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구글 선호 매체 등록어린 소녀가 야무진 표정을 한 채 돋보기로 나무에 붙어 있는 사슴벌레를 관찰하고 있다. 자연 탐사의 첫번째 도구는 거창한 도구가 아니라 시선이다. 게티이미지뱅크 광고이정모의 함께 꽂아두면 폼나는 책 메뚜기를 잡으러 아프리카에 갔는데 메뚜기가 없다. 이보다 허탈한 일이 있을까. 낚시꾼이 강에 갔는데 물고기가 없고 천문학자가 망원경을 세웠는데 하늘이 계속 흐린 셈이다. 그런데 과학에서는 이런 일이 드물지 않다. 자연은 연구자의 일정표에 맞추어 나타나지 않는다. 논문 마감일도, 연구비 신청서도, 박사과정의 남은 시간도 자연은 알지 못한다. 마에노 울드 고타로의 ‘메뚜기를 잡으러 아프리카로’(해나무)는 바로 이 난감한 상황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사막메뚜기를 연구하기 위해 아프리카 모리타니로 향한다. 사막메뚜기는 때로 엄청난 무리를 이루어 이동하며 농작물을 먹어 치우는 곤충이다. 제목만 보면 곧장 거대한 메뚜기 떼와 맞닥뜨릴 것 같다. 하지만 어렵게 도착한 현장에 정작 메뚜기가 없다.광고 이 대목이 재미있다. 자연 탐사는 대개 성공한 뒤에 이야기된다. 새로운 종을 발견했다, 미지의 땅에 도착했다, 놀라운 이론의 단서를 찾았다. 그러나 실제 탐사의 많은 시간은 성공 이전의 시간이다. 기다리고 헤매고 빗나가고 다시 묻는 시간이다. 메뚜기가 없을 때 탐사자는 비로소 탐사자가 된다. 발견은 눈앞의 것을 집어 드는 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질문으로 바꾸는 일이다. 저자는 자연 탐사를 지나치게 근사하게 포장하지 않는다. 이 책에는 연구자의 생활고와 초조함, 현장의 시행착오, 우스꽝스러운 낙관이 함께 들어 있다. 과학자는 멋진 탐험복을 입은 영웅이 아니라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도 노트를 펴는 사람이다. 좋은 탐사자는 계획이 무너지는 순간을 실패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자료로 바꾼다. 광고광고이정모 제공 과학 탐험의 역사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찰스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샘터/리젬)도 처음부터 진화론을 향해 곧장 나아간 책은 아니었다. 젊은 다윈은 뱃멀미에 시달리며 남아메리카의 해안과 산맥과 숲을 돌아다녔다. 그는 화석을 줍고 새를 관찰하고 지질을 살피고 낯선 생물들을 기록했다. 그때의 다윈은 아직 ‘종의 기원’을 쓴 사람이 아니었다. 진화론은 먼저 몸으로 겪고 나중에 생각이 따라온 아이디어다.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자연을 보았다. ‘자연의 발명’(생각의힘)과 ‘훔볼트의 대륙’(을유문화사)은 자연 탐사가 단순히 희귀한 것을 모으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훔볼트는 산을 오르며 고도에 따라 식물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았다. 기온과 습도, 지형과 식생, 인간 활동과 자연환경을 따로 떼어놓지 않았다. 그는 자연을 목록이 아니라 관계로 보았다. 탐사는 결국 연결을 알아보는 일이다.광고 아리스토텔레스를 다룬 ‘과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 여행 라군’(동아엠앤비)은 더 오래된 출발점을 보여준다. 자연 탐사는 꼭 대양을 건너거나 밀림으로 들어가야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얕은 바다와 라군, 바위틈과 물웅덩이에서도 시작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눈앞의 동물을 보고 만지고 비교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틀린 설명도 많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자연을 직접 보려 했다는 점이다. 오래된 자연 탐사의 첫번째 도구는 거창한 장비가 아니라 시선이었다. 하지만 탐사의 역사에는 그늘도 있다. ‘야생의 심장 콩고로 가는 길’(바다출판사)을 함께 꽂아두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연 탐사는 순수한 호기심만의 역사가 아니었다. 낯선 땅에 들어가 생물을 채집하고 이름을 붙이고 표본을 가져오는 일은 때로 제국의 욕망과 맞물렸다. 누가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땅에 이미 살던 사람들의 지식은 어디로 갔는가? 오늘의 탐사는 그래서 과거보다 더 조심스러워야 한다. 탐사는 현장에서 끝나지 않는다. ‘박물관의 나비 트렁크’(프로네시스)는 오래된 표본이 어떻게 다시 질문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트렁크 안에 잠들어 있던 나비들은 단순한 수집품이 아니다. 채집지와 날짜와 이름이 붙는 순간 그들은 과거의 숲과 기후와 사람의 이동을 품은 기록이 된다. 한때 날개를 퍼덕이던 생물은 표본이 되어 멈추지만 질문은 멈추지 않는다. 그 나비가 살던 숲은 지금도 남아 있을까? 같은 종은 아직 날고 있을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를 다룬 ‘나보코프 블루스’(해나무)는 탐사와 관찰이 문학과도 얼마나 가까운지를 알려준다. 우리는 나보코프를 소설가로 먼저 기억하지만 그는 나비를 깊이 사랑하고 연구한 사람이었다. 나비의 날개 무늬를 들여다보는 일과 문장의 결을 살피는 일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둘 다 작은 차이를 알아보는 능력에서 시작한다. 자연 탐사는 이름을 붙이는 과학이면서 세계를 더 섬세하게 부르는 언어의 훈련이기도 하다.광고 ‘위대한 박물학자’(21세기북스)와 ‘진화론 산책’(살림)은 이 긴 계보를 한눈에 보게 해준다. 박물학자들은 혼자 세계를 바꾼 천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걷고 묻고 채집하고 편지를 쓰고 표본을 비교하고 앞선 사람의 기록을 다시 읽었다. 자연을 이해하는 일은 한번의 깨달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수많은 관찰과 기록이 쌓이고 실패한 탐사의 노트까지 나중의 생각을 떠받친다. 자연 탐사는 지금도 계속된다. 우리는 위성으로 지구를 내려다보고 유전체를 분석하고 인공지능으로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한다. 그래도 누군가는 숲으로 들어가고 갯벌에 무릎을 꿇고 사막에서 메뚜기를 기다린다. 자연은 데이터 안에만 있지 않다. 자연은 냄새나고 젖어 있고 도망가고 숨고 때로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자연 탐사는 멀리 떠나는 일이기 전에 오래 묻는 일이다. 메뚜기가 나타났을 때뿐 아니라 메뚜기가 없을 때도 질문을 멈추지 않는 일이다. 다윈의 항해, 훔볼트의 등정, 아리스토텔레스의 라군, 오래된 나비 트렁크, 나보코프의 푸른 나비가 모두 그 사실을 알려준다. 자연을 안다는 것은 자연을 소유하는 일이 아니다. 자연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모르는지를 인정하고 그 무지를 기록으로 바꾸는 일이다. 과학 커뮤니케이터이정모 과학 커뮤니케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