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구글 선호 매체 등록지난 3월31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광화문 현판 토론회’에서 이상열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문화예술정책연구실장이 사회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광고박신규 | 시인 드물게 끼적이는 시작(詩作) 적바림(메모)조차 금세 버림받기 일쑤지만, 시를 쓰는 자로서 우리말에 진 빚은 갚기 어려울 만큼 무겁고 고맙고 눈물겹다. 모국어 중심주의자인 나에게 우리말은 순우리말, 한자어, 외래어를 다 품는 것이다.언어는 역사와 같다. 치열한 권력 투쟁을 거쳐 승리하면 정사에 기록되고 패배하면 야사와 구전처럼 뒷전으로 사라진다. 언어 투쟁의 장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언중의 입과 감수성이다. 낯선 단어들이 상당 기간 대중에 오르내리면서 자연스레 굳어질 때 비로소 표준어로 편입되는 것이다.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이 투쟁에서 승리한 외국어는 우리 일상과 한글 영토에 뿌리내리는 외래어가 된다.광고인공지능(AI)이 대세인 시대이다. 어쩌면 우리는 새로운 산업혁명 정도가 아니라 4대 문명에 비견되는 ‘신문명 발원’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지 모른다. 모든 영역에서 인공지능이 화두로 부상할수록 새로운 단어도 나열하기 벅찰 만큼 늘고 있다. 에이엑스, 맥스 얼라이언스, 피지컬, 버티컬, 소버린, 멀티모달, 프롬프트, 하네스…. 신조어는 물론이고 문학예술 영역에서 쓰는 하이쿠, 소네트, 포에트리 같은 말도 인공지능 용어로 재탄생했다. 얼마 전 ‘피지컬 인공지능’을 ‘물리적 인공지능’이라고 썼다가 촌스럽다는 말을 들었다. 아니 대체 왜 우리말이 촌스럽지?회의 내용이 당혹스러워서 오래 잊히지 않은 국무회의(1월20일)가 있다. ‘제조 AX(인공지능 전환)는 말이 어려워 M.AX를 쓴다’라는 산업통상부 장관의 발언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대통령이 X의 뜻을 묻고 “무지하게 어렵다”라고 반응한 것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을 것이다. 당연하다는 듯 영어(Transformation)의 약자를 쓰며 국민에게 그 어원(Trans=Cross=X)까지 강요해서야 쓰겠는가. 이날 문화체육관광부의 보고도 있었는데, 광화문 쌍현판(한글 현판 추가)에 대한 것이었다. 유연성과 시대성(세계성)을 반영해 추진한다는 문체부 장관의 말에 울림이 있었다. 광화문 현판의 변천사에는 한자와 한글을 오가며 뒤바뀐 배경이 있다. 문화유산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한자만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직접 광화문에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무더운 한낮에도,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光化門’ 아래에서 진행되는 수문장 교대식에는 인파가 몰리는데 외국인 관광객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들이 눈앞에서 보는 ‘光化門’을 한국어로 잘못 인지하는 일이 없도록 한글 현판도 함께 있어야 한다. 게다가 세종대왕 동상의 바로 등 뒤에서 ‘光化門’은 너무 버젓하지 않은가.광고광고전세계가 우리 문화(K-컬처)에 열광하고, 한국어를 촌스러운 것이 아니라 매력적으로 받아들이며 배우는 외국인이 점점 더 늘어가는 시절이다. 월드컵 개막 공연에서 가수 이재가 한국어로 노래를 불러 감동한 것도 불과 얼마 전이다. 이런 때에 정부 부처가 나서 영어 신조어를 유행시키자 하고, 또 다른 부처는 국내외에 널리 우리말을 장려해야 한다니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이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순화어(다듬은 말)를 지속적으로 발표하니 외국어 과잉도 문화의 기회비용과 세금 낭비로 이어진다. 그런데 순화어에서 정말 ‘감다뒤’(감이 다 뒤졌다)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 ‘페티켓’을 ‘반려동물 공공예절’로 권고한다는 게 대표적이다. ‘펫 에티켓’을 발음하기 편하게 3음절로 줄인 단어를 딱딱한 문어체 8음절로 대체하라는 건 어처구니가 없다. 나라면 멍냥법, 댕냥법(수칙)을 대안으로 삼겠다. 줄임말 감수성이 높은 젊은 세대의 여론까지 수렴해야 하는 국립국어원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음절 수의 경제성을 따지고 문어체, 구어체에 어울리는 감각적인 대체어를 고민하는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때늦지 않아야 한다. 유행한 뒤에야 뒷북치듯 순화어를 내놓으면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고 외래어만 더 늘리는 꼴이 된다.‘인공지능’과 ‘에이아이’, ‘피지컬’과 ‘물리 작동’은 한창 전투 중이나 이미 전세가 기운 듯한 쓴맛을 느낀다. 조류독감 AI에 더해 인공지능 AI가 뿌리내리는 형국이다. 생일상 차리듯 한글날에만 세종을 치켜세우며 우리말의 과학성과 우수성을 역설하지는 말자. ‘을씨년스럽다’의 어원은 우리 국권을 망가뜨린 시기인 ‘을사년’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제발 ‘소버린’하지 말고 ‘자주’하고 ‘자립’하고 ‘독립’하면 안 될까? 부디 ‘엑스’하지 말고 ‘전환’하자. 인공지능 대전환의 길목에서 쏟아져 나오는 단어들의 흙탕물에 쉽게 휩쓸리는 세태가 참으로 을씨년스럽고 을사년스럽다.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