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읽어드립니다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0:002019년 2월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2차 북미 확대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 두번째)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오른쪽 두번째)이 배석자들과 함께 협상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그래픽 성기령 기자 grgr@hani.co.kr 광고2019년 6월3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의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반갑게 악수했다. 그해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회담이 아무런 합의 없이 결렬된 지 넉달 만이었다. 트럼프는 김정은의 제안으로 낮은 콘크리트 경계석을 넘어 북쪽으로 발을 내딛기도 했다. 둘의 덕담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문재인 대통령이 합류하면서 극적인 분위기가 절정에 이르렀다. 세 정상 모두 이 순간의 상징성을 잘 알고 있었다. 김정은은 트럼프에게 정중하게 “적절한 시점에 평양을 방문”해 달라는 초청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극적인 만남의 환호 뒤에 숨은 실제 기류는 사뭇 달랐다. 비공개 회담에서 북한은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가장 큰 불만은 “우리는 주기만 하고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는 느낌이었다고 뒷날 한 미국 관리는 회고했다. 앞서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북한은 장거리 미사일 발사 중단, 핵실험장 폐쇄, 위성 발사 시설 해체 등을 단행했는데 미국은 상응하는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회담에서 양쪽은 실무 협상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기대를 모았던 북미 관계는 불과 한달여 뒤인 8월 초,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계기로 다시 깊은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 트럼프는 싱가포르 회담에서 ‘전쟁 연습’의 중단을 약속했다. 그러나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을 비롯한 네오콘과 백악관의 대북 매파들은 이를 무시했다. 그 뒤로도 약 100건의 소규모 군사훈련이 이어졌다. 북핵 문제는 악화일로로 치달았고, 북한은 남북 관계마저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로 선언해 버렸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광고폴아웃 l 조엘 S. 위트 지음, 최종건·한석표 옮김, 메디치미디어, 3만8000원 미국의 동북아 안보 전문가 조엘 위트의 최신 저작 ‘폴아웃’(원제 Fallout)은 미국이 북한의 핵무장 억제에 실패한 이유를 미국의 대북 정책을 토대로 면밀히 분석한 책이다. ‘폴아웃’은 핵폭발 이후 방사능 낙진이나 파괴적 후폭풍을 일컫는 용어다. 책에서는 미국의 북핵 저지 실패에 따른 부정적 영향들을 함의한다. 지은이는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당시 미 국무부 관리로 협상단에 참여했고, 2002년 정부를 떠날 때까지 북미 합의 이행 업무를 담당했다. 이후로도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 스팀슨 센터 등 외교·안보 싱크탱크에 있으면서 북핵 문제의 이론과 실무에 두루 밝은 전문가로 꼽힌다. 북한 전문 분석 매체인 38노스(38North)의 공동 설립자이기도 하다.광고광고 지은이는 워싱턴의 정책 결정자뿐 아니라 서울, 베이징, 평양의 관계자를 포함해 300회 이상의 인터뷰와 방대한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북미 핵 협상의 전개 과정과 내밀한 뒷이야기들까지 세밀하게 재구성했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부터, 조지 허버트 부시, 빌 클린턴, 조지 부시, 버락 오바마, 도널드 트럼프까지 6명의 미국 대통령과 정부 관료들의 대북 인식, 정책 결정 과정, 역대 정부의 성향에 따라 해빙과 위기를 넘나든 순간들이 생생하게 재연된다.2016년 9월9일 인천공항 입국장에서 여행객들이 북한의 5차 핵실험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은이는 “지난 수십년 동안 북한의 외교정책을 추동하는 핵심 요인이 지정학”이었다고 말한다. 1990년대 초 김일성 주석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기로 결정했다. 주요 후원국이었던 소련이 붕괴하고, 혈맹 중국이 한국과 수교하는 등 냉전 종식에 따른 국제질서의 지각변동이 계기였다. 북한은 경제 현대화를 원했는데, 이를 위해선 서방의 지원뿐 아니라 막대한 군사비 지출을 민간 경제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북한 지도부의 핵 개발과 미사일 시험은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강압적 외교전략의 일부였다. 이런 구상은 외려 역효과를 불러왔다.광고 미국은 북한에 대한 고강도 압박과 제재가 북한의 정책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북한은 그런 방식으로 움직이는 나라가 아니었다. 미국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북 정책도 냉·온탕을 오갔는데, 최악은 대북 강경파조차 마땅한 대안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미국의 대북 강경파는 북미 대화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은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의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트럼프에게 “나쁜 합의보다는 차라리 합의가 없는 편이 낫다”는 브리핑을 주도했다. 뒷날 백악관의 한 관료는 “(볼턴이) 북한에 대한 압박을 계속 유지하고, 향후 어떤 진전 가능성도 차단하려 했다”고 돌이켰다.2018년 5월25일 북한이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폐기하는 모습을 외신 기자들이 취재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지은이는 미국 역대 정부가 북한의 비핵화에 거듭 실패한 이유를 ‘자만’과 ‘무지’에서 찾는다. 수십년간 미국이 자국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해오고, 상대국의 동기에 대한 이해와 전략적 공감 능력이 부족했던데다, 결정적 기회의 상실이라는 공통된 실패를 반복해 왔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특히 오바마와 트럼프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지적했다.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가 사실상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 발전을 방치한 결과를 낳았으며, 트럼프는 특유의 성급함으로 북핵 위기 해결과 북미 관계 정상화의 결정적 기회를 날려버렸다는 것이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북한 지도자들에 대한 현실주의적 평가다. 지은이는 북한 지도부를 비이성적이고 충동적인 ‘범죄 집단’으로 치부해 온 미국의 전통적인 인식을 비판하고, 이들을 지정학적 환경과 경제적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전략적이고 실용적인 행위자로 재조명했다. 지은이는 트럼프가 김정은과 직접 만나 대화하고 서신 또는 공개 메시지를 교환한 것에 대해서도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특히 트럼프 1기 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재임 기간이 겹친 2018~2019년은 북핵 문제 해결과 남북, 북미 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감이 어느 때보다 높았다. 2018년 4월 남북 정상회담(판문점)과 6월 북미 정상회담(싱가포르)을 시작으로 이듬해까지 각각 세차례나 남북과 북미 정상이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광고2018년 9월 19일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부인 리설주 여사가 남북 정상회담 둘째날 오후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열린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장에 입장한 뒤 환호하는 시민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지은이는 “북한 지도자들이 핵무기를 생존의 보루로 여기면서도, 미국과의 관계가 정상화된다면 이를 외교적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을 수 있다는 신호를 반복해서 보내왔다”는 점에 주목한다. 북한의 거듭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는 협상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압박 수단이었으나, 미국은 이러한 상대의 동기를 제대로 읽지 못한 채 ‘전략적 공감’이 결여된 정책을 되풀이했다. 책에는 공식 발표나 언론 보도로 알려지지 않은 협상단 발언과 현장 분위기, 정상 간의 서신이 다수 관계자의 증언으로 실려 생생함을 더한다. 2019년 6월 북미 정상의 판문점 회동의 후속 성과가 한미 군사훈련으로 물거품이 됐을 당시, 김정은이 트럼프에게 보낸 비밀 친서에서 “나는 우리가 가진 신뢰를 지키기 위해 현 단계에서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매우 기민하고 실무적으로 행동해 왔다”며, 미국이 ‘행동 대 행동’ 원칙을 지키지 않는 태도를 비판했다. 김정은은 “당신이 우리 관계를 오직 당신에게만 이익이 되는 디딤돌로 여기지 않는다면, 아무 대가도 얻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내주기만 하는 바보처럼 나를 보이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며 “이제 우리는 서두르지 않습니다”라고 통보했다. 문제는 이제 북핵이 협상을 통해 되돌릴 수 있는 단계인지조차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지은이는 상대를 악마화하는 접근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지난 30년의 실패를 직시하라고 요구한다. 북 한 지도자들을 “ 우리가 바라는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 상대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그래서다. 그들의 정권 안전 보장 욕구와 경제 발전 열망을 결합한 정교한 외교적 접근이 북핵 위기 해결의 최선책이라는 이야기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