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읽어드립니다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0:00전쟁 반대 평화음악회 때 나눈 텃밭 채소. 산새(강아지풀 텃밭) 제공광고이종건 | 옥바라지선교센터 활동가 오래전 일이다. 키우던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는데, 한 아이가 오래 버티지를 못하고 금방 떠나버렸다. 묻어줄 곳을 찾을 요량으로 동네 곳곳 공터를 찾아 돌아다녔다. 사유지가 아닌 곳에 묻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이 작은 생명체 누일 한뼘 여유가 없을까. 그러나 한참을 돌아도 마땅한 곳이 없다. 서울은 땅이 없는 도시다. 그렇게나 땅, 땅, 땅 하면서도 문자 의미 그대로의 땅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심을 곳도, 자랄 곳도, 묻을 곳도 없다.그런 서울 땅 곳곳, 특히 가난한 동네 골목을 거닐면 낡은 담벼락 아래 어김없이 투박한 화분에 흙이 가득 담겨있고, 겨우 고개를 내민 상추나 지지대를 간신히 붙잡고 자라는 방울토마토가 있다. 이 척박한 지경에도 굳이 굳이 먹을거리를 심어 본전도 건지지 못할 노동력과 관심을 투자해 기어코 싹을 틔워내고 만다. 그걸 텃밭이라 불러도 될까. 땅이 없는 도시에서 피워낸 결실이니, 나름의 경의를 더해 텃밭이라 부르기로 한다. 담벼락 아래, 옥상 빼곡히, 아파트 공터 자투리땅. 그곳이 어디든 사람들은 심고, 키우고, 먹는다. 그렇게 키워낸 것보다 더 저렴하고 큼지막한 채소들이 촘촘한 유통망 따라 동네 곳곳 상점 매대에 올라있어도, 그것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집요하게도 키운다.광고그렇게 키워낸 것은 상냥하다. 아니, 상냥하다기보다는 연약하다는 말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넉넉한 땅에서 나고 자라지 못했으니 작고 가녀리다. 그렇게 가까스로 자란 것을 먹으면 풍미보다는 녹듯이 사라지는 식감에 놀라게 된다. 도시의 맛이다.강정마을에 갔다. 제주와 오키나와, 그리고 대만을 잇는 무동력 항해를 위한 작은 요트를 구경했다. 그 요트에 사람 몇이 올라 수십여일, 수백여일을 오직 바람과 해류 따라다니며 반전·평화를 외친다. 굳이 무동력 항해일까. 맨몸의 인간 존재로도 저 멀리 인간 동지를 찾아 덧댈 수 있다는 단단한 자존감. 이질적인 콘크리트 문명에 내 존재 전부를 바치지 않아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존의 증거이자 기술. 몇년 전 그 요트에 올랐던 활동가 해초는 강정에서 오키나와, 대만을 향해 항해했고 얼마 전에는 동료들과 함께 가자지구를 향한 두번째 항해를 마쳤다.광고광고굳이 가지 말라는 곳을 가는 바람에 혈세를 낭비한다고 혈안들이다. 그러나 평화를 향한 인간의 욕망은 원초적이다. 바다에 뛰어들어 한껏 파도를 즐기는 이에게 왜 젖느냐 묻는 꼴이고, 땅에 씨앗을 심고 키워내는 이에게 그래서야 먹고 살겠냐며 핀잔을 주는 꼴이다. 원초적인 것은 금지할 수 없다. 전쟁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야말로 원초적이지 않겠냐며 되묻겠지만, 전쟁과 평화 양자택일의 원초적 욕망이라면 평화에 한표를 던지겠다. 자기 파괴적 욕망과 창조적 욕망이 회색 지대 없이 맞붙는 시절.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창조적 욕망에 한표를 던지겠다. 그러니, 언제고 다시 가자지구를 향하겠다는 해초와 동료들의 단단한 선언이 내게는 위로가 됐다. 이토록 엉망인 세상에서, 폭격의 굉음을 찢고 터져 나온 목소리가 상쾌하다.매주 일요일, 동료들과 홍대 거리에서 전쟁 반대 평화음악회를 열고 있다. 한 참가자가 파주의 텃밭에서 키워낸 쌈 채소들을 그날 따서 바로 가져왔다. 달팽이와 흙을 털어내 먹었다. 상냥한 맛이었다.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