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언어학자가 한글로 쓴 문명사 “문자 단일기원설은 서양 패권주의” 한글, 한자문화권에서 독보적 문자 “AI 시대엔 문해력보다 판별력 중요”광고언어학자 로버트 파우저가 지난달 2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개막한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신간 `문자 전파담'을 들어 보이고 있다. 주변의 관람객들은 이미지 프로그램을 이용해 흐릿하게 처리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광고17세기 초, 유럽 학자들은 이란에 있는 거대한 폐허가 고대 도시 페르세폴리스(기원전 6~4세기)의 유적임을 확인했다. 건축물 곳곳에는 알 수 없는 도형 기호들이 새겨져 있었다. 훨씬 앞서 기원전 3500~3200년께 메소포타미아 지역 수메르에서 등장한 쐐기문자에서 파생된 문자였다. 오늘날 이라크 남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비옥한 저습지에서 손으로 빚은 점토판에 갈대 줄기로 그림을 새긴 게 쐐기문자의 시작이다. 이와 별개로 이집트에서 상형문자가 출현한 것도 그즈음이다. 19세기 들어서는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쐐기문자 점토판들이 대량 발굴되기 시작했다. 지금껏 알려진 가장 오래된 문자 기록의 역사는 최소 52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다. 미국 출신 언어학자 로버트 파우저가 문자의 등장과 발달, 전파 과정을 시공간을 종횡하며 살피고 그 의미를 탐구한 ‘문자 전파담’을 출간했다. 수메르 쐐기문자부터, 고대 페니키아 문자에서 파생된 그리스·라틴·키릴·아랍 문자, 중국의 갑골문자와 한자, 인도의 브라흐미 문자, 아메리카 대륙의 마야 문자, 일본 히라가나와 가타카나의 시원인 만요가나, 한반도의 이두·향찰과 한글, 나아가 오늘날 전세계 스마트폰 화면을 채우고 있는 디지털 이모티콘까지 ‘문자의 생성과 전파를 통해 새롭게 읽는 세계 문명사’다.광고광고원통형 인장이 날인된 쐐기문자 점토판. 기원전 3100~2900년께 제작된 것으로, 곡물 회계와 행정 관련 내용을 기록했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왼쪽). 이집트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5세(기원전 210~181년)의 카르투슈 비문.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가 단순한 뜻글자가 아니라 음가와 기호를 1대1로 대응한 표음문자 체계임을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됐다(오른쪽). 혜화1117 제공 ‘문자 전파담’은 파우저가 한국에서 펴낸 다른 책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어로 집필”한 일곱번째 책이다. 파우저가 한국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82년 여름이다. 당시 일본어를 공부하는 대학생이던 그는 일본에서 여름방학을 보내던 중 한국을 방문했다. 처음 본 한글은 “문자라기보다 그저 신기한 이미지”였다. “일본 문자가 너무 복잡하고 어려웠던” 것에 견줘 “한글은 처음 배울 때부터 정말 쉬웠다”. 공부할수록 “세상 모든 문자 가운데 가장 쉽고 편한 문자라는 생각”을 하게 될 만큼 한글에 깊은 매력을 느꼈다. 파우저는 미국에서 대학(학부)을 마친 뒤 서울대 언어교육원에서 한국어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대학원에서 응용언어학을 공부한 뒤 다시 한국에 건너와 고려대와 카이스트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짬짬이 한문과 중세 한국어까지 익혔다. 2008년에는 영어가 모국어인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서울대 국어교육과 전임교수로 임용돼 2014년까지 강의했다. 그동안에도 한국의 여러 도시와 오래된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한국 문화 전반에 탐닉했다. 교수직을 그만두고는 독립 연구자로 지내면서 `서촌 홀릭'(2016)을 시작으로, `외국어 전파담'(2018), `로버트 파우저의 도시 탐구기'(2019), `외국어 학습담'(2021), `도시는 왜 역사를 보존하는가'(2024)에 이어 `문자 전파담'(2026)까지 쉼 없이 책들을 쏟아냈다. 로버트 파우저 박사가 한국어로 지은 저서들. 최현수 기자 emd@hani.co.kr 그가 지난달 24일부터 닷새간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26 서울국제도서전’을 앞두고 다시 한국을 찾았다. 도서전 개막일에 맞춰 행사장의 출판사(혜화1117) 부스에서 그날 막 인쇄돼 나온 신간을 선보였다. 26일에는 저자 사인회로 독자들과도 만났다. 앞서 22일 한겨레신문사에서 파우저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엔 언어학적 측면에서 문자에 대한 책을 쓰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까 문명사 방향으로 흘러갔고 스케일도 커졌습니다. 이번 책을 쓰면서 가장 많이 배웠어요.” 문자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니 언어학의 영역을 넘어 인류 문명 전체를 다시 바라보게 됐다는 것이다.광고 전작 ‘외국어 전파담’에서 언어의 이동을 살핀 데 이어 ‘문자 전파담’은 문자의 이동을 다뤘다. 두 책은 어떤 점에서 이어지고 어떤 점에서 다른 걸까? “외국어라는 개념 자체가 사실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어요. 학교에서 외국어를 정규 과목으로 가르친 역사는 200년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 이전에는 외국어라기보다 문명어와 그 문자를 배운 거죠. 서양에선 라틴어, 동아시아에서는 한문이었어요. 조선시대에 한문은 선비들이 글을 쓰고 조선왕조실록을 기록한 문자였어요.” 일상어로서의 외국어 교육과 학습이라는 개념은 산업혁명 이후에야 나타나 정착했다는 것이다. 반면 문자는 다르다. “문자는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중국 같은 고대 문명권에서부터 발달해왔기 때문에 역사적 시간이 훨씬 길어요. 또 언어는 사라지지만 문자는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말보다 훨씬 영향이 크죠. 문자 기록이 문명의 발달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로버트 파우저 박사가 22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현수 기자 emd@hani.co.kr 파우저가 이번 책을 쓰기 위해 참고문헌들을 검토하며 새삼 확인하고 놀란 것은 ‘문자 패권주의’였다. 언어와 문자 연구에서도 “서양 중심주의 시각이 너무 오래 지속됐던 게 숨 막혔다”고 했다. “20세기 중반 (아시리아의) 한 언어학자는 ‘모든 문자는 수메르 쐐기문자에서 나왔다’(문자 단일 기원설)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이 그때부터 20세기 내내 영향을 미쳤어요. 고대 이집트가 (메소포타미아에서) 문자라는 아이디어를 빌릴 수는 있었겠지만, 문자 자체가 전혀 다릅니다. 한자가 쐐기문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고요.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중국 사이에 교류가 있었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하나도 없거든요.” 파우저는 오늘날의 연구 성과를 보면 그런 설명이 설득력을 잃었다고 말한다. “일종의 오리엔탈리즘, 서양의 우월감, 19세기 식민지 점령, 이런 것들과 연관이 있는 거죠.” 유럽과 동아시아 사이에 놓인 광대한 지역은 문자의 이동과 변형, 경쟁과 융합이 끊임없이 일어난 공간이었다. 파우저가 주목한 문자 전파의 핵심 동력은 ‘제국’과 ‘종교’다. 그 팽창이 유라시아 대륙의 한복판을 가로질렀고, 문자가 따라 흘렀다. 제국은 행정과 통치를 위해 문자를 확산시켰다. 그러나 문자 정책은 제국마다 달랐다. “영국은 인도를 지배하면서 산스크리트어나 힌디어를 표기하던 ‘데바나가리’ 문자를 없애지 않았어요. 반면, 일본은 조선에서 공식 교육과 문헌에 일본어를 사용했고 학교에선 조선어 교육과 한글 사용을 금지했어요.” 문자를 통제하는 것은 단순한 언어 정책이 아니라 기억과 정체성을 통제하는 일이기도 했다.1500년께 잉글랜드에서 필사한 ‘위클리프 성경’의 시편. 혜화1117 제공 옛소련의 사례도 흥미롭다. 레닌은 중앙아시아 여러 국가의 통합을 위해 라틴 문자 사용을 허용했지만, 스탈린은 키릴 문자를 강요했다. “소비에트 연방 전체를 러시아 민족주의 안으로 흡수”하려던 동화 정책이었다. 종교 역시 문자 확산의 강력한 매개였다. 그러나 때로는 반대 방향으로 작동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마야 문자를 ‘악마의 문자’라는 이유로 금지하고 기록을 파괴했습니다. 이교도들을 기독교화하려면 문자도 없애야 한다고 한 거죠.” 외세의 점령과 지배가 막을 내리고 모국어를 되찾은 뒤에도 점령자들의 문자는 살아남아 쓰이는 경우도 있다. 왜 그럴까. 파우저는 포스트 식민사회의 ‘실용성’과 ‘문화적 위신’을 꼽았다. “제국의 언어와 문자가 품위, 교양, 또는 문화적이라는 생각은 남아 있는 거죠. 그리고 문자가 없던 언어권에선 현실적으로 문자가 필요한데, 대안이 없으면 과거 지배자들의 문자를 계속 사용하는 거죠. 식민지에서 독립한 나라 중에는 그런 곳이 많아요.” 파우저는 한반도에는 한글이라는 고유 문자가 있었던 까닭에 집단 정체성을 유지하는 큰 힘이 됐다고 덧붙였다. 그가 세계 문자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토착화 사례’로 한글을 꼽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자의 토착화는 어떤 집단이 사용하는 언어에 맞게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겁니다. 중국은 커다란 문명이었고, 한반도와 주변 나라들이 한자 문화권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조선은 중국과 가까운 관계였는데도 과감하게 새로운 문자를 만든 것은 그 용기가 대단한 거죠.” 11세기 이후 500년 동안 동아시아에서만도 몽골의 쿠빌라이 칸의 지시로 만든 파스파 문자, 서하국이 한자를 변형해 만든 서하 문자, 만주족이 쓰던 만주 문자처럼 새로 만들어진 문자들이 여럿 있었지만 다 사라지고, 지금까지 독립된 문자 체계를 유지하며 안정적으로 사용되는 문자는 한글이 유일하다.한글과 파스타, 티베트, 부라흐미 등 고대 이후 세계 문자들의 자형 비교표. 한글 자음이 각 문자와 어떻게 대응하는지 보여준다. 혜화1117 제공 흔히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고 한다. 문자는 그 언어에 담긴 생각과 말을 저장하고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 공유할 수 있는 결정적 수단이다. 그렇다고 모든 언어가 문자를 갖고 있는 건 아니다. 현재 세계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7천여종이나 되지만 문자는 150여종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파우저는 “문자의 존재 여부만으로 문명 수준을 판단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매우 단순화한 접근”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언어 다양성의 반대는 언어 패권”이라며 “언어는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문자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으로 유지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아메리카 대륙이나 인도네시아, 오스트레일리아(호주) 같은 지역의 소수민족 언어들은 소멸 위기에 빠져 있는데 문자는 그런 게 별로 없어요. 라틴어는 로마가톨릭의 제례와 교리 언어로 쓰이는 것 말고는 사어가 된 지 오래지만, 지금도 서양 고전 인문학 연구에서는 라틴어 텍스트를 공부합니다. 히브리어도 아주 좋은 사례죠. 종교 문자로만 전해지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19세기 말부터 유대 민족주의가 강해지면서 현대어로 부활한 언어예요.” 5000년이 넘는 문자의 역사를 조망한 파우저의 관심사는 21세기 현재와 다가올 미래로 향했다. 인공지능(AI) 시대가 부쩍 현실화하면서 인류는 역사상 유례없는 문자 환경에서 살게 됐다. 매일 수많은 플랫폼에서 엄청난 양의 텍스트가 생산·유통된다. 그중에는 정보의 가치나 참·거짓을 구별하기 어려운 것들도 많다. “인공지능이 지적 생산을 대체하게 된다면, 책을 쓰는 인간의 위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우려”도 있다.로버트 파우저가 지난달 2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개막한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신간 `문자 전파담'을 산 독자에게 저자 사인을 해주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파우저는 “어쩌면 인간이 문자를 직접 쓰는 일이 사라질 수도 있지만 문자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역설적으로 어느 때보다 ‘문자’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고도 했다. 대규모 언어 모델(LLM)을 포함한 고성능 인공지능도 계속해서 문자를 학습하고 활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필요한 능력은 달라진다. “앞으로는 문해력보다 판별력, 그리고 사고력이 더 중요해요. 인공지능이 쏟아내는 정보를 그대로 믿는 게 아니라 정확하게 판단하고 수용하는 능력이죠.” 또 그는 “인공지능 시대에 배울 게 정말 많은데, 그중 중요한 것 하나가 ‘미디어 리터러시’”라며 “미국도 한국도 학교에서 그런 수업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문자의 발생과 전파, 명멸을 따라 기나긴 인류 문명사의 여정을 마친 그에게, 문자로 본 ‘인류 문명’은 무엇인지 물었다. “문명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전달되는 것이죠. 공동체의 기억이라든가 오랫동안 쌓인 삶의 지혜 같은 걸 전하는 데 문자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말은 사라지고 기억하는 사람도 없지만, 지나간 시간의 기록이 문자로 쌓여 (문명의 전승·교류·확산이) 가능한 거죠.” 파우저는 ‘문자 전파담’을 영어와 일본어로 번역하고 싶다고 밝혔다. “지금은 인공지능이 발달해서 번역도 더 쉬워졌어요”라며 웃는 모습에, 힘든 공부와 집필을 마친 학자의 안도감과 뿌듯함이 비쳤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문자, 제국과 종교를 따라 문명을 가로지르다 [.txt]
미국 언어학자가 한글로 쓴 문명사 “문자 단일기원설은 서양 패권주의” 한글, 한자문화권에서 독보적 문자 “AI 시대엔 문해력보다 판별력 중요” 17세기 초, 유럽 학자들은 이란에 있는 거대한 폐허가 고대 도시 페르세폴리스(기원전 6~4세기)의 유적임을 확인했다. 건축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