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읽어드립니다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0:00왼쪽은 드라마 ‘모자무싸’의 타이틀 디자인, 오른쪽은 ‘동국정운’ 본문 일부.광고유지원 | 타이포그래피 연구자·글문화연구소 소장‘나의 아저씨’에서 ‘나’는 이지안(아이유 분)이었고, ‘나의 해방일지’에서 ‘나’는 염미정(김지원 분)이었다. 박해영 작가의 최근작 ‘모자무싸(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서는, 주어가 ‘나’ 황동만(구교환 분)을 넘어 ‘모두’로 나아간다.‘나’라는 한 개인의 내면 흔적은 손글씨로 남겨진다. ‘나의 아저씨’와 ‘나의 해방일지’의 타이틀은 필체 성격의 글자로 표현되어, 마치 이지안과 염미정이 직접 손으로 쓴 것 같았다. 한편, ‘나’에서 ‘모두’로 인간이 나아가는 것은, ‘글씨’에서 ‘활자체’로 글자가 나아가는 것과 비슷하다. 사회적 규모가 달라진다. 영화제작 안팎을 다루는 드라마 ‘모자무싸’의 타이틀은, 황동만 개인의 손글씨가 아니라 활자체의 성격으로 표현되었다.광고고백하건대, 검은 사각형이 몇몇 글자를 강조한 ‘모자무싸’의 타이틀 화면을 처음 봤을 때부터, 내게는 줄곧 ‘동국정운’이 떠올랐다. 세종대왕께서 간행하신 그 책, 맞다. 모두는 자신의 직업병을 드러내고 싶은 충동과 이를 삼가려는 자제력 사이에서 싸우기도 한다. ‘모자무싸’를 핑계 삼아 나의 충동은 자제력을 제압하였고, 황동만처럼 아랑곳없이 나는 ‘동국정운’ 이야기를 할 것이다.‘동국정운’에서는 한자(漢字) 한 글자의 바탕에 검은 정사각형의 칸을 치고 글자를 희게 하여 흑백을 반전시키는 강조 기법을 썼다. 인쇄된 활자라 가능한 기법이다. 음각의 도장을 꾹 누른 것 같다. 한편, 서구의 로마자에서는 이런 강조 기법이 없지는 않지만 너무 강해 보이기 때문에, 주로 전체 대문자 처리, 볼드체, 이탤릭체 등의 강조 장치를 쓴다.광고광고흑백 반전의 강조 기법은 동아시아 문자의 공간 구성 방식과 관련 있다. 그림일기나 원고지처럼, 동아시아 글자 공간은 지면을 바둑판처럼 나눈 ‘칸’을 단위로 한다. 이런 공간 감각은 동아시아의 토지와 도시를 바둑판처럼 구획하는 생활 감각과도 무관하지 않다. 서구의 도시 공간이 길을 중심으로 하듯, 로마자에서는 칸 대신 줄을 친다.정사각형 한 칸을 채우는 것은 한 ‘음절’이다. 한글은 알파벳처럼 ‘ㅇ, ㅓ, ㅁ, ㅁ, ㅏ’의 음소로 나누어져 있으면서도, 음소를 모아서 다시 ‘엄’과 ‘마’라는 음절을 만든다. 한 음절 한 칸은, 한번에 발음되는 소리뿐 아니라 한눈에 인식되는 뜻의 단위와도 잘 호응한다.광고‘모자무싸’ 네 음절의 흑백 반전 강조에서도, 소리와 모양의 단위가 사각형 네 칸의 단위와 효과적으로 일치한다. 저 기나긴 제목은 축약되어, 입으로 발음하기도, 눈으로 식별하기도, 머리로 기억하기도 수월해진다.강조 기법을 쓰면 글자들 사이에도 위계가 생겨난다. ‘모자무싸’, 네 글자는 차별화된다. 그럼으로써 검색이 잘 되는 지위를 가진다. ‘검색되는 것’은 신인감독상 수상 소감에서 말했듯, 황동만이 그토록 바라던 일이기도 했다. 황동만의 꿈은 영화감독이었기에, 그는 이름이 ‘나’로만 머무르며 잊혀지는 것이 공포스러웠던 것이다.활자체는 개인의 글씨체보다 사회적 속성이 강하다. 드라마 타이틀에서는 글자들도 때로, 인간처럼 나름의 드라마를 펼쳐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