고문, 터무니없는 조작은 많은 이들의 영혼을 무너뜨렸다. 마지막 항쟁 지도부였던 민주투쟁위 인사들은 5월27일 새벽 체포 직후 505보안대에서 집단구타와 고문을 당하며 “북한에서 온 간첩이라고 자백하라”는 식의 협박을 받았다. 보안대 수사요원들은 5㎝ 정도의 바늘처럼 가는 송곳으로 손톱 밑을 찔러대는 고문을 했다. 며칠 후 구타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이들은 상무대 영창으로 옮겨졌는데, 미리 짜인 각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광고민주투쟁위 기획실장 김영철은 5월28일 새벽 영창 뒤 구석의 화장실에서 날카로운 물체로 왼손 동맥을 끊은 뒤 모서리 콘크리트 벽에다 이마를 부딪쳤다. 5월27일 새벽 윤상원의 죽음을 직접 목격했고, 친형제처럼 지내던 박용준이 YWCA에서 계엄군 총탄에 희생됐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체포와 고문, 구타, 인간적 모멸감으로 인한 절망감으로 스스로 죽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김영철은 그 후 2개월쯤 뒤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18년여 동안 국립나주병원 등을 전전하다 1998년 8월 세상을 떠났다.5월17일 밤 예비검속됐던 전남대 복적생 정동년은 28일 새벽 헌병대 조사실에서 곤봉과 채찍으로 두들겨 맞으면서 김대중에게 5백만원을 받은 걸 시인하라고 추궁당했다. 계속된 구타를 견딜 수 없어 돈을 받았다고 시인한 정동년은 영창으로 돌아와서 날카롭게 간 숟가락으로 할복자살을 시도했다. 상무대 영창에서 고문이나 구타를 당한 이들은 오랜 세월 잠을 자지 못하는 후유증에 시달리거나 정신질환을 앓는 일이 많았다. 일상생활은 물론 취업도 할 수 없는 공포감과 피해의식 속에서 살아야 했다.한강 소설 ‘소년이 온다’에는 상무대 영창에서 식판을 나눠 먹던 두 청년의 슬픈 이야기가 나온다. 23살의 교대 복학생과 대학 신입생 김진수는 감옥에서 풀려난 뒤 10년이 지나도록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했다. 김진수는 도청에서 계엄군 총에 맞아 숨진 중3학생 동호의 현장 사진을 유서와 함께 가슴에 품은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리는 이따금 만나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하루하루의 불면과 악몽, 하루하루의 진통제와 수면유도제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젊지 않았습니다. 우리 자신조차 우리를 경멸했습니다. 우리들의 몸속에 그 여름의 조사실이 있었습니다. 흐느끼며 애원하고 구걸하는 낯익은 음성이 있었습니다.”영창 담벼락 옆으로는 예전 군사법정이 복원돼 있다. 오월항쟁 관련자에 대한 불법, 파행 재판이 이뤄진 곳이다. 9월이 되면서 항쟁 지도부와 주요 인사 등에 대한 대규모 군사재판이 열렸다. 기존 법정이 너무 비좁아 8월부터 부랴부랴 건물 한 채를 더 지었다. 지금 남아 있는 법정 건물이다. 법정 입구에 걸린 빛바랜 현판에는 ‘전투교육사령부 계엄보통군법회의’라고 적혀 있다. 법정 안은 깨끗하게 정돈된 전시관 같다. 마치 세트장 같은 느낌의 법정 모습이 오히려 당시 군사재판의 민낯을 보여주는 듯했다.옛 상무대 군사법정 입구의 현판.군사재판은 변호사 선임권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등 파행의 연속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정동년이 김대중에게 5백만원을 받았다는 시각에 당사자가 학원에서 강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5백만원 중 일부가 윤한봉을 거쳐 조선대 김운기에게 전달됐다는 공소 사실에 대해 김운기가 조선대의 자존심을 고려해 김대중으로부터 돈을 직접 받은 걸로 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담당 수사관은 ‘그것은 서울에서 내려온 각본에 없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해 재판정이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다.최후 진술에서 정동년은 “이번 광주사태에 길 가는 시민들을 붙잡고 정말 수괴가 있었느냐고 물어보십시오. 아마도 그렇다고 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정상용은 “지금 비록 어둡고 참담한 감옥에 갇혀 있지만 자유의 종이 한없이 울리는 민주 세상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라고 했다. 최후 진술이 이어지는 동안 방청석에서는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고재판관 중 한 명이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0월 하순 1심 선고공판에서 무더기로 사형, 무기징역 등이 쏟아지자 재판을 받던 이들은 애국가를 합창하기 시작했다. 부당한 재판에 대한 항의 표시였다.고 최정운 교수는 ‘오월의 사회과학’에서 “계엄사가 영창에서 시도한 일은 모진 구타와 고문, 그리고 배고픔으로 시민들이 투사가 되어 확인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박탈하고 생명을 구걸하는 비열한 짐승으로 만드는 일이었다”고 적었다. 최 교수는 “그러나 젊은 투사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가며 존엄성을 지키려 했고, 모진 고문과 배고픔으로 짐승처럼 살아남았지만 한때 맛보았던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영원히 빼앗아 갈 수는 없었다”고 적었다.나는 7월 초 학교에 등교했다가 학생주임 선생님 손에 이끌려 서부경찰서로 출두했다. 항쟁 직전 교내 시위 관련으로 간단한 조사만 하면 된다고 해서 갔지만 막상 그렇지 않았다. 그날 오후 눈을 가린 채 어디론가 끌려갔는데, 나중에 보니 505보안대였다. 거기서 하루 또는 이틀 밤을 지내다 상무대로, 그 동물원 같은 영창으로 보내졌다. 505보안대에 있던 날 오후 창밖으로 나는 새 한 마리를 보고서 문득 자유란 말을 떠올린 순간을 잊지 못한다. 상무대 영창에서는 연두색 교복을 입은 채 뒤늦게 끌려온 다소 어색한 수감자로 지냈다. 영창에서 나온 뒤 한동안 바닥에 기어다니는 벌레 한 마리, 파리 한 마리도 죽이지 못했다.글·사진 백기철 조선대 자유전공학부 객원교수 kckc100@naver.com(참고문헌)한강, ‘소년이 온다’(창비, 2014)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창비, 2017)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오월의 봄, 2012)광주서석고등학교 제5회 동창회 엮음, ‘5·18, 우리들의 이야기’(심미안, 2019)5·18민중항쟁고등학생동지회, ‘5월, 새벽을 지킨 소년들’(백산서당, 2023)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2024)강현석, “광주 곳곳에 박힌 ‘학살의 이름’ 상무···지우지 못한 ‘가해자의 언어’”(경향신문, 2026.5.15.)광주광역시 스마트투어 앱 ‘5·18민주화운동’5·18기념재단 홈페이지 org/base/main/view" target="_blank">https://518.org/base/main/view글쓴이 백기철은 광주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1980년 광주항쟁 때 고교 2년생으로 광주를 겪었습니다. 2023년까지 서울에서 ‘한겨레’ 기자로 33년간 일했습니다. 최근 2년여 동안 매주 광주를 찾을 일이 생겨 틈틈이 오월길을 걸었습니다. 그 사이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한강 작가의 작품을 따라 걷는 오월길은 더욱 애잔하면서도 명징했습니다. 오월길에서 접한 광주의 어제와 오늘 이야기를 담아 독자들과 만나려 합니다.
“그해 여름 상무대 영창, 동물원 같은…”
오월길은 1980년 5월 광주항쟁의 흔적을 따라 걷는 66.2㎞의 길이다. 횃불, 희생, 광장, 열정, 영혼, 그리고 최근 추가된 ‘한강 작가 소년의 길’까지 6개 코스다. 길을 따라 주요 현장에 사적비를 세워 친절히 안내하고 있다. 광주광역시가 만든 스마트투어 앱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