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구글 선호 매체 등록영화 ‘오디세이’. 유니버설 픽처스 제공 광고 슬라보이 지제크 |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지휘자 사이먼 래틀은 수백명의 연주자와 합창단을 동반하는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구레의 노래’에 대해 “그저 600명의 사람이 필요한 실내악일 뿐”이라고 비유한 바 있다. 이 역설적인 설명은 크리스토퍼 놀런의 ‘오디세이’에 잘 들어맞는다. 여러 리뷰가 거대한 스펙터클과 전투의 사실성을 언급하는 것과 달리, 이 영화는 소박한 실내극에 가깝다. 트로이는 거대한 대도시로 묘사되지 않고, 그리스군은 황량한 해변에 고립된 수십명의 무리처럼 보인다. 장관이어야 할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장면에도 과잉이 없다. 이러한 절제는 이 영화를 위대하게 만드는 핵심 요소다.광고 서사시 ‘일리아스’가 남성의 위업과 투쟁에 초점을 맞추며 여성을 배경의 장식물로 축소시키는 것에 비해, ‘오디세이’가 여성의 내면을 위한 공간을 마련한다는 점은 널리 언급되어 왔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앤 해서웨이와 샬리즈 세런 같은 유명 배우는 성애화되지 않은 모습으로 등장하고, 원작에서는 남자들을 유혹하는 여성이었던 키르케는 남성들의 탐욕에 혐오를 느끼다 못해 그들을 돼지로 만들어 버린다. 반면, 아가멤논 왕이나 트로이 병사들과 같은 남성들은 투구로 얼굴이 가려지거나 익명의 존재로만 등장함으로써 영웅주의적 서사에 기여하지 못한다.광고광고 영화는 영웅시가 은폐한 더러운 현실을 폭로한다. 목마 안에 숨은 그리스 전사들은 비좁은 공간에서 서로의 몸에 배설을 하며 며칠을 견딘다. 이러한 묘사는 브레히트적인 방식으로 신화를 낯설게 만든다. 새 시대의 시작 지점에 원초적인 범죄가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는 점은 영화의 성취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인들에게 목마가 화해의 선물이라고 설득하기 위해 젊은 병사 시논을 보내면서 그에게 목마 안에 그리스 병사들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시논이 거짓말을 진심으로 믿어야만 작전이 성공하기 때문이다. 그는 시논이 살해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청동기 시대의 영웅적 명예의 질서가 오디세우스의 조작과 거짓말 위에서 고전기 그리스로 이행했듯, 지금 인류는 기계의 시대에서 인공지능(AI)과 ‘탈진실’이 지배하는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다음 질서가 더 고차원적인 문명일지, 새로운 야만일지는 알 수 없다. 모든 문명이 야만 위에 세워지지만, 이데올로기는 찬란한 새 질서만을 찬양하고 그 토대가 된 범죄는 숨긴다. 반대로 영화는 그 범죄가 어떤 문명을 탄생시킬지는 보여주지 않은 채 문명 건설의 폭력만을 전면에 내세운다.광고 나는 ‘오디세이’를 몰락하는 질서를 그린 비극이 아니라, 서구 전통의 기초가 된 새로운 문명의 잔혹한 탄생극으로 읽고 싶다. 따라서 지난 시대의 영웅적 명예를 향한 오디세우스의 향수는 거짓이다. 새로운 질서에 이미 들어선 이상 과거로 돌아갈 길은 없으며, 옛 위대함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새로운 야만을 낳기 때문이다.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오디세우스를 생존을 위해 욕망을 억누르고 지배를 얻는 부르주아적 주체의 원형으로 읽었지만, 이런 해석 역시 불완전하다. 오디세이의 술수는 단순히 더 큰 집단의 생존을 위해 개인을 합리적으로 희생시키는 도구적 이성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과 자신에게 강요하는 포기와 희생 속에서 가학적인 쾌락을 얻는 도착적 충동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죽음으로 내몬 병사들을 기리기 위해 서쪽으로 떠난다. 짓궂게도 나는 그가 아메리카에 도착했다가 오디세우스의 파괴성을 알아본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하는 엔딩 크레디트 영상을 혼자 상상해 본다. 그래도 이렇게 어렵고 어두운 영화가 어리석은 블록버스터 영화들 속에서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문명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희망적인 신호로 보인다. 번역 김박수연
새 문명의 잔혹한 탄생극 ‘오디세이’ [세계의 창]
슬라보이 지제크 |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지휘자 사이먼 래틀은 수백명의 연주자와 합창단을 동반하는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구레의 노래’에 대해 “그저 600명의 사람이 필요한 실내악일 뿐”이라고 비유한 바 있다. 이 역설적인 설명은 크리스토퍼 놀런의 ‘






