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길 광장코스의 505보안부대 옛 건물. 앞쪽 흰색 건물이 본관, 뒤쪽 벽돌 건물이 내무반이었다. 광고오월길은 1980년 5월 광주항쟁의 흔적을 따라 걷는 66.2㎞의 길이다. 횃불, 희생, 광장, 열정, 영혼, 그리고 최근 추가된 ‘한강 작가 소년의 길’까지 6개 코스다. 길을 따라 주요 현장에 사적비를 세워 친절히 안내하고 있다. 광주광역시가 만든 스마트투어 앱 ‘5·18 민주화운동’을 따라 걸으면 편리하다. 5·18기념재단 홈페이지에도 오월길 안내 코너가 따로 있다. 광주에서 태어나 고교 시절 광주를 겪은 백기철 전 한겨레 기자가 오월길 이야기를 10여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오월길 광장 코스는 광주공원 광장에서 시작해 5·18자유공원까지 이어지는 11.1㎞ 길이다. 양동시장, 농성광장 격전지, 505보안부대 옛터, 5·18기념공원, 상무대 옛터 등을 거친다. ‘민주인권을 외친 열사의 혼을 광장에서 만나는 길’이라고 돼 있다. 구도심에서 큰길을 따라 서쪽 신도심으로 걷는다. 시내 길이어서 걷기 수월하고 5·18민중항쟁 사적지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이어져 있다. 광주 지하철 1호선을 따라가는 길이어서 ‘지하철 투어’도 가능하다. 큰길 주변 사적지를 중심으로 조성된 광장과 공원은 시민들의 휴식처이기도 하다. 광주공원 광장에서 시작한 광장 코스는 광주천 천변길을 따라 양동시장으로 이어진다. 학창 시절 천변좌로, 천변우로라고 이름 지어진 이 길을 따라 시내를 오갔다. 청춘의 추억이 서린 길이다. 양동시장에서 돌고개역으로 가는 길은 이름 그대로 제법 가파른 고갯길이다. 농성 교차로에는 농성광장 격전지를 알리는 오월항쟁 사적비가 있다. 1980년 5월22일 광주에서 물러난 계엄군이 통제선을 설치하고 이곳 농성광장의 시민군 방어선과 대치하면서 인근 주택가에 무차별 총격을 가해 무고한 시민이 희생됐다. 곧게 뻗은 상무대로를 따라 20분 정도 걸으면 옛 국군광주병원이다. 당시 건물이 여러 동 남아있지만 아직 복원 중이어서 철망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다. 항쟁 당시 계엄군 병사들을 치료한 것은 물론이고 인근 상무대, 505보안부대 등으로 잡혀 온 시민들을 고문하고 구타한 뒤 이곳으로 옮겨 감시 아래 치료했다.광고 15분 정도 더 걸으면 5·18역사공원으로 조성된 505보안부대 옛터다. 광장 코스 8개 사적지 중 5번째에 해당한다. 지하철 1호선 쌍촌역 인근이다. 옛 위병소가 있는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으로 건물 두 개가 을씨년스럽게 서 있다. 하얀색 2층 슬래브 건물 뒤로 검붉은 벽돌로 된 2층 건물이 있다. 앞 건물이 본부, 뒤 건물은 내무반이었다. 검붉은 뒤 건물은 옛 남영동 대공분실 느낌이 난다. 이곳도 복원 중이어서 건물 주변으로 철망 울타리를 쳐 놓았다. 전두환이 사령관으로 있던 보안사의 전남분소 격인 505보안부대는 5·18 당시 진압의 실질적인 지휘 본부이자 고문 수사가 자행된 곳이다. 5·17 비상계엄 확대와 동시에 잡혀간 민주인사들은 물론 5월27일 도청에서 결사항전 하다 잡혀간 시민군 지휘부가 체포 직후 이곳으로 끌려와 고초를 겪었다. 이들은 나중에 상무대 헌병대 영창으로 옮겨졌다. 광고광고옛 505보안부대 본관 1층 복도. 오월항쟁 당시 이 건물 지하실은 악랄한 고문수사 장소였다. 505보안대 본관 지하실은 고문 수사의 본거지였다. 당시 계엄군에 잡혀 간 사람들은 505보안대 지하실의 악몽을 이야기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눈을 가린 채 이곳으로 끌려와 밤낮 없이 고문을 당했다. 5월27일 새벽 도청에서 붙잡힌 시민군 상황실장 박남선은 ‘무장폭도의 수괴’로 분류돼 벽과 천장에 아무 장식도 없이 흰 페인트가 칠해진 보안대 지하실 독방에 갇혔다. 발가벗겨진 채 사흘 동안 몽둥이로 매타작을 당했다. 보안대 수사요원들은 5㎝ 정도의 바늘처럼 가는 송곳으로 손톱 밑을 찌르는 고문을 하면서 ‘북한에서 온 간첩임을 자백하라’고 협박했다. 5월17일 밤 체포된 녹두서점의 김상윤도 지하실로 끌려 갔다. 컴컴한 지하실 복도에는 고문당하는 이들의 비명이 가득했다. 수사관은 김상윤의 정강이 사이에 작대기를 집어넣고 밟으면서 윽박질렀다. 1층 사무실로 옮기더니 네 명이 달려들어 다짜고짜 두들겨 패고 담뱃불로 팔뚝을 지졌다. 건물을 둘러싼 철망 틈으로 들여다 보이는 1층 복도는 음침하게 뻗어 있다. 그 아래 어두운 지하실을 가득 채웠을 그날의 비명 소리가 세월을 거슬러 들려오는 듯하다.광고 505보안대의 잔악한 고문 와중에 여성들의 말 못할 고통이 있었다는 건 뒤늦게 알려졌다. 당시 이곳에 끌려온 여성들이 성폭행과 성고문을 당했다는 것이 알려진 건 2018년 미투 운동이 본격화한 시점이었다. 2018년 5월 김선옥은 ‘한겨레’와 인터뷰를 통해 38년 전 아픈 상처를 꺼냈다. 오월 항쟁 당시 전남대 음악교육과 4학년이던 김씨는 운동권이 아니었다. 책을 사러 시내에 나갔다가 학생수습대책위 일을 맡아 도청에 들어갔다. 상황실에서 출입증, 유류보급증, 야간통행증 등의 업무와 안내 방송을 했다. 계엄군의 무력진압 직전인 5월26일 밤 도청을 빠져나온 김씨는 교생실습을 나갔다가 7월 초 학교에서 연행됐다. 폭행과 고문으로 점철된 조사가 끝날 무렵인 9월 초 수사관이 김씨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비빔밥 한 그릇을 사준 뒤 여관으로 끌고 가 성폭행했다. “그 전에 죽도록 두들겨 맞았던 일보다 내가 저항하지 못하고 당했다는 게 지금까지 비참했다”고 김씨는 털어놓았다. 꼬박 65일 동안 구금됐던 김씨는 다음날 기소유예로 석방됐다. 서울에서 딸, 사위와 함께 살던 김씨는 2018년 초 서지현 검사의 미투를 보고 실명 고발을 결심했다. 지금은 ‘열매’라는 5·18성폭력 생존자 모임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인권운동가로 거듭났다. 5·18 가두방송의 주인공 고 전춘심(1949~2021)도 2018년 5월 ‘한겨레’ 인터뷰에서 수사관들이 자신을 간첩으로 몰기 위해 잔혹하게 고문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5월19일 청년들과 동사무소에서 앰프를 가지고 와 가두방송을 시작한 전씨는 24일 계엄군에 붙잡혀 505보안대로 끌려갔다. 전씨는 “손가락 사이마다 볼펜을 끼워 넣고 두 손으로 쥐어뿔고…” “곤봉으로 나의 ‘여성’(성기) 쪽을 막 (때리며) ‘니가 처녀냐’고 했다”고 말하다 울음을 터뜨렸다. 전씨는 이후 매일 하혈을 했고, 결국 국군광주병원으로 이감됐다. 한강 작가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양장점 미싱사 선주는 항쟁 마지막 날 새벽 가두방송을 하다 계엄군에 붙잡혀 고초를 겪는다. 당시 상황을 증언해달라는 연구자 요청을 거절한 선주는 속으로 되뇌인다.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2년 동안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년이 온다’ 초판은 2014년 5월 발간됐다. 한강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오월 항쟁 당시 여성에 대한 계엄군의 성폭력 문제를 명확히 제기해 공론화했다. 5·18을 다루면서 소년과 여성이라는 우리 사회의 가장 약자인 존재들에 주목한 작가의 감수성이 놀라울 따름이다. 광고 5·18진상조사위 2024년 보고서는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을 조사해 모두 16건의 피해 사실을 확인했다고 적었다. 도심 시위진압작전 중 8건, 외곽봉쇄작전 중 3건, 광주재진입 작전 중 1건, 연행·구금·조사 과정 중 4건이다. 5월18일 오전 10시께 피해 여성이 친구 집을 나와 금남로 5가에서 광주일고 쪽으로 가던 중 7공수여단 병사들에게 강제 탈의와 구타를 당했다. 군인 5~6명이 달려와 피해자의 바지와 재킷을 찢고 남방까지 벗겨 팬티와 브래지어만 남은 알몸 상태를 만들었다. 피해자가 상체를 가리기 위해 몸을 웅크리자 진압봉으로 때리고 머리채를 잡아채면서 군홧발로 짓밟았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피해자가 유동삼거리를 걸어가던 중 갑자기 군용 화물차 1대가 오더니 군인 2명이 내려 총을 들이대며 차에 타라고 했다. 두려움에 떨며 주변 여성 2명과 함께 차에 탔다. 1시간가량 이동하더니 야산으로 끌고 가 여성 3명을 1명씩 틀어잡고 치마를 찢어 바닥에 눕혀 강간했다. 계엄군에 붙잡힌 뒤 조사받는 과정에서의 성폭력도 확인됐다. 당시 18살이던 피해자는 27일 새벽 도청 1층 상황실에서 붙잡혀 상무대로 연행됐다. 수사관이 다짜고짜 옷을 올리라고 해 상의를 올렸더니 옆 수사관이 브래지어까지 올려버렸고, 의자에 앉은 상태로 바지까지 내리라고 했으며 그 상태로 조서를 작성하는 성폭행을 당했다. 또한 조사를 받다가 화장실에서 병사로부터 강간당했다. 5·18진상조사위 보고서를 보면 오월항쟁 당시 사망자 166명 중 남성은 154명(92.8%), 여성은 12명(7.2%)이었다. 여성 사망자의 연령은 10대 6명, 20대 2명, 40대 1명, 50대 2명, 60대 1명이었다, 항쟁 과정에서 다친 상해 피해자는 모두 2617명이다. 이 중 여성 상해 피해자는 172명으로 7% 남짓이다. 5·18 당시 초반 시위와 무장항쟁을 남성이 주도했고, 계엄군의 강경진압 대상이 대부분 남성인 점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상해 피해의 심각성은 여성이 더 심했다. 장해등급 8급 이상의 중증 피해자 비율은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높았다. 남성 상해자 중 중증 장해자 비율은 11.6%인 반면, 여성의 경우 19.4%였다. 계엄군의 집단폭력 희생자로서 여성이 겪은 신체적 피해가 남성보다 더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5·18민중항쟁과 여성의 문제는 시대에 따라 바라보는 시각이 차츰 변모해 왔다. 2000년대 초반부터는 5·18에 대해 ‘피해자로서의 여성’ 이미지만 부각시키는 데서 벗어나 항쟁 주체로서 접근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항쟁 과정의 여성 피해에 대해 좀더 심층적으로 접근하는 한편, 역사의 능동적 주체로서 여성의 활동과 경험, 삶을 조명하는 접근이다. 강현아는 ‘5·18항쟁 역사에서 여성의 주체화’란 글에서 “여성들은 항쟁의 전 과정에서 활동했고, 항쟁 이후에도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도맡았다. 여성들은 취사 활동, 모금과 물품 접수, 선전·선동 활동을 중심으로 역할을 수행했다. 항쟁 역사에서 여성이 주체적 존재라는 인식전환이 필요하다”고 썼다. 항쟁의 무장투쟁적 특수성과 관련돼 남성 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항쟁에 대한 평가도 남성, 영웅, 조직 중심으로 구성돼 온 것을 비판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국립5·18민주묘지 추모탑 앞에 있는 두 개의 조형물, 즉 ‘무장항쟁군상’과 ‘대동세상군상’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동기 강원대 평화학과 교수는 “무장항쟁과 대동세상 조형물에서 여성 인물상이 각각 한 명과 세 명뿐이다. 여성의 참여를 이렇게 무시하는 형상화는 역사 왜곡”이라고 썼다. 두 군상은 각각 10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오월항쟁이 비록 총을 들고 싸우는 무장투쟁 중심이었지만 항쟁의 전 과정은 남성과 여성이 한데 어우러져 ‘절대공동체’를 꾸리며 불의에 저항한 것이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항쟁을 구성한 모든 이들의 역할과 참여를 고루 바라봐야 한다는 이야기다.5·18기념공원 광장의 지상 인물상. 세 명 모두 남성이고 여성은 없다. 남성 중심 5·18 서사의 한 단면이다. 오월길 광장 코스에 속한 5·18기념공원 중앙 광장의 추모 조각물인 ‘지상 인물상’도 마찬가지다. “5·18에 참가했던 분들의 용기와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고 돼 있다. 그런데 인물상에 있는 세 명은 모두 남성이다. 여성은 아예 없다. 두 남성이 부상 당한 한 남성을 부축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세 남성 모두 총을 들고 있지 않다. 남성 중심, 영웅 중심 서사의 단면이다. 게다가 세 남성은 아무리 봐도 한국 청년으로 보이지 않는다. 얼굴 모양과 체형 등이 전형적인 서구 남성이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여성들의 활동은 송백회와 카톨릭 노동청년회(JOC)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여성들은 옛 전남도청 인근 YWCA를 거점으로 하나의 구심점을 형성했다. 녹두서점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여성들이 규모가 커지자 YWCA로 옯겼고, 활동 인원은 50여명에 달했다. 모금, 취사, 궐기대회 준비, 유인물과 대자보 제작 및 배포, 가두방송 등의 활동이 추진됐다. 항쟁 이후 구속자 가족회와 유가족회 등을 중심으로 한 ‘5월 운동’은 여성들이 주도했다. 하지만 항쟁 당시는 물론 이후에도 여성들은 공식적인 정치적 조직에서 배제됐다. 항쟁의 역사가 정치적·조직적 영역의 남성 활동에 초점이 맞춰지고 여성 활동에 대한 가치 부여는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이다. 녹두서점 대표 김상윤의 부인 정현애는 5월27일 아침 계엄군에게 붙잡혀 상무대 인근 광산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 유치장 5개 방에는 각각 20명이 넘는 여성들이 잡혀 와 있었다. 100명이 넘어 보였다. 잡혀 온 여성들은 다양했다. 상무관에서 시신을 닦아주고 염을 해 주다 잡혀 온 이들이 있었는데 아방궁이라는 술집 여성들이었다. 시위에 참여한 여학생들, 시민군에게 김밥을 나누어 준 아주머니, 수배자를 숨겨주다 들어온 여성들도 있었다. 두 번에 걸친 훈방조치 이후 유치장에는 10여 명이 남았다. 도청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한 YWCA 조아라 회장과 이애신 총무, 가두방송을 열심히 하다 시민 신고로 간첩 혐의가 씌워진 전춘심과 차명숙, 도청에서 27일 새벽 방송으로 광주 시민을 울린 박영순, 도청에서 취사활동을 했다는 여학생, 도청에서 방송을 했다는 이유로 교생실습 중 잡혀 온 김선옥, 5·18 관련자를 숨겨 주었다가 잡혀 온 여성, 학교에서 5·18 때 부른 노래를 가르치다 잡혀 온 교사 등이었다.오월길 광장코스 양동시장 사적비. 주먹밥 모양 조각이 눈에 띤다. 항쟁 당시 시민들의 대동단결을 ‘절대공동체’로 처음 규정한 이는 서울대 정치학과 최정운 교수였다. 그는 ‘오월의 사회과학’에서 이렇게 썼다. “시민들은 남녀노소, 각계각층, 특히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 예를 들어 황금동 술집 아가씨들, 대인동 사창가 여인들이 공동체에 합류하는 모습에 환희를 느꼈다. 시민들은 물건 구입을 위해 모금을 벌이곤 했는데 그때마다 놀랄 만한 액수가 모였다. 시위대는 어디 가나 아주머니들이 김밥, 주먹밥, 음료수 등을 수고한다며 올려주었고 차 안에는 먹을 것이 그득 쌓이고 시위대는 전 시민의 뜨거운 성원에 확신을 갖고 결의를 다졌다.” 그 절대공동체의 한 축이 여성이었다. 박영숙은 ‘광주, 여성’에서 “5·18은 일상에서 정치나 이념이나 정의를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지 못한 평범한 여성들이 함께한 역사”라고 했다. ‘그녀들의 가슴에 묻어 둔 5·18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광주, 여성’에는 1980년 당시 10대에서 60대까지를 포괄한 여성 19명의 구술담이 담겨 있다. 그동안 5·18 관련 일들이 주로 ‘남성’ ‘당사자’ ‘열흘간의 시간’에 관심을 두었다면 이들의 구술담은 ‘여성’ ‘이웃’ ‘열흘 그 이전과 이후의 시간까지’를 담고 있다. 1980년 5월 주남마을에서 일용직 근로자로 생활하다 5·18을 맞은 김막님은 이렇게 증언한다. “많이 피해를 봤지만, 우리 마을 반장이 나라에서 다 거시기한 게 입을 딱 덮어 불자고 했어. 마을 앞에서 사람 몇 분이 죽었지라. 군인들이 반장 양반들한테 이 죽일 새끼들이라고 그라요. 어떻게 시신을 찾아갔냐믄, 군인들 소대가 사람들 모르게 가져갔어.” 양동시장에서 장사를 하다 5·18를 맞은 박수복의 구술이다. “그때는 어른이고 애들이고 차를 타고 다녔잖아요. 근디 애들이 막 굶고 댕겨. 그래서 양동시장 사람들이 ‘물하고 밥이 우선이다’ 해서 우리 동네 언니들이 밥을 했다 안 허요. 학생들한테 주먹밥 해다 줘야 쓰겄다고. 옛날에는 가마솥에다가 불을 때서 밥을 했잖애. 그래 갖고 소금물 묻혀 갖고 요로고 주먹밥 해서 김도 싸고 그랬는디, 난중에는 김이 없어.” 윤청자는 호남전기 여성 노동자로 들어가 JOC활동을 했다. 5·18 때는 도청에서 시신 수습하는 일을 했다. “5월27일, 우리가 마지막 밤까지 밥을 해주다가, 끝내는 그 애리디 애린 것들이 여자를 보호한다고 우리한테 ‘누군가는 살아남아서 이 소중한 역사에 대해 증언을 해야 되지 않것냐’고 무슨 선지자 같은 얘기를 하는 거야. 설득을 하면서 우리더러 가라는 거야. 그래서 우리는 살았지. 내가 어떤 일을 많이 했고 저기 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정말 그것 때문에 괴로웠지.” 김상봉은 ‘철학의 헌정’에서 오월항쟁 주체와 관련해 이렇게 썼다. “학생들이 봉기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해서 학생들이 주체라로 말할 수 없으며, 무장항쟁에 참여해 사망한 시민군들 가운데 기층민중이 상대적으로 많다 하여 그들이 항쟁을 이끈 주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남자들이 거리에서 싸우고 여자들은 뒤에서 주먹밥을 만들었다 해서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주체였다고 말할 수도 없다.” 결국 오월항쟁의 주인공은 당시 광주에 있던 모든 이들이었다. 세상의 절반이 여성이듯 5·18의 절반도 여성이었던 것이다. 글·사진 백기철 조선대 자유전공학부 객원교수 kckc100@naver.com (참고자료) 한강, <소년이 온다>(창비, 2014)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창비, 2017)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광주, 여성’(후마니타스, 2012)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오월의 봄, 2012) 김상봉, ‘철학의 헌정’(도서출판 길, 2015) 김상윤 정현애 김상집, ‘녹두서점의 오월’(한겨레출판, 2019)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2024) 강현아, ‘5·18항쟁 역사에서 여성의 주체화’(한국여성학, 제20권2호, 2004) 이동기, ‘원형복원’을 넘어 진본성과 방문객 관점에 기초해야(무등일보, 2023.10.30.) 정대하, “고문 뒤 석방 전날 성폭행”...5월항쟁 38년만의 미투(한겨레, 2018.5.8.) 광주광역시 스마트투어 앱 ‘5·18민주화운동’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https://518.org/base/main/view글쓴이 백기철은 광주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1980년 광주항쟁 때 고교 2년생으로 광주를 겪었습니다. 2023년까지 서울에서 ‘한겨레’ 기자로 33년간 일했습니다. 최근 2년여 동안 매주 광주를 찾을 일이 생겨 틈틈이 오월길을 걸었습니다. 그 사이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한강 작가의 작품을 따라 걷는 오월길은 더욱 애잔하면서도 명징했습니다. 오월길에서 접한 광주의 어제와 오늘 이야기를 담아 독자들과 만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