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구글 선호 매체 등록한겨레티브이(TV) ‘뉴스 다이브’ 화면 갈무리 광고 홍원식 | 동덕여대 ARETE 교양대학 교수광고 세상에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랴. 출퇴근길에 무심코 듣는 아이돌의 노래도, 주말 밤 밤새워 정주행하는 디지털 플랫폼 화면 속 드라마도 다 시대의 공기가 스며든 ‘문화적 영토’이다. 대중문화라는 영토를 두고 은밀한 가치관의 주도권 싸움이 벌어지는 것 자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회적 현상이다. 하지만 이 흥미진진한 싸움의 진짜 주권자는 어디까지나 그 문화를 소비하고 즐기며 변주해 나가는 대중이지, 가슴에 금배지를 단 정치인들이 아니다. 최근 ‘무섭노’를 둘러싼 아이돌 사투리 논쟁을 보며 헛웃음이 나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인들의 말이 특정 아티스트를 겨냥한 게 아니었다고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이 발언은 대중문화가 작동하는 기본 문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투박한 침범’의 전형이었다. 요즘 젊은 세대가 사투리를 어떤 맥락으로 소비하고 노는지, 해당 발언을 한 ‘리센느’가 중소 기획사 출신으로 어떤 미학적 서사 속에서 대중적 설득력을 얻었는지 이해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어이없는 논쟁은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현상을 낡은 정치적 잣대로 뚝딱 재단해버리니, 결과는 애꿎은 아티스트와 팬덤만 피로하게 만들고 정작 자신은 정치적 자산만 깎아먹는 엉뚱한 짓이 되어버리고 말았다.광고광고 정치인들이 저지르는 가장 고질적인 착각은 ‘역사’와 ‘당위성’만 앞세우면 대중이 알아서 따라올 것이라는 오만함이다. 대중이 향유하는 문화의 영역은 정치적일 수는 있지만 정치와 별개라는 당연한 사실을 체질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조급함이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같이 정치의 오만이 대중의 정동을 건드리고 거센 반발을 불러오는 사례는 거듭 반복되어왔다. 그런데 문화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짜 비밀은 정치로부터 한걸음 떨어진 ‘상대적 자율성’과 ‘미학적 가치’에 있다. 아무리 올바르고 거창한 정치적 메시지라 할지라도, 맛없고 딱딱하게 교조적으로 던지면 대중은 단번에 고개를 돌린다. 세련된 예술적 완성도와 정서적 공감대를 통해 대중이 스스로 스며들게 만드는 것, 그것이 문화가 가진 고유의 힘이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이 섬세하고 영리한 생태계에 불쑥 나타나 매번 거친 도끼질을 해대며 판을 깨놓는다. 당연히 정치인 뜻대로 문화는 움직이지 않는다. 오히려, 냉정하게 말해서 그런 기대는 일종의 ‘꼰대 판타지’에 불과하다. 옛날 학원물 드라마나 계몽 영화를 보면 꼭 호랑이 교장 선생님이나 정의로운 장관이 나타나 호통을 치고 매를 들며 학교와 세상을 하루아침에 뜯어고치는 해피엔딩이 나온다. 참 안타깝지만, 현실 세계에선 그런 마법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권력을 쥔 어떤 힘센 정치가도, 대중과 학생들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고 뜯어고치지 못한다. 역사가 이미 증명하지 않았는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촘촘한 반공보수 권위주의 교육을 받으며 자란 세대가 바로 지금의 86세대, 즉 현재 민주진보 진영의 ‘코어’들이다. 당시 독재정권이 짜놓은 판타지대로라면 반공 영화를 단체 관람해야 했던 그들은 완벽한 보수 전사가 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억압적인 정치적 문법과 교조주의로 대중의 생각과 문화를 지배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강력하고 영리한 반발의 ‘코어’를 키워낼 뿐이다. 50대 중반인 나 자신을 포함한 자칭 민주진보 세력이라고 믿는 꼰대들은 이 거대한 판타지에서 완전히 깨어나야 한다. 젊은이들을 향해 “너희는 왜 이렇게 역사의식이 없냐”, “왜 사회적 당위성에 무관심하냐”며 혀를 차는 것이 과연 무슨 도움이 되었나. 정치적 서사에 갇혀서 문화 영역의 맥락을 읽지 못하고 사투리 꼬투리를 잡는 모습은 그 계몽주의적 태도의 연장선이다. 정치가 문화라는 영토에서 대중의 신뢰를 얻고 싶다면, 억지로 아는 척하며 다가설 게 아니라 그 자율성을 존중하며 기꺼이 한걸음 물러서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대중문화 전쟁의 승패는 투박하고 무지한 칼춤이나 출퇴근 지하철역 앞에서 선거 로고송에 흥분하여 몸을 내던지는 막춤이 아니라, 차별을 막는 제도적 장치와 문화의 자율성을 지켜주려는 섬세한 뒷받침에서 갈리는 법이기 때문이다. 정치인 어르신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충분히 알겠으니, 이제 마이크는 대중과 아티스트에게 돌려주시고 제발 법과 제도를 만드는 국회로 돌아가 자기 일을 하시라 간곡히 당부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