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구글 선호 매체 등록서울 한 어린이집 모습. 연합뉴스 광고 김정석 |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인구와사회협동연구소장광고 한 어린이집에서 들은 이야기다. 아이 무릎에 작은 상처가 났는데, 부모가 곧바로 시시티브이(CCTV)를 확인한 뒤 민원을 제기했다고 한다. 교사와 원장은 상황을 소명하고 조사에 대응하느라 경황이 없었다. 부모 역시 놀라고 속상했을 것이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작은 사고도 곧바로 신뢰와 책임의 문제로 번지는 분위기다. 부모는 교사에 대한 믿음을 잃기 쉽고, 교사는 책임의 경계를 가늠하지 못한 채 흔들린다. 심리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현장을 떠나는 이도 있다. 씁쓸한 현실이다. 대화와 중재로 충분히 풀 수 있었던 갈등조차 이제는 민원과 날 선 책임 추궁으로 번지는 일이 적지 않다. 돌봄을 빈틈없는 관리 상품처럼 기대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분쟁을 조정할 기준이나 시스템의 부재가 맞물린 결과다. 물론 교사의 부주의나 관리 소홀, 미진한 대응은 엄중히 따져야 한다. 그러나 사고가 발생하면 관리 과정의 적정성을 살피기도 전에 교사의 책임부터 거론되는 일이 적지 않다. 아이 보호에 최선을 다해도 돌발 상황이 늘 있는 현장의 사정은 사고 앞에서 외면될 때가 많다.광고광고 돌봄을 관계가 아니라 규격화된 서비스로 이해할수록, 현장은 작은 실수도 허용되지 않는 압박 속에 놓인다. 부모는 아이의 안전에 모든 신경을 쏟기 마련이다. 아동학대 사건이 반복적으로 보도되고, 기관 내부 상황을 충분히 알기 어려운 조건에서 부모의 불안은 커질 수밖에 없다. 대다수 부모는 여러 아이가 함께 생활하는 공간의 한계와 그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크고 작은 사고의 가능성을 이해한다. 다만 불안이 커질수록 기관 돌봄에도 가정에 가까운 수준의 세밀한 보호를 기대하게 되고, 그런 기대가 현장에서는 암묵적 기준처럼 작동하기도 한다. 교사는 도달하기 어려운 기준을 맞추려다 지치거나, 애초에 감당하기 어려운 요구 앞에서 방어적으로 변하게 된다. 돌봄 현장의 성격도 달라지고 있다. 교사는 아이의 경험을 넓히기보다 혹시 모를 사고를 막고 민원 대응에 매달리게 된다. 실외 활동과 자율적 체험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갈등도 또래 관계 속에서 풀어가기보다 격리와 거리두기로 처리하는 일이 늘어난다. 보육 현장은 아이들이 어울리며 자라는 공간이기보다, 사고 예방과 민원 대응이 우선되는 관리의 공간으로 기울어 가고 있다. 교사는 지쳐 떠나고 부모는 불신 속에서 불안해하는 사이, 아이는 충분한 보살핌을 누리지 못하고 또래와 부딪치고 화해하며 성장할 기회도 잃는다.광고 이러한 문제를 다루려는 제도 논의가 이어지고 있지만, 속도와 팽창을 앞세워온 돌봄 정책의 한계는 여전히 남아 있다. 초저출산 위기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양육 지원의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보육·돌봄 서비스는 빠르게 확대되어 왔다. 하지만 시설 확충과 서비스 확대에 치우친 나머지, 현장의 갈등을 조정할 시스템을 갖추는 데는 소홀했다. 책임 범위와 판단 기준도 여전히 모호하다. 현장의 고충은 늘 정책의 속도에 밀려났다. 그 결과 교사는 아이를 돌보는 전문 인력이라기보다, 늘어난 수요를 감당하는 서비스 제공자로 여겨지기 쉬웠다. 돌봄을 둘러싼 판단 기준과 운영 원리를 재정비해야 한다. 무엇보다 통상적인 사고와 관리 부실을 가르고, 정당한 돌봄 과정을 보호하는 기준이 현장에서 일관되게 작동해야 한다. 불필요한 오해와 감정 소모로부터 보육의 본질을 지키는 장치도 함께 갖춰져야 한다. 또한 사고 발생 시 책임 소재를 가리기에 앞서 돌봄 사고를 공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체계도 필요하다. 이는 교사 개인에게 집중되던 결과 중심의 책임 부담을 덜고, 부모에게는 투명하고 객관적인 조사를 보장하는 공적 안전망이 될 것이다. 제도적 안전망이 갖춰질 때 부모와 기관 사이의 신뢰와 소통도 가능해진다. 부모에게는 안심을, 교사에게는 보호를 제공하는 기반 위에서야 아이의 성장을 함께 고민하고 돌봄의 무게를 나누는 관계도 자리 잡을 수 있다. 그 교사의 바람은 크지 않았다. 그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아이들을 차분히 돌볼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이다. 부모 역시 아이가 평온한 보살핌 속에서 자라길 바랄 것이다. 이 소박하고도 당연한 바람들이 서로를 향한 불신으로 어긋나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는 개인이 아니라 공적 안전망이 그 신뢰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지 않겠는가.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