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_악기장 이정기복원된 화왕산성의 북은 현재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멀리서 보면 북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산이다. 북통을 타고 나이테가 흘러내린다. 아니 봉우리를 향해 등고선이 오른다. 마침내 다다른 정점에 검은 고리 하나를 박았다. 칠도 장식도 문양도 없다. 누릅나무가 만난 백 년의 계절이 시간의 결로 몸통을 감싼다.북 만드는 사람 이정기. 구인사, 삼광사, 불국사 등 수많은 사찰의 법고와 ‘악학궤범’에 나오는 건고, 삭고, 응고, 뇌고 등 모든 북을 제작하였다. ‘영천북’의 전통을 이었으며, 2012년 국가무형유산 ‘악기장’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사진 서헌강·국가유산진흥원 제공광고자전거 페달을 굴리다 멈추면 좌르르 래칫 소리가 들린다. 티베트의 가파른 설산을 올라 좌르르 돌리는 마니차(摩尼車) 소리 같다. 한 바퀴 돌리면 경전을 한 번 읽은 거란다. 이대로 늘어져 수만 번이라도 읽고 싶다. 그러나 래칫은 그만 쉬라는 죽비 소리, 다시 헐떡이며 페달을 굴린다. 북을 만나러 가는데, 심장으로 바퀴를 구동해 가야 예의지 않겠는가. 땅에는 장미화, 담벼락에는 능소화가 흔들리는 6월의 뙤약볕을 달린다.광고지금쯤 매미의 애벌레가 나무를 기어오르리라. 5년을 땅속에서 꼼지락거리다, 탈피하여 여름 한 철을 울 것이다. 들판의 황소도 한 5년 쟁기질하다, 탈피하여 북으로 백 년을 운다. 큰북은 소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자세로 북통을 통째로 감싼다. 지름이 160센티 정도 되는 법고가 그렇다. 불가에서 법고는 축생을 제도하는 소리라 한다. 소가 북으로 환생하여 짐승을 해탈케 하는 것이다.1979년 제4회 ‘전승공예대전’에 법고가 등장했다. 출품자 박균석(1919~1989)은 서대문 밖 영천에 터 잡아, ‘영천북’으로 이름난 명장이었다. 북이 필요하면 모두 영천에 왔고, 국립국악원도 조선시대의 북을 의뢰했다. 박균석은 북이 정교한 수공으로 세워 올린 숭고한 문명임을 알렸다. 그의 법고가 대통령상으로 선정되었는데, 대통령의 서거로 최규하 이름으로 상장을 받았다. 그리고 1980년 국가무형유산 ‘북 메우기’의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이때 함께 한 수제자가 경기도 고양시 벽제에 터 잡은 이정기(1957년 생)이다.광고광고벽제교 건너 몇 굽이를 도니 ‘이정기국악기연구원’이 있다. 2시간 거리를 해찰하느라 3시간이 걸렸다. 공방 안에는 침묵이 묵직하게 깔려 있다. 반가운 수인사를 하고, 접대용 믹스커피 한 잔을 받아 들었다. 입가에 백태를 핥던 내 혓바닥에 감로수다. 작업장을 한 번 둘러보니, 말 없는 아버지와 말 없게 생긴 아들(이선용, 1984년생)이 다시 일 속에 빠진다. 부자유친이다. 북통을 만드는데, 손발이 척척 맞는다. 둥근 테를 잡자, 초승달처럼 켠 나무 쪽을 넣는다. 쪽들이 테 안에서 각진 원이 된다. 각과 각이 치밀하게 맞물리는 초정밀의 수공이었다. 아버지는 52년을 만들었고, 아들은 북소리를 태교로 태어났다. 테를 치는 망치 소리가 목탁처럼 여운이 맑다.부자유친이다. 북통을 만드는 데, 손발이 척척 맞는다. 둥근 테를 잡자, 초승달처럼 켠 나무 쪽을 넣는다. 쪽들이 테 안에서 각진 원이 된다. 아버지는 52년을 만들었고, 아들은 북소리를 태교로 태어났다. 사진 서헌강·국가유산진흥원 제공“안마당에 라일락이 만개했어요.” 그는 1974년 5월, 박균석의 공방에 발 디딘 순간을 선문답처럼 말한다. 충남 공주에서 올라와 시계방과 구두방에서 점원이란 이름의 잔심부름꾼을 했다. 타일공사를 따라다녔고, 악세사리 가게에서 철사를 구부렸다. 중학교 두 달, 야학 서너 달 다닌 게 최종 학력. 6남매의 맏이였기에, 동생들은 가르쳐야 했다. 일터를 떠돌며 얹혀살았고, 월급만 집에 보냈다. 낙이라고는 신문이나 잡지, 굴러다니는 걸 다 읽는 거였다. 18살에 더 나은 벌이가 필요해 영천에 왔다.광고그는 무예에 통달한 사나이 무전능(武全能)이 되고팠다. 신문에서 읽은 김광주의 무협소설 ‘하늘도 놀라고 땅도 흔들리고’의 주인공이었다. 무전능의 손에 있는 무림의 비기인 ‘운검비책’도 읽고 싶었다. 소림사도 처음 들어가면 장작을 패고 물을 긷는다. 공방도 역시 허드렛일이 먼저였다. 북통이나 북틀에 사포질을 했다. 장갑도 없이 잡은 사포로 손에 물집이 잡히고 피가 터졌다. 쉴 틈이 생기면 책장을 넘겼다. 책에 피가 묻을까 봐, 손가락을 빨며 읽었다. 어느 날, 스승의 거실에 있던 ‘악학궤범’을 펼쳤다. 위풍당당한 조선의 북들이 인생의 설계도처럼 상세히 그려져 있었다.북일은 목공일, 가죽일, 나무와 가죽이 만나는 북 메우기, 마지막 단청까지 분업화되었다. 톱질, 끌질, 대패질, 그리고 생가죽의 털과 기름을 제거하는 무두질, 가죽을 늘리는 쟁치기질, 무수한 ‘질’로 장차 살아갈 ‘길’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살길이 아니었는지 목공일, 가죽일을 하던 사람이 하나둘 떠났다. 빈자리를 자신이 홀로 채웠으니, 결국 북일 전체에 능통한 사나이 고전능(鼓全能)이 되어갔다.1986년, 스승은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에 쓸 초대형 북을 의뢰받았다. 그런데 경쟁입찰이라는 말에 기권했다. 북은 제소리가 나야 하는데, 외모만 갖춰 내놓을 수 없었던 거다. 이정기는 소리 앞에서 모든 이익을 물리던 스승의 고집을 물려받았다. 소리가 만들어지는 결정적인 순간이 북통에 가죽을 덮는 ‘북 메우기’다. 가죽을 멜대에 걸어서 당기고, 또 당긴다. 이내 사람이 북 위에 올라 두 발로 가죽을 밟아가며 당긴다. 젖은 가죽을 두들겼을 때 귀보다 먼저 “가슴에 와닿는 울림”이 있을 때까지. 자로 잴 수도, 말로 설명할 수도 없는, 초감각의 세계를 터득해 나갔다. 그리고 하늘도 놀라고 땅도 흔들리고 마는 북소리를 완성했다.2010년 무렵, 나는 종묘에서 종묘제례악을 해설했다. 무공을 칭송하는 ‘정대업(定大業)’의 시작이 북을 열 번 치는 ‘진고십통(晉鼓十通)’이다. 전쟁에서 북은 앞으로 가라는 명령이고, 징은 물러서라는 명령이다. 진고십통, 진격을 알리는 북인데도 어쩐지 슬펐다. 살아 돌아온 발자국과 돌아오지 못한 발자국이 함께 들리는 듯했다. 심장을 움켜쥐는 웅혼한 북이 뉘 북인가 물었더니, 이정기의 북이라 했다.광고2003년 7월17일, 일 년에 하루 쉰 날, 불이 났다. 옆집에서 난 불이 비닐하우스로 만든 공방에 옮겨붙었다. 일부러 아껴둔 나무가 숯이 되고, 가죽은 익어서 녹아내렸다. 대패 자루, 망치 자루 하나도 남지 않은 폐허 속에서 전업을 고민해야 했다. 그러나 이미 약속해 둔 백담사의 법고가 있었다. “빼도 박도 못하고” 갈팡질팡할 때, 아는 이에게 전화가 왔다. “목재 좀 실어 보내겠소.” 그 말에 다시 가슴속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2005년 백담사의 법고가 설악산에 울려 퍼졌다. “눈물이 나더라고요.” ‘영천북’을 계승한 이정기의 명성도 퍼져 나갔다. 그리고 2012년 국가무형유산 ‘악기장’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당시 ‘북 메우기’가 ‘악기장’으로 통합되어 있었다.2017년 국립국악원에서 의뢰가 왔다. 2005년 경남 창녕군 화왕산성 연지에서 발굴된 통일신라시대의 북을 복원하는 일이었다. 9세기의 북이 기별을 해 온 것이다. 그는 서너 달 누릅나무만 쳐다보고 있었다. 말없이 나무가 말을 걸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어느 날 자귀로 툭툭 쳐 내려가며 숨은 결을 찾아 나섰다. 복원된 화왕산성의 북은 현재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며칠 전 나는 그 북을 곰곰이 바라보고 있었다.멀리서 보면 북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산이다. 북통을 타고 나이테가 흘러내린다. 아니 봉우리를 향해 등고선이 오른다. 마침내 다다른 정점에 검은 고리 하나를 박았다. 칠도 장식도 문양도 없다. 누릅나무가 만난 백 년의 계절이 시간의 결로 몸통을 감싼다. ‘이토록 겸손한 연륜이 있더란 말인가.’나는 어느새 북의 정상에 올라 있었다. 문득 두보의 시 ‘등고’(登高)가 떠올랐다. 병든 몸을 이끌고 누대에 올라 천하의 명문을 읊는다. ‘사방의 낙엽은 쓸쓸히 떨어지고(無邊落木蕭蕭下), 끝없는 장강은 도도히 흐르네(不盡長江滾滾來).’ 나도 북의 고리에 걸터앉아 도도히 흘러내리는 시간을 바라봤다. 그 순간 북의 이름이 떠올랐다. 북에 오른다는 뜻의 ‘등고’(登鼓). 내면에서 홀연히 풍류가 일었고, 북의 탯자리를 향한 것이다.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에 진열된 화왕산성 북의 복원품. 칠도 장식도 문양도 없다. 통나무를 깎아 고리를 달고, 가죽을 대고 못을 박았다. 그럼에도 흘러내리는 멋을 주체할 길이 없다. 나는 북의 이름을 등고(登鼓)라 지었다. 이정기 제공부자는 여전히 말이 없고, 손만 분주하다. 북이란 침묵을 통에 담고, 시간을 가죽에 메우는 일인가 보다. 나는 짧게 인사를 하고 자전거에 오른다. 좌르르 래칫 소리가 풀린다. 능소화가 긴 그림자를 흔드는 벽제의 오후가 천천히 등 뒤로 밀려난다. 등고(登鼓), 오늘은 그 북에서 내려가는 길이다.진옥섭 |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소룡의 ‘당산대형’을 보고 ‘무(武)’를 알았고, 탈춤과 명무전을 통해 ‘무(舞)’에 빠졌고, 서울의 굿을 발굴하면서 ‘무(巫)’를 만났다. 기생, 무당, 광대, 한량을 찾아 ‘남무(男舞)’, ‘여무(女舞)’, ‘전무후무(全舞珝舞)’를 올렸다. 마침내 ‘무(無)’를 깨닫고, 사무친 이야기를 담은 ‘노름마치’를 출간했다. 국가유산진흥원 이사장을 역임하고, 담양군문화재단 대표이사로 일했다. 현재 ‘사서삼담’, 4일은 서울 3일은 담양에 있으며, 무대와 마당 사이의 문화판에 산다.
북, 이토록 겸손한 연륜이 있더란 말인가 [진옥섭 풍류로드]
26 _악기장 이정기 복원된 화왕산성의 북은 현재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멀리서 보면 북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산이다. 북통을 타고 나이테가 흘러내린다. 아니 봉우리를 향해 등고선이 오른다. 마침내 다다른 정점에 검은 고리 하나를 박았다. 칠도 장식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