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광고서울대학교에서의 정년퇴임이 일년 정도 남아 있을 무렵, 평소에 별 면식이 없던 두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자신들은 지금 ‘녹색대학’이라는 교육 기관을 설립하려 하는데, 좀 도와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우리 교육 상황과 이를 타개해 나가지 못하는 제도권 대학들의 현실 앞에서 크게 좌절감을 느끼던 참이었다.일단은 경청할 만한 제안이라 생각했다. 다만 나는 학교의 설립이나 운영은 적성에도 맞지 않거니와 현실적으로 재력도 없기에, 협력에 한계가 있으리라고 보았다. 이러한 내 생각을 간파했는지, 이들은 재정과 운영 문제는 다 뒷받침할 것이니 오직 새로운 녹색 문명을 지향하는 교육에만 관심을 두고 기본 방향을 이끌어 달라고 했다. 또 녹색대학은 기존 제도적 틀에서 벗어나 오로지 교육 본연의 정신만으로 운영하겠다고도 했다.문명의 위기, 교육의 위기를 맞이하여 제도권 안에서의 투쟁에는 한계가 있음을 실감하던 나는 이것을 또 다른 기회로 생각했다. 아주 소박한 형태로나마 이상적인 새 대학을 설립하고 교육 본연의 정신으로 이 대학을 운영함으로써 우리의 교육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면, 이것 또한 의미 있는 기여가 될 수 있으리라 본 것이다. 나는 일단 긍정적으로 판단하면 별 망설임 없이 나서는 성격이기에 총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퇴임 후의 시간을 쏟아붓기로 마음먹었다.광고일부 사람들이 이미 준비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작은 액수나마 재정적 지원에 나섰고, 기존 교육의 틀에서 환멸을 느낀 일부 학생들이 앞으로 입학해 공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었다. 설립할 학교의 터와 건물은 경남 함양군 백전면, 이미 폐교된 백전중학교 교정을 인수하기로 했다. 낡은 학교 건물을 약간 수리하여 교육 공간으로 사용하기로 했고, 운동장 한편에는 컨테이너 대여섯 동을 이어 붙여 임시 기숙사로 활용하도록 했다. 그리고 더 필요한 공간이 있다면 구성원들이 직접 나서서 지어 나가겠다는 의지도 다지고 있었다.내가 참여하고 반년 정도 지났을 무렵, 벌써 개교하자는 의견들이 나왔다. 나 또한 참여하기로 한 이상 혼신을 바쳐야 한다는 생각에서 아직 반년 정도 남은 정년 시기를 기다리지 않고 임의 퇴직 형식으로 서울대를 떠나 개교에 참여했다.광고광고새 대학의 설립 취지와 목표에 대해서는 당시 내가 작성했던 ‘녹색대학 창립선언문’에 비교적 잘 나타나 있기에 여기에 그 일부를 축약해 소개한다.“오늘 인류는 새로운 희망을 꿈꾸고 있지만, 죽음의 그림자는 갈수록 짙게 드리워지고 있다. 자원을 캐내어 제품을 생산하고 이를 유통·소비·폐기하는 전 과정에 걸쳐 자연은 이미 그 자정 능력의 한계를 넘어섰고, 인간을 비롯한 지구 상의 뭇 생명은 그 존폐의 위기에 도달하였다.광고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가장 절실한 과제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를 추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찾아내는 일이다. 이는 파멸로 치닫고 있는 현대 문명을 청산하고 장기적 생존이 가능한 새 문명을 창출해 내는 과제에 해당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지금까지 스스로 지성의 산실임을 자부해 온 대학들이 나서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오늘의 대학들은 이미 잘못 가고 있는 문명의 틀 안에 편입되어 이를 오직 지속시켜 나가는 기능만을 수행하고 있을 뿐 이를 내부에서 개혁해 내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에 놓여 있다.이에 우리는 새로운 대안대학인 녹색대학의 창립을 선언한다. 새로 설립되는 녹색대학은 첫째, 기존 문명의 틀에서 벗어나 새 문명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이에 맞는 새 삶의 방식을 찾아나가고자 한다. 현대 문명의 가장 큰 병폐가 생태계와의 조화 상실에 있다고 보고 어떻게 하면 생태적 조화를 회복하면서도 그 안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단순한 이론적 차원이 아니라 현실적 삶을 통해 추구하고 익혀 나가려고 한다. 둘째로 녹색대학은 교육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려고 한다. 기존의 대학들이 지나치게 제도의 틀 안에 갇힘으로써 교육의 본질을 외면하고 있음에 반해 녹색대학은 기존의 모든 정형화된 제도와 교육 방식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무엇이 진정 내실 있는 교육인가 하는 점에만 초점을 맞추어 나갈 것이다.우리는 이제 이러한 새 대학을 창립함으로써, 모든 존재가 서로를 살리는 상생의 관계에 있음을 깨닫는 큰 배움의 장을 열어나가고자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함께 만드는 이 배움의 장에서 다 함께 녹색의 일꾼들로 거듭나 자연과 인간이 어울려 살아가는 새 문명 창조에 이바지하고자 한다.”이런 선언문의 선포와 함께 2003년 4월, 우리는 함양에 마련한 교정에서 조촐한 녹색대학교 창립식을 열었다. 당국의 허가 등은 아예 무시했다.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배우겠다는 데에 무슨 인가 등의 절차가 필요한가! 학생 선발을 위해서는 학교의 목표에 맞는 결의를 지녔는지를 확인하는 절차만을 거쳤고 별도의 입학시험은 없었다. 입학 이후에도 시험이라는 제도는 두지 않기로 했다. 다만 자신의 학습 내용을 충실히 기록한 개인별 ‘학습 내용 파일’을 작성해 대학에 영구 보관하면서, 수시로 이를 발표하고 공개 검토함으로써 자신의 속도에 맞는 지적 발전을 추구해 나가기로 했다. 나머지 모든 공동 행사는 전체 합의로 결정하고 수행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다.광고이 새 학습 공동체에 대한 외부인들의 관심과 격려도 이어졌다. 특히 지리산 실상사 회주 도법스님을 비롯하여 지금은 타계한 김진균 서울대 교수와 이효재 이화여대 교수, 고은 시인 등 여러 뜻있는 분들이 찾아와 용기를 북돋워 주기도 했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치 못했던 문제들이 나타났다. 첫째는 운영에 필요한 재정 문제였다. 아무리 좋은 뜻으로 모인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생계는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간 기대했던 후원금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재정 문제를 책임지겠다던 사람들이 믿었던 것은 거액의 기부자들이 곧 나오리라는 낙관적 환상이었음이 드러났다. 나를 비롯해 모두 함께 나서서 적극적 모금 활동을 펼쳐 보았지만, 결국 현실의 두꺼운 벽만을 확인할 뿐이었다.다른 한가지 문제는 각자가 지닌 이념의 차이였다. 근본적으로 ‘녹색’이라는 큰 방향엔 동의했지만, 그 안에도 색조의 격차가 있었다. 또 소신이 강한 사람일수록 포용력이 약하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나는 우리가 ‘대학’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있는 이상, 지성의 함양에 중심 가치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여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듯했다.결국 이러한 장벽들을 넘어서지 못했고, 내가 지닌 ‘녹색대학의 꿈’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렇게 두번의 실패를 겪었다. 서울대 간판을 내려놓고 지역 거점 국립대학 등 10개 대학과 함께 열린 교육을 하자(한겨레 8월4일치 24면·4화 국립대 학사과정 개방화 방안)는 제도권 내 개혁의 시도가 좌절되었고, 이후 대안대학의 시도도 실패로 끝났다. 이 두가지 경험을 통해 나는 자신의 한계를 통감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상적인 안을 구상하고 이를 제시하는 것일 뿐, 사람들의 마음을 파악하고 설득하는 일에는 크게 못 미친다는 점이다.지금 녹색대학을 일구려던 그 자리에는 여전히 배움을 내걸고 있는 작은 생활 공동체가 유지되고 있다. 내가 지녔던 꿈과는 다르고 또 더 이상 내가 도울 상황은 아니지만, 나름의 녹색 정신을 이어가는 분들이 있기에 그나마 큰 심정적 위로를 받고 있다.한편 나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모여 조촐한 공부 모임을 지속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녹색 아카데미’인데, 여기서는 주로 ‘녹색 지성’의 함양을 목표로 서로의 지혜를 나눈다. 이미 20여년 지속되고 있는 ‘녹색 아카데미’는 당시 조교로 녹색대학에 참여했던 제로에너지건축 연구자 최우석(파시브기술연구소)과 황승미 작가가 온라인을 통해 정성껏 이끌어 가고 있다.장회익 | 1938년 경북 예천 출생.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30여년 교수로 일하다 퇴임하고, 지금은 충남 아산에서 살고 있다. 자유로운 사색을 통해 통합적 학문의 모습을 그려보는 ‘소요거사’로 지낸다. 물리학 말고도 과학이론의 구조와 성격, 생명의 이해, 동서 학문의 비교 연구, 온전한 앎의 성격 등에 관심이 있다. 저서로는 ‘과학과 메타과학’, ‘삶과 온생명’,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 ‘공부도둑’(‘공부 이야기’),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등이 있다.
서울대 서열화 개혁 무응답에 ‘녹색 대안대학’을 꿈꾸다
서울대학교에서의 정년퇴임이 일년 정도 남아 있을 무렵, 평소에 별 면식이 없던 두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자신들은 지금 ‘녹색대학’이라는 교육 기관을 설립하려 하는데, 좀 도와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우리 교육 상황과 이를 타개해 나가지 못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