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國巫) 이용녀. 국가무형유산 황해도평산소놀음굿의 전승교육사이다. 전날 황해도굿의 명무(名巫)들은 모두 판을 떠났다. 이제 그가 옛 ‘나라 만신’들의 뒤를 이어 인천으로 피란한 황해도의 신들을 받들고 있다. 이진환 사진작가 제공광고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에서 말했다. ‘모든 성스러운 것들은 다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그러나 이 땅의 역사가 만만치 않아, 그러지 못했다. 신들도 인간의 형편을 따라야 하니, 한국전쟁으로 피란을 나왔다. 황해도의 신들은 지척의 인천에 자리 잡았다. 뱃길이 열리면 돌아가겠노라는 고향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 올림픽 오륜기가 펄럭이던 1988년, 황해도의 신들을 위해 또 한 사람이 불리고 있었다.그해 4월2일, 외할머니 신촌(1922~1988) 만신(무당)이 타계했다. 외손녀 이용녀(1959년생)는 초상 치르러 왔다가 화장실에 갔다. 불덩어리 두개가 나타나 빙빙 돌더니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순간 뼈와 살이 분리되고, 뼈만 도르륵 말리는 것 같았다. 혀도 말리고, 손발이 말리며 고꾸라졌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데,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화장실 문이 부서지고, 업혀 나가 방 안에 눕혀졌다. “나는 용녀 몸에 왔으니, 너희는 용녀를 나 보듯 해라.” 제 입에서 나오는 외할머니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엎드려 절을 했다.8월9일, 외할머니의 신딸 조채분(1933~2000)에게 내림굿을 받았다. 처음에는 고꾸라지며 난동을 부렸다. 하필이면 왜 나냐고, 데굴데굴 구르며 울었다. 조채분은 외할머니가 오는데 어쩔 거냐, 정 싫다면 일반 굿으로 돌리겠다고 했다. 굿값을 구하러 돌아다니던 어머니가 울고 있었다. 다시 일어나, 얼굴을 씻고 흰 깃발을 흔들었다. 찬 기운이 일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목덜미가 쭈뼛쭈뼛해지며 말문이 터졌다. “단군 할아버지, 장군님, 신씨 대신(외할머니)…”, 몸으로 들어오는 신의 이름을 고하였다. 그리고 벼락같이 외쳤다. “사람들 살리는 무당이 되겠습니다.” 조채분이 솔잎을 묶어 만든 빗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빗어 올려 주었다. 일을 마친 무당 할머니들이 담배를 물었다. 이제 자신도 저렇게 늙어갈 거였다. 품어 낸 흰 연기가 실오라기로 흩어지고 있었다.광고열다섯살, 중학교 못 간 친구들과 공장에 다니며 노래란 노래는 다 따라 불렀다. 스무살, 강화도에서 면직공장에 다닐 때 약장사들이 벌인 노래자랑에서 ‘임금님의 첫사랑’을 불렀다. 나가는 족족 선풍기를 타서 동네 할머니들에게 돌렸다. 스물다섯살, 서울의 알 만한 작곡가 사무실에서 ‘섬마을 선생님’을 불렀다. 음반취입을 제안받았는데, 제작비가 100만원이라 포기했다. 내림굿이 30만원이니, 70만원을 아끼고 나이 스물아홉에 무당 직업에 취업한 거였다.내림굿이 끝나자, 등산객 두명에게 점을 쳐 굿이 두 자리가 생겼다. 이후 굿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거의 매일 돼지 잡고 굿을 했다. ‘전화국 만신’으로 불리는 신어머니 조채분, 외할머니 굿의 장구를 치던 ‘연수동 할머니’를 모시고 굿을 했다. 사람이 죽어서 하는 ‘진오귀굿’에서 용녀가 맡는 일이 있었다. 당시 시골 노인들은 통장 없이 자신만의 금고가 있었다. 그런데 돈의 행방을 못 알리고 죽은 것이다. 장롱 위아래나 벽장은 자손들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장독간의 고춧가루 단지나, 주춧돌 아래에서 파내 주었다. 뒷밭 상수리나무 아래 비료 포대에 묻어둔 돈을 찾는 영험한 신딸이 되었다.광고광고굿의 사설을 듣자마자 외워지는 게,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뿐인가, 부모가 모두 황해도 옹진 사람이었다. 뱃사람인 아버지의 ‘배치기’, 어머니의 아낙네 노래 ‘나나니 타령’은 가족의 망향가였다. 그 노래가 굿판에서 나왔으니, 곧바로 선창할 수 있었다. 여기에 드센 황해도 말투가 줄줄 나오니, 그간 살아온 날이 황해도굿을 위한 예행연습이었다. 3개월 후, 신의 기운을 솟게 하는 ‘솟을굿’을 하였고, 작두 위에 올라갔다. 또 3개월 후, 무당은 잘 불려야 하기에 ‘불릴굿’을 하였고, 사방팔방의 굿판에 불렸다. 예전 노래란 노래는 다 따라 부르고 놀던 인천 용현시장에 자리 잡았고, ‘용한 용녀 무당’으로 이름이 났다.1999년 ‘황해도평산소놀음굿’의 이선비(1934~2019)가 굿 잘하는 무당을 찾았다. 인천의 원로 무당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용녀를 얘기했다. ‘황해도평산소놀음굿’은 멍석으로 소를 만들어 놀며 풍년을 기원하는 큰 굿이다. 소가 퇴장하면 무녀가 그네를 타는데, 그네의 발판이 작두였다. 수제비 잘하는 손이 국수 못 할까. 곧바로 작두 그네로 공중에 솟아올랐고, 내려와 담금질 된 목청으로 사람들을 흔들었다. 2000년, ‘서해안풍어제’의 김금화(1931~2019)가 굿을 같이 하자고 불렀다. 무당이란 멸시를 딛고 대중 앞에 섰고,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받은 만신이었다. 예전에 나라의 굿을 하는 ‘나라 만신’이 있었는데, 김금화로 인하여 다시 국무(國巫)라는 이름으로 회자되었다. 굿을 함께할 수 없었지만, 굿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이선비를 사사하여 2005년 이수자가 되었고, 2022년 국가무형유산 ‘황해도평산소놀음굿’ 전승교육사로 임명되었다.광고무당을 ‘만신’이라 부른다. 높임말은 아니지만, 무당보다는 나은 호칭이다. 이 땅에는 1만 신이 있고, 이를 모신다고 ‘만신’(萬神)이라 부른다. 신이 너무 많지 않나 싶어 둘러보면, 이웃 일본은 800만 신이 있고, 히말라야의 네팔은 인구 3천만보다도 신이 더 많다 한다. 인구 많은 인도는 3억3천만 신이 있는데, 아직도 부족한 모양이다. 해외 토픽에서 보니 ‘비자신’을 모시는 사원이 생겼다. 그 신에 기도하면 비자 발급이 쉽다고 한다. 이쯤이면 백만, 천만, 억! 소리 나는 숫자의 신보다, 이 땅의 1만 신이 단출해서 좋다.지난 2월28일 ‘국무 이용녀의 진접굿(남산국악당)’, 무당이 모시는 신을 대접하는 굿이었다. 신도 인간의 음식을 받는지라 식성도 참 인간적이다. 그래서 굿도 채식주의자인 비건 신을 위한 ‘소(蔬)굿’과 고기를 즐기는 신을 위한 ‘육(肉)굿’으로 나뉜다. 소굿을 시작하는 ‘일월맞이’에서 이용녀가 신의 하강을 기원하자, 관객들이 줄줄이 나와 굿상에 절을 하였다. 굿판은 이렇게 무녀의 축(祝)과 관객의 제(祭)가 합일하여 축제가 되었다. ‘산천거리’는 팔도 명산의 신령을 모시는데, 조상의 본향인 황해도 구월산 신령이 오기를 간절히 청했다. 장단이 빨라지니, 오방색 깃발을 흔들며 춤을 추었다. 그리고 깃발을 둘둘 말아 내미니, 관객들이 줄을 섰다. 모두 행운의 빨간색을 기대하며 재수기를 뽑고 공수(신의 말씀)를 들었다. 굿판은 사람이 절로 나와 속내를 열게 하는 것이다. 굿의 거리거리마다 무대 위에 관객이 붐볐다.국무(國巫) 이용녀의 ‘장군거리’이다. 무대를 극장에서 마당으로 옮겨 작두 위에 올랐다. 황해도는 대대로 전쟁터였다. “피로 물든 이 나라를, 전쟁을 치러 지키신” 역대의 어르신들을 위로한다고 했다. 이진환 사진작가 제공‘육굿’에서 통돼지를 제수로 올려, ‘장군거리’를 놀았다. 장구와 징과 바라가 쟁쟁 울렸다. 그 촉급한 박자 속에서도 틈을 찾아 발을 디뎠다. 그곳이 시퍼런 작두날 위니, 사람이 발붙일 자리가 아니었다. ‘검은 작두 희게 갈고, 흰 작두 바짝 날을 세워’, 그 쩍쩍 들러붙는 날을 밟으며 춤을 추었다. 황해도는 대대로 전쟁터였다. “피로 물든 이 나라를, 전쟁을 치러 지키신” 역대의 어르신들을 위로한다고 했다. 작두 위에 올라 장군의 위엄을 드러내고, 전쟁처럼 피를 보는 험한 액운을 작두로 끊어내는 것이다. 칼날에 선 그의 맨발을 보니, 많은 얼굴들이 지나갔다. 작두, 여물을 썰자고 만들었지, 사람이 서자고 만들었겠는가. 그 험한 비탈을 오르던 이선비와 김금화, 그리고 황해도의 원로 만신들이 모두 타계했다. 신과 함께 귀향을 꿈꾸었던 국무들이었다. 이제 신들의 귀향은 새로운 국무 이용녀의 몫으로 남겨졌다.신은 신복을 통해 모셔지는데, 무녀 홀로 벅차다. 흥이 과한 관객들이 나서 신복을 입었다. 옷걸이에 매달려 애가 타던 신들이 신바람 났다. 무녀와 관객과 신이 함께 만든 대동의 ‘무감서기’다. 이진환 사진작가 제공관객이 물밀듯 무대에 몰려드니 ‘무감서기’다. 신은 신복을 통해 모셔지는데, 무녀 홀로 벅차다. 흥이 과한 관객들이 나서 신복을 입었다. 옷걸이에 매달려 애가 타던 신들이 신바람 났다. 형형색색의 옷들이 활개를 치니, 땀이 뚝뚝 떨어지는 꽃밭이다. 신의 숫자를 헤아리니, 1만 신이 분명했다. 이용녀가 북을 둥둥 울리며 ‘배치기’를 불렀다. “연평바다에 돈 실러 가자 에에헤에….” 신들의 그리운 망향가를 관객이 합창하니, 국무 이용녀의 진접굿은 무녀와 관객과 신이 함께 연 대동의 세상이었다. 그렇게, ‘영혼과 예술을 위한 365분’이 무르익어, 굿이 활짝 피어나고 있었다.광고진옥섭 |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소룡의 ‘당산대형’을 보고 ‘무(武)’를 알았고, 탈춤과 명무전을 통해 ‘무(舞)’에 빠졌고, 서울의 굿을 발굴하면서 ‘무(巫)’를 만났다. 기생, 무당, 광대, 한량을 찾아 ‘남무(男舞)’, ‘여무(女舞)’, ‘전무후무(全舞珝舞)’를 올렸다. 마침내 ‘무(無)’를 깨닫고, 사무친 이야기를 담은 ‘노름마치’를 출간했다. 국가유산진흥원 이사장을 역임하고, 담양군문화재단 대표이사로 일했다. 현재 ‘사서삼담’, 4일은 서울 3일은 담양에 있으며, 무대와 마당 사이의 문화판에 산다.
영혼과 예술을 위한 365분…신들의 망향가를 합창하다 [진옥섭 풍류로드]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에서 말했다. ‘모든 성스러운 것들은 다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그러나 이 땅의 역사가 만만치 않아, 그러지 못했다. 신들도 인간의 형편을 따라야 하니, 한국전쟁으로 피란을 나왔다. 황해도의 신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