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경기도 여주 사육곰 농장에서 구조된 새끼 곰 ‘산들’과 어미 ‘해야’가 지난 21일 강원도 ‘화천 곰 보금자리’에서 나뭇잎을 먹고 있다.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 제공 광고 어린 생명은 갇혔어도 약동한다. 나무에 기어올라 매달리고, 뛰어오르고, 그러다 떨어지고. 엄마 몸을 놀이터 삼아 밟고 올라탄다. 고작 12.6㎡ 사육장이지만, 이쪽저쪽 끝까지 질주한다. 뽕잎, 질경이, 호박, 셀러리까지 닥치는 대로 입에 넣기 바쁘다. 그러다 갑자기 “방전된 듯 쓰러져” 잠들어 버린다. 4개월짜리 새끼 반달가슴곰 ‘산들’(수컷)의 일상이다. 지난 21일 강원도 ‘화천 곰 보금자리’에서 만난 사육곰 보호단체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의 최태규 대표는 산들을 이렇게 설명했다. “유아기 곰답게 세상에 궁금한 것, 무서운 것이 많아요. 그리고 아직 엄마한테 예의가 없어요. (웃음)” 어미 곰 ‘해야’(13살 추정)와 산들은 지난 5월 경기도 여주의 한 웅담 채취용 곰 농장에서 구조됐다. 두 마리는 한 줌 볕도 들지 않는 농장 안, 성인 한 사람이 간신히 누울 정도의 좁은 뜬장에서 지내왔다.광고 2023년 국회를 통과한 ‘야생생물법’(야생생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올해 1월1일부터 전국 모든 곰 사육 농가의 사육·번식·소유가 금지된 상황에서 지난 2월 새끼 곰 산들이 태어났다. 관할 환경청의 사전 허가 없이 국제적 멸종위기종인 반달가슴곰을 인공증식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농장주 ㄱ씨는 닫힌 농장 문 뒤에서 임의로 ‘불법 증식’을 벌였다.새끼 곰 ‘산들’과 어미 곰 ‘해야’의 구조 전 모습. 지난 5월4일 경기도 여주시 한 사육곰 농가에서 발견됐다. 김지숙 기자 정부의 압수 조처로 5월6일 두 마리는 민영 곰보호시설인 ‘화천 곰 보금자리’로 오게 됐다. 이곳은 2021년 6월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 등 동물단체가 사육곰 농장을 인수해 새로 지은, 국내 첫 사육곰 보호시설이다. 해야·산들을 포함해 현재 곰 16마리가 산다. 산들 말고는 모두 15~20살의 ‘어르신’들이다. 처음엔 여느 곰 농장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지만, 5년간 시설을 개선해 지금은 ‘곰숲’이라 불리는 두곳의 야외 방사장(700평, 100평)도 갖췄다.광고광고 바깥을 두려워 하는 나이 든 곰들 이날 오후 방사장엔 물놀이를 좋아해 ‘어푸’라는 이름을 얻은 곰이 산책을 나왔다. 한시도 가만있지 못 하는 새끼 산들과 달리, 걸음걸이가 느릿했다. “곰을 넓은 데 풀어주면 좋아할 것 같지만, 보통 안 그렇습니다. 무서워해요. 태어나 한번도 풀이나 흙을 밟은 적이 없거든요.” 처음엔 곰숲 곳곳에 먹이를 숨겨두고 “나오면 맛있는 것이 있다는 걸 알려줘야 했다”고 최 대표가 설명했다.광고 이곳에선 곰들이 지루하지 않게 폐타이어·폐소방호스를 활용한 해먹과 나뭇가지, 플라스틱 공 등으로 ‘풍부화’(다양한 냄새, 맛, 촉각 등으로 동물에게 신체적·정신적 자극을 주는 일)를 제공한다. 곰들의 방에 나무를 넣어주면 사용하는 데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새끼 곰 산들은 바로 나무에 기어오르는 등 ‘곰다운 습성’을 보였다. 화천 곰 보금자리 조아라 돌봄팀장은 “어미도 적응이 빨랐지만, 새끼는 거의 오자마자 새 환경에 적응했다”고 했다. 밖을 두려워하는 건 ‘화천 곰’만이 아니다. 지난해 9월 전남 구례에 문을 연 공립 사육곰 보호시설 ‘구례 곰 마루쉼터’의 곰들도 마찬가지다. 이곳에서 지내는 곰 28마리는 경기도 김포·연천·남양주, 충남 보령, 전남 구례 등에서 지난해 9월부터 지난 4월까지 차례로 구조됐다. 이 곰들도 아직 야외 방사장을 사용하지 않는다. 정우진 곰 마루쉼터 센터장은 “구조 개체 중 절반은 치아·눈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며 “중간 방사장에 나와서도 햇볕을 쬐거나 하늘을 보고 누워 있는 모습을 자주 본다”고 말했다. 지난달 21일 강원도 ‘화천 곰 보금자리’에서 곰 한 마리가 야외 방사장을 거닐고 있다. 김지숙 기자 광고지난달 21일 최태규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 대표가 신구대 반려동물학과 학생들에게 ‘화천 곰 보금자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지숙 기자 국립공원공단 남부보전센터에서 지리산 반달곰 생태계 조사·모니터링을 하던 그에게 활동적인 야생 곰과 달리 정적인 사육곰은 조금 낯설었다. 구례 곰 마루쉼터가 “나이 든 곰들의 요양원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겉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단독 생활과 높은 곳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사육곰 또한 영락없는 반달가슴곰”이라 했다. 하지만 현재 국내 농가 9곳에 남은 사육곰 219마리는 지리산 반달곰처럼 야생으로 갈 수 없다. 이들은 모두 ‘아시아흑곰’(반달가슴곰)으로 국제적 멸종위기종이지만, 정부 설명으론 다른 아종이다. 2004년부터 지리산국립공원을 중심으로 복원 중인 곰은 일명 ‘우수리반달곰’이며, 일본·동남아에서 수입한 사육곰은 ‘일본반달곰’ 등 다른 아종이란 것이다. 하지만 2012년 정부의 ‘사육곰 실태조사 및 관리방안 연구’에서 진행한 유전자 전수조사에서 일부 사육곰은 우수리반달곰과 높은 일치율을 보였다. 환경단체 녹색연합이 이런 이유로 ‘보담’이란 개체의 보호를 정부에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황준서 성공회대 사회융합부 조교수(사회학 전공)는 “지리산 반달곰 복원은 ‘단군신화’라는 민족적 형상이 덧대어져 있다”며 “토종·순수혈통의 경계는 곰뿐 아니라 인간 역시 모호함에도 동물에 ‘순수혈통 신화’를 투영해 야생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평생을 사육곰으로 지낸 이들을 ‘자연 방사’하는 것 또한 적절한 돌봄으로 볼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모자란 국내 보호시설…해외 이송도 추진 이 때문에 사육곰들의 해외 이송도 추진된다.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곰 전문가 그룹의 한국 대표로 활동한 정동혁 충북대 교수(수의학과)는 “자연보전연맹 활동 과정에서 국내 사육곰에 대한 국제 사회의 비난을 자주 접했다”며 “야생 곰 복원 사업과 열악한 사육곰 현실의 간극을 좁힐 균형점을 찾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2005~2022년 국립공원공단의 야생동물의료센터장으로 근무하며 지리산 반달곰의 종 복원 사업에 몰두한 학자로, 국제회의에 참가할 때마다 사육곰을 보호할 국외 기관을 찾아 문의해왔다. 2024년 덴마크 한 동물원이 보호 의사를 밝혀왔고, 이를 두고 동물단체 동물자유연대와 의논해 곰들을 출국시킬 수 있게 됐다.지난달 17일 전남 ‘구례 곰 마루쉼터’에 있던 우리나라 곰들이 덴마크 크누텐보르 사파리 공원으로 이동했다. 덴마크 현지에서 이동차량에 실린 곰들의 모습. 동물자유연대 제공 지난달 17일 우리나라 사육곰 6마리가 덴마크 남동부 ‘크누텐보르 사파리 공원’으로 이동했다. 곰들은 공원 내 계류장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동물자유연대 제공 두 번의 덴마크 현지 방문과 업무협약(MOU) 등 일년 반의 준비 끝에 지난 17일 구례 곰 마루쉼터에서 생활하던 곰 6마리가 덴마크로 떠났다. 11~16살인 곰들은 무사히 40시간의 이동 스트레스를 이겨냈고, 덴마크 남동부 마리보의 ‘크누텐보르 사파리 공원’(Knuthenborg Safari park)이 준비한 계류장(전염병 예방과 검역을 위해 일정 기간 동물을 격리수용하는 시설)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조희경 동물자유연대 대표는 “동물원 쪽이 우리 사육곰을 위해 준비한 면적이 7000평으로, 마리당 1000평이 넘는 셈”이라며 “소위 뜬장에서 태어나 한 번도 땅을 제대로 밟아보지 못한 곰들이 드디어 드넓은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라고 했다. 곰들은 계류장에서 일정 기간 적응한 뒤 숲으로 나간다. 45년간 이어진 웅담 채취와 곰 사육이 전면 금지됐지만, 곰들은 여전히 낡고 좁은 철창에 갇혀있다. 국내 운영 중인 사육곰 보호시설은 ‘화천 곰 보금자리’(16마리)와 ‘구례 곰 마루쉼터’(28마리) 두 곳뿐이다. 6월 말 현재 보호가 필요한 곰 219마리는 보호 방안이 확정되지 않았다. 정부가 충남 서천(70마리 수용 규모)에 짓고 있는 보호시설의 공정률은 56% 정도로, 사육동 3개소가 거의 건설됐다. 이곳이 올해 안에 문을 열고, 기후에너지환경부 산하 기관과 공영·민영 동물원을 최대한 활용해도 90여마리는 농가에 남아야 한다.정부가 충남 서천에 짓고 있는 사육곰 보호시설 항공 사진. 6월 현재 공정률 56%로, 사육동 3곳이 건설 완료된 상태다. 기후에너지환경부 제공 이 때문에 동물단체들은 곰의 ‘해외 입양’을 추진하는 한편, 국내에 또 다른 민영 보호기관을 마련하는 사업을 계획 중이다.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 동물해방물결 등 동물단체 4곳이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이 구례에 보유한 부지 1만2평에 사육곰 보호시설을 짓는 ‘우리곰 집짓기 프로젝트’를 조만간 시작한다. 최태규 대표는 “여론도, 농장도, 사육곰 산업을 끝내기를 바라지만, 사육곰을 꺼낸 뒤 보호할 공간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정부든 시민단체든 빨리 돈을 모아 충분한 보호시설을 지어야 비로소 웅담 채취 산업이 진정한 종식을 맺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