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구글 선호 매체 등록 광고 지금 이 문장 우리는 과거가 자신의 몸속에 쌓여 있거나 그 축적의 서글픈 결과물이 현재의 나라고 믿곤 한다. 후회와 회한의 밤이 지나간 아침에 초라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 덩그러니 비치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는 이미 실재하지 않고 기억 한편에서 그 실패의 증언을 담당할 뿐이다. 말하자면 현재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과거가 실패한 것이다. 현재는 늘 새롭게 우리에게 말을 건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로부터 건져진 존재처럼 느껴진다. 집요하게 우리를 에워싸던 것들로부터 다행히 벗어나 지금 여기에 도착했으니 말이다. 마치 아침 태양이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진 어둠으로부터 사물 하나하나를 그 윤곽에 따라 정확하게 갈라내는 것처럼, 나 또한 씁쓸한 갈망과 차가운 상실로 한데 뭉쳐진 절망으로부터 나를 구원하는 데 이른 것이다. 광고불안의 서 l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배수아 옮김, 봄날의책(2014) 애초부터 세상은 그렇게 짜여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저것을 ‘포도’라고 부를 때, 이토록 빼곡하게 들어찬 만상 가운데에서 ‘포도’가 도려진다. 내가 누군가를 부를 때 군중들의 뒤섞임 속에서 오직 그가 뒤돌아보는 것은 이름이 그에게 던져진 그물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름은 섬세하고 정확하게 그가 아닌 것들로부터 그를 건져낸다. 한편 ‘저것은 포도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포도가 되기 전의 햇살과 빗물과 흙과 그것이 포도가 되기 위해 거쳐온 줄기와 잎의 시간을 잘라내는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투명하고 단단하게 묶여 있는 저 시간과 공간의 끈을 자르고 비로소 우리에게 포도를 건네는 것이다. 어떤 슬픔이 끝나지 않는 밤을 몰고 올 때마다 가만히 내 이름을 읊조린다. 그러면 나는 도려져 내가 된다.광고광고신용목 시인 신용목 시인신용목 l 시집 ‘우연한 미래에 우리가 있어서’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