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구글 선호 매체 등록데이비드 솔로이(사진)는 부커상 수상 뒤 인터뷰에서 “살아있는 몸으로 세상 속에 존재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삶을 신체적 경험으로 다루고 싶었다”고 했다. 데이비드 솔로이 페이스북 광고피와 살을 품은 몸뚱이는 우리 삶의 전제 조건이자 제약 조건이다. 몸은 때로 자본이면서 상품이고, 충동이자 해방인 동시에 족쇄다. 지난해 부커상을 받은 데이비드 솔로이의 소설 ‘살’(FLESH)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피할 수 없는 그 무자비한 선고를, 체제 전환기 동유럽 도시의 변방에서 태어난 한 남자의 일생으로 풀어간다. 15살 헝가리 소년 이슈트반, 이제 막 성에 눈뜬 그는 작중에서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는 이웃집 ‘아주머니’와 관계를 맺으면서 어른의 세계에 내던져진다. 또래 여자아이로부터 “섹시하지 않다”거나 친구로부터 “너는 성욕이 약한가 보다”라는 말을 들은 것이 일종의 주술이 되었을까. 그는 어떤 제어장치도 없이 아주머니와의 관계에 빠져들고 ‘아주머니의 남편’을 우발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다. 거기엔 어떤 열정도 모략도 없다. 그저 몸을 가진 존재로서의 충동과 폭력만 있을 뿐이다. 이후 소년의 삶은 ‘깁스에 갇힌 손가락’처럼, 옴짝달싹할 새 없이 흘러간다. 소년원에 다녀오고, 입대해 이라크 전쟁에 파병된다. 소년원에 가서야 싸움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그에게 주어진 몇 안 되는 삶의 경로가 군인이었을 것이다. 전역 후 이슈트반은 영국으로 흘러가 스트립 클럽의 문지기로, 상류층의 사설 경호원으로 일하게 된다. 모두 몸뚱이 하나로 벌어먹는 일이다. 광고 런던에서 그는 고용주의 아내 헬렌의 눈에 띄어, 그의 삶을 파국으로 몰아넣었던 ‘밀회’ 속으로 다시 한번 빨려 들어간다. 헬렌의 남편 자리를 꿰찼으니, 이번에는 꽤 성공적인 것 같았다. 그는 탄탄한 육체 하나를 종잣돈 삼아 상류층의 세계에서 돈도 지위도 거머쥔다. 남편으로, 아빠로, 사업가로 우뚝 선 그는 아들을 보며 생각한다. 아들은 몸 쓰는 일보다 훨씬 “잘난 직업”을 갖게 될 거라고. 그렇게 “발전했다는 느낌”을 가졌던 그는 한순간에 모든 걸 손아귀에서 놓친다. 빼앗긴다. 아니, 이쯤 되면 언제 한번이라도 그가 모든 걸 손에 쥔 적이 있는지 의심스러워진다. 그는 그저 헬렌과 함께 뒷좌석에 앉아 “자신이 자리를 비운 운전석”을 보면서 “기웃거리는 느낌”, “남의 방에 들어와 있는 느낌”으로 살아왔다. “그때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말하기 힘들다”는 차가운 묘사대로, 그의 선택은 대개 주어진 상황에 대한 즉자적 반응이었을 뿐이다. 광고광고 데이비드 솔로이는 부커상 수상 뒤 인터뷰에서 “살아있는 몸으로 세상 속에 존재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삶을 신체적 경험으로 다루고 싶었다”고 했다.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 인간은, 이 세상에 내던져진다. 신의 아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 실존적 ‘피투성’의 조건 안에서 인간은 선택과 결단을 해 나간다는 게 근대의 믿음이라면, 솔로이의 인간은 내던져진 존재로서 조건반사적으로 몸의 이치 안에서 살아간다. 몸의 충동에 이끌려 관계를 맺고, 몸으로 거래되고, 몸이 늙어가면서 자본도 소진된다. 독자는 이슈트반의 반평생을 함께 하지만, 소설을 덮으면서도 그에 대해 알게 되는 바가 없다. 잔인할 정도로 불친절하고 건조한 서술은 이슈트반의 인간성과 독자를 단절시킨다. 헝가리에서의 소년기, 소년원 이후의 과도기, 이라크 전에서 친구를 잃은 이후의 삶, 런던에서의 비약적 신분 상승과 하강 등을 그린 각 챕터는 각각의 뭉텅이로 독자 앞에 던져진다. 소년원이나 이라크에서의 기억 등 우리가 보통의 서사 구조에서 정작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장면들은 지워진 채로…. “챕터 사이의 공백에서 일어나는 것이 챕터 자체만큼 중요한”(‘가디언’ 인터뷰) 이야기라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광고살 l 데이비드 솔로이 지음, 송예슬 옮김, 서해문집, 1만8800원 이 공백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독자는 그저 어림짐작할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 소설의 탁월함이 있다. 이 서사의 공백을 통해 독자가 각자의 소설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이슈트반은 그의 의붓아들이 비난하듯 “원시적인 남성성의 전형”일 수도 있고, 다친 부대원을 살리기 위해 누구보다 빨리 달려간 ‘전쟁 영웅’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저, 불안한 쾌락과 폭력 외엔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몸뚱이일 수도. 작가는 줄곧 인간의 공통 조건으로서 ‘육체’에 대해 말하지만, 세계의 변방에 속한 이슈트반의 계급적 정체성이야말로 그의 존재 조건 그 자체다. 물적 구조가 총체적으로 흔들리는 체제 전환기 동유럽을 떠나온 이주민의 정체성, 쇠락한 도시의 조립식 콘크리트 패널 주택단지가 암시하는 계급성, ‘과실치사’ 혐의로 소년원에 다녀오며 단절된 학력, 파병이라는 트라우마적 경험…. 솔로이가 남겨둔 공백들에서 독자는 안간힘을 쓰며 주인공을 이해할 단서들을 끌어모은다. 그러니까 그저 몸뚱이로서의 이슈트반은 육체적 충동에 충실한 남성 일반보다는, 가진 게 몸뚱이밖에 없는 존재로서의 하층민 남성을 가리키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이슈트반의 의붓아들은 나약한 약쟁이에 지나지 않지만 막대한 유산의 상속자다. 이슈트반과 달리, 그는 몸의 충동에 반응하며 살아가도 차고 넘치는 선택의 기회를 얻을 것이고, 삶은 통제 가능한 범위 안에 놓일 것이다. 이는 오랜 시간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들에서 반복돼 온 계급 이동 구조의 ‘젠더 뒤집기’ 서사라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2024년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아노라’에서는 우즈베키스탄 출신 여성 아노라가 애니라는 이름의 미국인 성 노동자로 일하다 신데렐라식 신분 상승을 꿈꾸지만 좌절된다. 소설 ‘살’의 주인공은 겉보기에 자신의 충동을 따라가는 남성이지만, 계급 이동과 실패를 다룬다는 점에서 성 노동자 아노라와 겹쳐 보인다. 자본의 성채에는 처음부터 그들에게 허락된 공간이 없다. ‘위대한 개츠비’의 시대는 끝났다. “유럽을 가로지르는 문화적·경제적 격차에 관한 소설”이라는 작가의 설명은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광고 다시, 이슈트반에게 남겨진 것은 몸뿐이다. 평생 그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던 엄마마저 떠난 후다. 그의 삶에서 일어난 일들을 증명할 증거도, 유산도, 증인도 없다. 그의 육체만이 살아남아 그 일을 기억할 것이다. “아무도 모르면 아무 일도 없는 셈이 된다.” 독자는 이런 문장 앞에서, 살아남는 일이 얼마나 쓸쓸한 일인지를 곱씹게 된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피와 살을 가진 몸, 한없이 부서지기 쉬운 [.txt]
피와 살을 품은 몸뚱이는 우리 삶의 전제 조건이자 제약 조건이다. 몸은 때로 자본이면서 상품이고, 충동이자 해방인 동시에 족쇄다. 지난해 부커상을 받은 데이비드 솔로이의 소설 ‘살’(FLESH)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피할 수 없는 그 무자비한 선고를, 체제 전환기 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