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22일 런던의 영국 재무보고위원회(FRC)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진행한 모린 베러스퍼드 이사(오른쪽)와 브리짓 프레이터 선임정책담당자.광고코스피 상승과 함께 기업지배구조 개혁이 자본시장의 핵심 의제로 떠올랐지만, 법을 고치는 것만으로 시장이 바뀌지는 않는다. 기관투자자가 ‘남의 돈을 맡은 집사’로서 투자 기업을 감시하고 대화하며 주주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연성 규범, 곧 ‘스튜어드십 코드’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 한국은 2016년 코드를 도입한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본문을 최근 개정했다. 하지만 내년 1월부터 실제 적용을 앞두고 갱신 주기를 둘지, 점검 권한을 누구에게 줄지, 이에스지(ESG·환경-사회-지배구조)를 어디까지 요구할지 등 살펴볼 쟁점들이 많다.2010년 세계 최초로 스튜어드십 코드를 만들어 전 세계에 확산시킨 영국은 이 질문들에 15년간 답을 쌓아왔다. 코드의 제정과 이행 감독을 맡고 있는 영국 재무보고위원회(FRC)의 모린 베러스퍼드 기업지배구조·스튜어드십 담당 이사를 다시 만났다. 베러스퍼드 이사는 지난 4월 국제기업지배구조네트워크(ICGN) 서울 콘퍼런스 참석차 방한했을 때 한겨레와 첫 인터뷰를 했고(아래 상자기사 참조), 당시 미처 다루지 못한 쟁점을 보충하는 후속 인터뷰를 지난 6월22일 영국 런던에서 진행했다. 인터뷰에는 실무를 담당하는 브리짓 프레이터 기업지배구조 및 스튜어드십 선임정책담당자가 동석해 자신이 맡은 업무에 대해 설명했다.영국 재무보고위원회는 회계·감사 기준과 기업지배구조·스튜어드십 코드를 제정·감독하는, 정부와 연계된 독립 규제기관이다. 영국 스튜어드십 코드는 2010년 제정 뒤 2012년과 2019년, 2025년 세차례 개정을 거쳤고, 올해부터 새 코드에 따른 심사가 이뤄지고 있다. 이번 인터뷰에서 베러스퍼드 이사가 밝힌 핵심 메시지는 세 가지다.광고첫째, 한번 가입으로 평생 자격을 주면 기관들은 가입만 해놓고 스튜어드십을 잊어버린다. 영국처럼 매년 재심사가 부담스럽다면 최소 2~3년마다 갱신을 요구하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으라는 것이다. 정기 보고의 진짜 힘은 기관들이 ‘지난 한 해 실제로 한 일’을 생생한 사례로 공시하게 만드는 데 있다. 갱신 주기를 아직 정하지 못한 한국의 향후 논의에 시사점을 준다.둘째, 이에스지는 코드의 ‘목적’이 아니라 장기 가치를 만드는 ‘수단’이다. 영국은 2025년 개정에서 스튜어드십의 정의를 ‘이에스지 성과’에서 ‘장기 지속가능한 가치 창출’로 바꿨다. 규제기관이 특정 방식의 투자를 강요한다는 인상을 지우고, 기관마다 자기 투자 목적을 스스로 설명하게 하려는 취지다. 문구를 바꾼 뒤에도 기관들의 이에스지 보고는 줄지 않았다고 한다.광고광고셋째, 처벌 없이도 코드는 작동한다. 시장이 제재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재무보고위원회는 탈락 사유를 공개하거나 제재를 가하지 않는 ‘소프트 파워’ 방식을 쓴다. 대신 개정 코드에 연기금 등 자산소유자가 위탁운용사를 ‘선정-임명-모니터링’할 때 스튜어드십 성과를 따지도록 하는 전용 원칙을 신설했다. 코드에서 탈락하면 위탁 계약을 잃을 수 있다는 시장의 압력이 사실상의 제재로 작동하는 구조다. 다음은 일문일답.― 영국 재무보고위원회는 매년 서명기관 자격을 갱신하도록 한다. 한국은 아직 갱신 주기를 정하지 못했는데, 매년 갱신을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광고(베러스퍼드) “한번 가입으로 평생 자격이 유지된다면 기관들은 가입만 해놓고 스튜어드십을 잊어버릴 것이다. 매년 갱신이 시장에 너무 과도한 부담이라면, 최소한 2년이나 3년에 한 번씩 업데이트를 요구하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는 것도 방법이다.”(프레이터) “정기적인 보고서 작성이 중요한 이유는 기관들이 ‘지난 한 해 실제로 수행한 생생한 사례’를 공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스튜어드십이 말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스토리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다. 규제기관이 심사할 때도 문구 하나하나를 기계적으로 검토하기보다, 그 기관의 규모와 성숙도에 비춰 실질적이고 진정성 있게 이행하고 있는지를 ‘합리적인 질적 판단’으로 평가하는 것이 시장의 신뢰를 얻는 핵심이다. 스튜어드십은 단순히 반사적인 투표 행위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가치를 만들어가는 긴 여정이니까.”― 최근 영국의 코드 개정에서 스튜어드십을 정의할 때 이에스지 ‘성과’를 강조하던 문구를 ‘장기 지속가능한 가치 창출’로 바꿨다. 이유가 무엇인가.(베러스퍼드) “코드를 도입하고 몇 년간 실행한 뒤 시장의 의견을 수렴했다. 일부에서 기존 코드의 어조가 ‘운용사들이 모든 투자 건마다 예외 없이 구체적인 이에스지 성과를 내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돼 과도한 압박을 준다는 피드백이 있었다. 실제 환경이나 사회적 이슈가 목적인 투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투자도 많다. 그래서 규제기관이 특정 방식의 투자를 강요하는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 기관투자자들이 각자의 투자 목적을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자율성을 주고자 문구를 수정하고 하위 정의를 보완했다. 본질적인 동기는 보고서가 핵심 이슈에 집중하도록 간결하고 실용적인 틀을 만들자는 시장의 요구였다."광고(프레이터) “실제 보고서를 보면 여전히 이에스지 이슈를 다루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보고 형식을 규정하지 않는다. 일부 기관은 지속가능성 보고서나 이에스지 보고서를 영국 스튜어드십 코드 기준으로 작성해 제출한다. 중요한 것은 코드가 서명기관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게 아니라, 자산군과 지역 등 다양한 투자 형태에 따라 ‘어떻게 이행하는지’를 보여주는 프레임워크라는 점이다."― 문구를 바꾼 뒤 시장 반응은 어땠나.(베러스퍼드) “초기에는 이에스지의 우선순위가 뒤로 밀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실제로 있었다. 하지만 참여기관들이 코드 전문과 하위 지침을 면밀히 읽고, 우리가 여전히 이에스지 요소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을 이해하면서 우려가 가라앉았다. 지금도 참여기관들은 자신들의 구체적인 이에스지 목표와 활동을 적극적으로 보고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환경(E)과 사회(S)에 치중하다 보면 정작 시급한 지배구조(G) 개선이 가려질 수 있다는 걱정이 있다. 일부 기업이 환경과 사회를 잘한다고 내세워 낙후된 지배구조를 감추는 수단으로 악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베러스퍼드) “흥미로운 지적이다. 우리는 ‘기업지배구조 코드’도 함께 관할하는데, 공시 내용을 분석하다 보면 가끔 괴리가 발견된다. 보고서에서는 환경에 엄청난 열정을 쏟는 듯이 써놓고, 정작 재무제표를 보면 관련 자금 집행이 전무한 경우다. 영국 금융감독청(FCA)은 이런 격차를 줄이고 ‘위장 환경주의’(그린워싱)를 적발하기 위해 매우 엄격하게 점검한다.”― 한국에서는 스튜어드십 이행을 점검할 권한을 금융위원회 같은 공적 기관에 주자는 의견과 민간 기구에 맡기자는 의견이 갈린다. 어느 쪽이 나은가.(베러스퍼드) “우리는 소프트 파워를 활용한다. 스튜어드십 코드와 기업지배구조 코드 보고서를 모두 읽지만, 탈락 이유를 공개하거나 제재를 가하지는 않는다. 자발적 코드이고, 압력은 시장이 만들어낸다. 자산소유자들이 운용사에게 코드 서명 여부를 요구하기 때문에 굳이 공식 집행권이 없어도 작동한다.”― 영국 연기금들이 자산운용사를 고르거나 계약을 갱신할 때 운용사의 스튜어드십 성과를 반영하는 것이 이제 표준 관행인가.(프레이터) “이번 개정 코드에 자산소유자(연기금 등)가 외부 자산운용사를 선정·임명·모니터링하는 방식에 대한 전용 원칙을 신설했다. 덕분에 연기금들이 위탁운용사를 제안요청서(RFP) 단계부터 계약 갱신에 이르기까지 스튜어드십 성과를 꼼꼼히 따지는 문화가 크게 확산됐다. 코드 가입 여부가 일종의 ‘투명성 보증수표’로 작동하는 것이다. 나아가 연기금 보고서 서식에 운용사들이 지난 한 해 스튜어드십을 어떻게 이행했는지 구체적인 케이스 스터디를 제출하도록 요구해, 스튜어드십이 서류상 서약이 아니라 실제 비즈니스 계약을 좌우하는 실질 요소가 되도록 하고 있다.”― 의결권 자문사를 코드 참여기관으로 심사할 때 일반 자산운용사와 다른 기준을 적용하나.(프레이터) “차이가 있다. 영국 스튜어드십 코드는 하나의 코드 안에 두 개의 트랙을 갖고 있다. 하나는 ‘자산소유자·자산운용사’를 위한 원칙이고, 다른 하나는 ‘서비스 제공자’를 위한 원칙이다. 의결권 자문사들은 서비스 제공자 트랙으로 보고서를 낸다. 최근 개정을 통해 서비스 제공자의 업무 특성에 맞게 원칙을 대폭 간소화하고 맞춤화했다. 특히 의결권 자문사에는 제공하는 리서치와 권고안의 품질을 어떻게 보장하는지, 정보의 정확성을 어떻게 확보하는지 ― 예컨대 기업이 오류를 지적했을 때 어떻게 정정하는지 ― 에 초점을 맞춘 전용 원칙을 적용한다.”― 한국에서는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들이 도쿄 등 해외 지사를 통해 한국 기업에 의견을 내다 보니, 한국 지배구조의 특성이나 정부의 개혁 노력을 이해하지 못한 채 기계적인 ‘체크박스’식 반대 의견을 남발한다는 불만이 있다. 영국도 그런가.(베러스퍼드) “영국에도 비슷한 갈등이 있다. 기업들은 자문사 권고안에 불만이 많고, 주주총회 전에 반박할 시간을 달라고 요구한다. 위원회의 공식 권장 사항은 이럴 때 기업과 투자자가 중간 대리인을 거치지 말고 직접 소통하라는 것이다. 다만 투자자와 기업 수가 많다 보니 현실적으로 자문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소규모이거나 자원이 부족한 기관에는 다른 평가 기준을 적용하나.(베러스퍼드) “공식적으로는 동일한 기준이다. 다만 모든 신청서를 직접 읽으면서 기관의 규모와 성숙도에 비례한 판단을 내린다. 설립 5년이 된 소규모 운용사에게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과 같은 수준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공식적인 등급 구분은 없고 모두 내부적인 판단이다.”(프레이터)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중 하나는, 이제 상장주식 운용사뿐 아니라 채권 운용사 같은 다른 자산군도 서명기관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점이다. 채권 운용사는 의결권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권리와 책임을 행사하는가. 채권 발행 전 대화나 다른 메커니즘으로 설명하면 충분하다. 우리는 조직 전체를 총체적으로 본다.”― 재무보고위원회는 정부 기관인가.(베러스퍼드) “정부와 독립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준정부기관(arm's length body)이다. 정부 비즈니스부에 보고하지만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피규제 기관들이 내는 수수료로 운영된다.”― 최근 스튜어드십 코드 개정을 마치고 시행을 앞둔 한국의 금융당국과 관계자들에게 조언한다면.(베러스퍼드) “의견 수렴 과정에서 자산운용사와 자산소유자의 목소리를 정말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그리고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에 규제의 균형감을 잡아야 한다. 스튜어드십은 즉각적인 것이 아니다. 10년에 걸친 관여 사례가 있다면 그게 정말 의미 있는 것이다. 사례(examples), 경청(listen), 균형(proportionate) ― 이 세 단어로 요약하겠다.”베러스퍼드 이사는 지난 4월13일 서울에서 한겨레와 첫 인터뷰를 하고, 이튿날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국제기업지배구조네트워크(ICGN) 서울 콘퍼런스에 참석했다. 당시 인터뷰의 핵심은 영국 코드가 ‘어떻게 매년 살아 움직이는가’였다.영국의 코드 서명기관은 매년 이행보고서를 내고 지위를 재심사받는다. 심사는 단순 '체크리스트'가 아니라 구체적 사례와 성과를 요구하는 정성평가로, 기관들이 ‘자기 목표, 자기 서사’를 중심으로 보고하도록 유도한다. 15명의 심사 인력이 연간 300건 안팎의 신청서를 원칙별로 이중 검토하며, 탈락 기관뿐 아니라 통과 기관에도 서면·대면 피드백을 준다. 탈락 명단은 공개하지 않지만, 등록에서 빠지면 연기금 등의 위탁을 잃을 수 있어 시장이 사실상 제재 역할을 한다. 2025년 개정 코드는 이에스지를 코드의 목적이 아닌 장기 가치 창출의 ‘수단’으로 재정렬하고, 기관의 규모·역할에 맞게 요구 수준을 조절하는 ‘비례성 있는’ 이행 체계를 강조했다.▶관련 기사: “스튜어드십 코드 핵심은…‘체크리스트'보다 이행의 질”https://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1254314.html런던/ 글·사진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ESG센터 연구위원 bhlee@hani.co.kr
“처벌 없어도 시장 압력으로 작동”…영국 스튜어드십 코드의 힘
코스피 상승과 함께 기업지배구조 개혁이 자본시장의 핵심 의제로 떠올랐지만, 법을 고치는 것만으로 시장이 바뀌지는 않는다. 기관투자자가 ‘남의 돈을 맡은 집사’로서 투자 기업을 감시하고 대화하며 주주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연성 규범, 곧 ‘스튜어드십 코드’가 함께 작동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